제276화 망중한 (1)
지금 차도도의 회유와 함께 맞닥트린 가장 중요한 일은 헌팅턴 프로젝트의 연장이다.
물론 프로젝트 기간이 아직 1년이나 남아 있으나 강우는 이 프로젝트를 10년짜리 거대 2차 프로젝트로 새롭게 계약할 생각이었다.
10년은 상온핵융합 기술의 완성을 의미한다. 즉 헌팅턴과 끝까지 함께할 결심을 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헌팅턴의 주요 인물을 국내로 불러서 협상해야 한다. 지금 이 협상이 더 중요해진 이유는 차도도 유학과 연계할 작전을 세웠기 때문이다.
첫 프로젝트를 체결하면서 만났던 헌팅턴사의 두 인물, 알렉스 고든 헌팅턴 부사장과 마이크 그레이엄 연구책임자를 서울로 불러들여야 한다.
당연히 평범한 제안으로는 이들을 움직일 수 없다.
“지금까지 수행한 결과만으로는 헌팅턴의 신뢰를 완벽하게 끌어내기 힘들어.”
프로젝트 체결 후 2년간 그가 해낸 일은 많다. 손차희, 윤수아, 최대우 각자를 1저자로 삼아 출간한 논문만 해도 대단한 성과다. 거기에 헌팅턴이란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하은찬, 유혜림과 함께 쓴 논문도 상당히 주목을 받았다.
이 실적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이 실적으로 프로젝트 연장을 제안한다면 1차 때와 같은 규모로 성사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강우는 이보다 훨씬 큰 대규모 프로젝트를 노렸다.
언제까지 현실화되지 않은, 논문에서만 논의되는 핵융합 기술을 다루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프로젝트는 실제 개발과 상용화로 들어가야 해. 거기에 구체화 된 발전소 초기 모델까지. 나아가 발전소 건설을 포함하면 더 좋고.”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상온핵융합 발전소를 건설하여 세계 도시의 불을 밝히고 있었다.
심장이 뛴다. 그의 기술이 인류의 삶을 바꾸어놓는 기적의 현장이 그려진다. 과학기술의 금자탑을 세워 새로운 과학 문명의 문을 열어젖히는 장엄한 순간이다.
“헌팅턴이 핵융합 기술을 믿고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게 하려면…….”
실제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현재 핵융합 기술은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핵융합을 일으키려면 수소 플라스마를 수억K의 고온에 가두어 반응을 일으켜야 한다. 지속적인 핵융합 반응을 위해서는 수십 분 이상의 시간 동안 플라스마를 안정화하여 반응을 유도해야 한다. 현재의 기술로는 온도를 낮추기도 어렵고 지속시간도 수초를 넘기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다. 강우가 추구하는 기술의 핵심은 뮤온 입자의 촉매 기능이다. 핵융합 반응에서 촉매 역할을 해주는 뮤온을 정교하게 투입하면 온도를 대폭 낮추고 안정화 시간을 늘릴 수 있다.
물론 뮤온에도 약점이 있다. 바로 뮤온의 수명과 에너지 효율의 비현실성이다.
“기술적 장벽은 거의 허물어졌다…….”
지난 3년간의 활동은 차도도를 비롯한 고곽천재, 신새벽 등과 함께 이룬 업적이다. 정확하게는 핵융합을 연구하는 ‘강우 사단’을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강우 사단에는 강우를 단장으로 하여 차도도와 신새벽이라는 부단장이 있고 그 아래 손차희부터 유혜림에 이르는 단원이 존재한다. 확장해서 랜디와 애나까지 포함할 생각도 있었다.
“앞으로 강우 사단이 실질적인 핵심이 되어야 해.”
강우 사단을 구축하면서 그는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해왔었다. 엄밀하게는 차도도 등이 아직 준비되지 않아서 그 홀로 연구했던 분야다.
올해 들어 다른 연구원들이 느슨해졌을 때 그는 원룸에서 더욱 연구에 몰두했다.
그 연구 결과가 모습을 드러낼 순간이 왔다. 이 보고서는 2차 프로젝트 체결에서 중요한 임팩트를 가할 것이다.
즉 이 연구는 상온핵융합의 현실화를 증명하는 기술이다. 헌팅턴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 않을 수 없는.
강우는 모니터에 요약해둔 내용을 재검토했다.
“이 제안으로 핵융합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
아직 완성된 기술은 아니었지만, 헌팅턴을 끌어들이기에는 충분하다.
그는 여러 보고서를 묶어서 하나의 파일로 만든 후 헌팅턴의 연구책임자 그레이엄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 제목에 ‘대단히 중요’라는 문구까지 넣어서.
지금까지 그는 헌팅턴에 직접 보고한 적이 없었다. 항상 요셉을 통해 헌팅턴에 접촉했다. 요셉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 그가 보낸, 평소와 차별화된 이 이메일은 그레이엄의 눈을 끌 수밖에 없다.
이메일 발송을 다시 확인한 후 그는 노트북을 덮었다.
이것으로 그가 할 일은 끝났다. 당분간 헌팅턴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이제는 잘 시간. 미국은 반대로 아침이고 이 메일을 받은 그레이엄이 고민에 빠질 시간이다.
자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난다.
강우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오늘은 금요일 밤, 내일은 휴일이다. 그레이엄은 주말을 앞두고 난데없는 폭탄을 맞았다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그가 똑똑하다면 이 제안의 중요성과 함께 자신이 헌팅턴에서 입지를 확고하게 구축할 기회가 왔음을 깨달을 것이다.
물론 부담은 없다. 헌팅턴이 싫다면 다른 회사를 찾으면 되니까. 전 세계에는 헌팅턴 말고도 핵융합 기술을 노리는 기업이 널렸다.
* * *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방안은 어느새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10시가 넘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어젯밤 너무 무리했나…….”
지난 3년을 정리한 획기적인 제안에 흥분한 영향일지도 모른다. 그 짐을 내려놓으니 정신없이 잠에 빠졌나 보다.
다시 울리는 전화 소리에 강우는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았다.
모르는 전화번호다. 그 번호가 국내가 아닌 국외란 것은 알겠다.
“네, 강우입니다.”
강우는 영어로 말했다.
저쪽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레이엄입니다. 헌팅턴 잉걸스 인더스트리즈 연구책임자요.
마이크 그레이엄은 헌팅턴에서 전체적인 연구총괄 책임자다. 미래의 투자는 모두 이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안녕하십니까?”
그가 이 메일을 보내고 답변이 지금 날아왔으니 거의 한나절 걸렸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 적어도 주말 동안 고민하리라 봤는데 그만큼 저쪽의 몸이 달았다는 증거다.
- 핵심만 묻겠습니다. 제안서가 사실입니까?
“당연히 사실입니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합니다. 물론 실제로 실험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필요한 실험 장비가 제게는 없으니까요.”
당연한 말이다. 핵융합 실험 장비는 개인이 소유할 그런 규모가 아니니까. 한국에서는 오직 국가 지원을 받는 대한핵융합센터에만 있다.
- 이게 정말이라면 왜 지난번 보고서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프로젝트 계약서에 적힌 연구 범위를 벗어나는 기술이니까요.”
- 그럼 프로젝트와 별도로 이 연구를 수행했다는 겁니까?
“엄밀하게는 완전히 별도라고 할 수 없으나 내용상으로는 프로젝트 다음 단계 기술을 뜻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 당신은 대체…….
감탄한 그레이엄의 말이 끊어졌다.
당연히 강우도 그의 심정을 추정할 수 있었다.
충격이겠지.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던 핵융합의 현실화가 지금 손에 잡혔으니까. 전 세계 과학자들이 수십 년간 매달리고도 찾지 못했던 바로 그 해법이다. 이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겠지.
“진실인지는 확인해보시죠. 보고서 마지막에 적힌 순서를 따라 토카막 장치에서 간이실험을 해보시면…… 아마 일주일이면 결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실험에서 핵융합을 지속해서 일으키고 우리가 통제할 기술을 보유했음을 확인하세요.”
강우는 넉넉히 일주일의 시간을 언급했으나 헌팅턴이 서두른다면 3일이면 충분하다.
-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씀한다는 것은…….
“실패 가능성이 없다는 거죠.”
지금까지 강우가 보여준 실적이 있기에 헌팅턴도 믿지 않을 수 없다.
- 그런데 뭔가 부족한 점이 곳곳에 있습니다.
“압니다. 모든 것을 보고서에 다 넣을 수는 없지요. 저도 협상할 무기를 하나쯤 들고 있어야 하니까요. 제가 보낸 내용은 실험실에서 핵융합 가능성을 확인하는 수준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제가 이미 해결해둔 기술과 앞으로 연구할 부분을 합쳐야지요. 진실 여부는 알아서 생각하시고요.”
이 정도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 알겠습니다. 일단 실험을 통해 현실성이 어떤지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게 뭡니까?
“2차 프로젝트를 체결하는 겁니다.”
- 2차요? 규모는?
“앞으로 10년간, 규모는 무한대에 가깝죠.”
- 그건 무리입니다만.
“선택권이 헌팅턴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주일 후면 아실 겁니다.”
패기 있는 강우의 선언에 상대방의 신음이 들려왔다.
강우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아실 겁니다. 이건 극비입니다. 절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저에게는 헌팅턴 외에 다른 대안도 널려있으니까요. 저는 제안했고 다음은 헌팅턴에서 대답할 차례입니다. 다음 회의 장소는 한국 서울로 하지요.”
- 갑자기 서울로 오라는 겁니까?
“제가 서울에 있으니까요. 더 합당한 이유가 필요합니까? 좋은 답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개 연구원이 감히 선언할 수 없는 강한 경고였다. 일방적인 요구에 놀란 듯 그레이엄이 침묵에 잠겼다.
추가로 몇 마디를 덧붙인 강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레이엄에게는 금요일에 떨어진 날벼락이자 기회가 될 것이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후 강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사한 햇빛이 창으로 들어왔다. 파란 하늘이 선명한 맑은 날씨여서 기분이 상쾌하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는 눈사람 만들기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눈이 잘 뭉쳐지지 않고 속도도 느리다. 하지만 작은 눈 덩어리를 굴려 어느 정도의 크기가 되면 한번 굴릴 때마다 그 덩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굴리기도 쉽고 주변 눈을 끌어당기는 효과도 대단하다.
연구 개발도 비슷하다. 초기에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개발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시간이 걸리고 진행이 어렵다. 여기저기 장애물도 많다.
그러다가 어느 수준에 올라서면 그때부터는 스스로 전진한다. 투자자가 몰려들고 연구 자체가 하나의 생명처럼 사방으로 뻗어가면서 스스로 영향력을 키우며 성장한다.
지금 강우의 상온핵융합이 그 단계 초입에 들어섰다.
“이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지.”
지금까지는 헌팅턴이 갑이었고 그가 을이었다. 헌팅턴의 연구비에 목을 맨 상황이었다. 요셉도 마찬가지다. 그와 요셉의 관계는 요셉이 갑이었다. 학계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대외적인 창구의 교섭력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연구는 그가 하더라도 요셉을 통하지 않으면 쉽게 움직이기 힘든 그런 상황이었다.
이 순간부터는 다르다.
모든 주도권을 그가 쥐기 시작했다.
헌팅턴도 요셉도…… 이제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가담하지 않으면 그들은 핵융합이란 거대 시장에서 물러나야 하니까.
그리고 차도도나 신새벽도 마찬가지다. 이 두 사람의 미래 또한 주도권이 그에게 완전히 넘어왔다. 차도도도 그를 따라 유학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연구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모두가 궁극적으로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해방하려는 그의 목표에 부합하기에 강우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흐른다!”
강우 사단은 이미 결성되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그를 따르면 부와 명예가 따라오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늘은 그의 인생 목표에 큰 발자국을 찍은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
그 뜨거운 열정을 가슴에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