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7화 망중한 (2)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초인종이 울렸다.
그의 원룸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가끔 자고 가는 최대우는 지금 울릉도에 있으니 이곳에 나타날 일이 없다.
“차 쌤?”
곧바로 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차도도와는 지난 속초 여행 이후로 어색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어서 그녀가 여기를 찾아올 리가 없었다.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문을 탕탕 치는 소음이 들려왔다.
“강우야! 내가 왔어! 문 열어!”
“헉! 신 쌤!”
신새벽에게 이곳을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온 거지?
일단 문부터 열었다.
“얼른얼른 안 열고 뭐 해?”
문밖에서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신새벽이 그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무심코 그녀를 쳐다보던 강우는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허억!”
“놀랐구나?”
오늘 신새벽은 멋졌다. 작년에 그가 사주었던 연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차도도의 하늘색 원피스를 사면서 함께 샀던 그 원피스다. 선물했던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오늘 처음 봤으니 당연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흐음.”
강우는 가자미 눈으로 그녀를 다시 확인했다.
신새벽이 실실 웃으며 둘러댔다.
“난 무슨 옷이든 잘 어울리거든?”
“그렇긴 하네요. 옷걸이가 좋으니까요.”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실제로 신새벽이란 옷걸이는 대단하다. 아마 노점에서 파는 싸구려 옷을 입혀놓더라도 빛을 발할 게 뻔하다.
“자, 이거 받고.”
그래도 집들이라고 생각했는지 신새벽이 그에게 주스를 안겼다.
얼떨결에 주스를 받은 강우를 옆으로 밀치고 신새벽이 들어와서 방안을 둘러봤다.
“이야! 독립했구나.”
“독립은 무슨 독립요. 기숙사에서 쫓겨나서 살 곳이 사라졌을 뿐인데요.”
“내게 말하지? 그러면 내가 하숙 쳤을 텐데.”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 [독점]
“내게 말하지? 그러면 내가 하숙 쳤을 텐데.”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불과 반년이라 그것도 좋은 해법이란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그가 차도도 집에 머물지 않고 원룸에 거주하듯이 신새벽 집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안다.
“그랬으면 내가 밥도 잘해 먹였을 텐데.”
“맨날 싸우지 않았을까요?”
“푸흡! 너랑 나랑? 체급이 맞아야…….”
조금은 무시하는 신새벽의 말에 강우는 반박하려다가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어쨌든 아무리 졸업했다지만 그녀와 그는 스승과 제자라는 틀에 묶여 있고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문득 차도도와의 관계도 떠올랐다.
미국에 함께 가자면서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차도도와의 관계 또한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날 속초에서 차도도가 개인적인 사정을 이유로 들었지만 결국은 이 관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략을 잘못 잡았나.
좁은 원룸 구경은 금방 끝났다.
그의 책상과 침대까지 꼼꼼하게 훑어보고 불편한 점은 없는지 확인한 신새벽이 물었다.
“점심 먹었어?”
“아, 아뇨, 먹어야죠.”
“혼자 살 땐 잘 챙겨 먹어야 하거든? 오늘 점심은 내가 챙겨줄게.”
냉장고를 열던 신새벽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내가 요리를 해주고 싶지만…… 이건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있는 것이라곤 라면밖에 없어. 어떻게 할까?”
강우네 집에 요리 재료가 있을 리 없다. 요리할 줄 모르는 데다 연구에 바빠서 요리할 시간도 없다. 어떨 때는 밖에서 사 먹을 시간도 없어서 굶기도 한다.
오래전 손강우 시절에 자주 하던 습관이라 지금도 낯설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신새벽이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을 리가.
“안 되겠다. 나가서 사 먹자. 얼른 준비해.”
밖에서 먹는 것으로 결정했다.
대충 옷을 챙겨입으면서 물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대우한테 물어봤지.”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 아니면 우리 교수님이 굶고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잔소리가 폭풍처럼 쏟아졌다.
집 밖으로 나왔다.
부근 담벼락에 신새벽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차 타고 갈까?”
“아뇨, 근처에 분식집 있어요.”
제대로 먹어야 한다는 그녀를 가까운 분식점으로 안내했다. 사실 한가하게 음식점을 순례할 만큼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적당히 덮밥으로 점심을 해치운 후 부근 공원을 걸었다.
대낮이라 뛰어노는 어린이들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 날씨가 괜찮다는 둥, 올해 학교 신입생 수준이 예년 대비 조금 떨어진다는 둥 잡다한 대화를 나누다가 신새벽이 물었다.
“그래서 뭐 하고 있었는데?”
“방금 헌팅턴에서 전화를 받아서…….”
“앗! 그건 큰 건데?”
“그렇죠? 앞으로 몇 년은 미국에서 먹고 살 발판이 될 거니까요.”
“몇 년은 무슨, 평생일지도 모르지.”
강우는 헌팅턴에 보낸 프로젝트 제안서를 설명했다. 그녀도 프로젝트를 담당해야 할 구성원이기에 어차피 알려야 할 일이다.
신새벽이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그럼 프로젝트를 연장하는 거야?”
“잘 풀리면요. 오랜 기간 프로젝트니까 연구비도 이번에는 세게 받아야죠.”
강우의 결심을 신새벽이 응원했다.
“쌤, 그래서 지금 헌팅턴과 일전을 앞두고 있는데요.”
“싸우면 당연히 이겨야지.”
“아마 그럴걸요? 깜짝 놀랄 조건으로 계약에 성공할 거예요.”
“우와! 우리 교수님 대단하네!”
오늘따라 신새벽이 말끝마다 교수님, 교수님이라 하니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근데 쌤은 이 좋은 주말에 여긴 왜 왔어요?”
“나? 주말이면 뭐해. 한가하더라고. 아침에 일어나서 고민하다가…… 요즘 네가 좀 우울해 보이더라. 그래서 와 봤어.”
그녀의 눈썰미도 대단하다. 작전 실패 이후로 기분이 조금 다운되어있었는데 그걸 용케 알아챘다.
“한가하실 때도 있나 보네요.”
“네가 연구하라고 구박만 안 하면 한가해.”
“숙제 더 내드려야겠다.”
신새벽이 장난삼아 주먹을 들었다가 눈치를 보더니 쓱 내렸다.
“흠, 프로젝트도 별문제 없고, 유학 전선도 잘 진행되고…… 그런데 뭐가 문제니?”
“아무 일 없는데요?”
“내 앞에서 거짓말하지 마. 내가 촉 하나는 죽이거든? 넌 지금 분명히 어떤 난관에 빠져 있어. 솔직히 불어!”
티를 낸 기억은 없는데 그녀에게는 다르게 보였나 보다.
나란히 걸음을 옮기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신새벽이 알만하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흠, 요즘 차 쌤도 조금 이상하거든? 너랑 차 쌤 사이에 무슨 일 있었지? 그렇지?”
“에이, 차 쌤이랑 아무 일도 없어요.”
“그렇게 정색하며 부정하니까 더 이상한데? 얼른 불어!”
신새벽의 집요한 추궁에 강우는 어쩔 수 없이 최근에 있었던 사건을 대충 요약해서 털어놓았다.
“흠, 차 쌤이 유학을 거절한다는 거지? 넌 가자고 계속 꼬시는 중이고?”
“제 인생의 목표에서 쌤이 꼭 필요하거든요.”
“난?”
“당연히 쌤도 필요하죠.”
“이거 영광인데?”
금방 태세를 전환한 신새벽의 입가에 미소가 활짝 폈다.
“그러니까 쌤도 차 쌤을 잘 타일러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알았어. 시도는 해보겠는데…… 그런데 말이다, 뜻대로 안 된다고 너무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어.”
“알아요, 인생이 항상 꽃길만은 아니고 내 멋대로 할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많이 컸네.”
신새벽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쓱 훑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신새벽이 말을 이었다.
“세상사는 뜻대로 되지 않고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기도 해. 넌 좋은 의도로 말했더라도 듣는 상대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리고 그 결과가 반드시 나쁘거나 좋거나 한 것만은 아니야.”
신새벽의 충고에 강우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19세기 말, 마이컬슨과 몰리는 정밀한 간섭계를 고안했었죠. 그들은 광파의 간섭 현상을 실측할 수 있는 기구로 지구의 운동 속도와 방향을 잴 수 있다고 생각했죠. 이때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때여서 그들의 성공을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런데 간섭계로 잰 지구는 조용했다. 지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지동설이 물러나고 천동설이 다시 들어올 판이었다.
말이 안 되는 실험결과에 마이컬슨과 몰리는 우주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고 이 결과는 마침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실험적 기초를 제공했다.
이처럼 과학에서는 실패가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강우의 설명에 흥이 돋은 신새벽이 다른 예를 들었다.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야. 과학사를 보면 실제와 달리 억울했던 과학자도 많잖아. 예를 들어…… 산소를 처음으로 분리해낸 사람이 누군지 아니?”
“18세기 과학자 조세프 프리스틀리. 산화수은에서 산소를 처음으로 분리해냈죠.”
“그래, 교과서에는 그렇게 나오지. 하지만 실제로는…… 칼 빌헬름 쉘레가 2년이나 먼저 산소를 분리해냈어. 그것도 여러 가지 물질에서. 쉘레는 자신의 발견을 정리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는데 출판업자가 미적대는 바람에 무려 5년이나 걸렸지. 그 바람에 대발견은 프리스틀리에게 돌아갔어. 쉘레는 잘못한 게 없는데도.”
산소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독일의 화학자 쉘레였다. 쉘레는 황산에 이산화망간을 넣어 새로운 기체를 만들었다. 이 기체에 초를 넣었더니 눈부시게 타올랐다. 그는 이 기체에 ‘불의 공기’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바로 산소다.
하지만 산소 발견을 처음으로 논문으로 쓴 사람은 프리스틀리였고, 산소가 새로운 원소임을 알아낸 사람은 라부아지에였다.
그가 알아듣기 쉽도록 신새벽이 과학자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자신의 잘못이든, 아니면 타인의 잘못이든 그 영광이 뒤집히는 경우는 흔하다.
의외로 과학사에서 이런 경우는 자주 있었다.
유명한 별의 시차 발견만 하더라도 계산 결과를 먼저 끝낸 사람은 토머스 핸더슨이었다. 희망봉에서 관측한 그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후에야 관측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그보다 나중에 발견했던 프리드리히 베셀은 독일에서 관측했기에 곧바로 발표할 수 있었다.
핸더슨이 영국으로 돌아와 책으로 출판하기 1년 전에 베셀이 먼저 발표함으로써 그 영광을 베셀이 차지했다.
신새벽이 웃으며 말을 보탰다.
“이런 예도 있어. 불타는 물질에는 플로지스톤이 있다는 예전의 이론을 타파하고 화학반응에서 질량보존의 법칙을 처음으로 주장했던 사람은 앙투안 라부아지에야. 그 공로로 그는 화학의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명예를 얻었지.”
“라부아지에는 화학을 전공한다면 모를 수 없는 인물이죠.”
“그런데 실제로는 30년 전에 러시아의 과학자 로모노소프가 먼저 주장했었거든. 실제로 논문발표도 먼저 했었고. 그런데 러시아어로 쓴 논문을 유럽에서는 읽을 수 있는 과학자가 아무도 없었지. 그래서 로모노소프는 자연스럽게 묻혀 버렸고.”
로모노소프가 저승에서도 얼마나 억울해할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네가 차 쌤을 미국으로 데려가려고 애쓰는 건 알겠는데……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다고 해서 꼭 실망할 필요는 없는 거야. 진심은 언젠가는 통하는 법이니까.”
신새벽의 말을 듣고 있자니 한결 마음이 푸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