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8화 망중한 (3)
불이 꺼진 세미나실을 바라보는 차도도의 고민이 깊어졌다.
오늘은 휴일이라 도서관이 텅 비었다. 세미나실의 문이 닫힌 장면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지난 3년간 그녀는 이 세미나실의 불이 꺼진 모습을 본 기억이 몇 번 없다. 강우와 고곽천재는 휴일과 방학을 가리지 않고 이곳에 나와 연구에 매달렸으니까.
그녀가 직접 들어가진 않았어도 불이 켜진 세미나실 앞을 지나가면서 뿌듯했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오늘도 당연히 강우가 학교에 나와 있으리라 생각하고 도착했는데 실험실에도 세미나실에도 정작 어둠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지?”
사실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갈 곳 없는 강우가 있을 장소라면 집인 원룸일 테니까.
“어디 아픈가?”
최근 들어 강우와 소원한 관계가 계속되는 바람에 그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멍한 상태로 세미나실을 노려보고 있자니 속초에서 보낸 그녀의 생일날이 떠올랐다. 결혼하자던 강우의 프로포즈가 싫지는 않았다. 단지 당황했을 뿐.
한편으로는 함께 유학 가기를 강요하는 그의 방식이 밉기도 했다. 적어도 강우는 그녀가 왜 유학을 가지 않는지 그 이유를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그와 그녀 사이에 놓인 10년이란 벽과 스승과 제자라는 장애물까지 이중으로 그녀의 사고를 가로막았고 집안 문제까지 겹치자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날 이후 그와 그녀는 과거의 관계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어색함이 진해졌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요즘은 강우를 피해 다녔다. 강우 역시 딱히 그녀를 찾지 않았다.
“기껏 두 달이야.”
두 달여 지나면 강우는 한국을 떠난다. 그때까지 어떤 식으로 상황이 변할지 그녀도 짐작할 수 없지만…….
“설마 유학을 포기하진 않겠지.”
그의 말처럼 유학을 포기하고 그녀 곁에 머무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와 헤어지기는 싫다. 이중적인, 모순된 마음이 그녀의 행동과 결심을 주저하게 한다.
역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은 강우가 아닌 그녀였다.
지금 그녀가 바라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그녀는 이곳에 남고 강우는 본인의 목표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강우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를 놓아주어야 할 시점이 다가온다.
“밥은 제대로 먹고 있으려나?”
아프지 않다면 학교에 왔을 강우이기에 차도도는 목적지를 정했다.
차도도는 도서관을 나와 강우의 원룸으로 향했다.
* * *
공원 산책을 마치고 강우는 신새벽과 함께 원룸으로 방향을 틀었다.
역시 공원을 산책하니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책상 앞에서 고민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가벼운 기분에 다시 결심을 다지고 있을 때 신새벽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차 쌤이 유학을 가지 않는다면, 너 혼자 가게 된다면 어떻게 할래?”
“그런 일은 없을걸요?”
“만일이란 게 있잖아. 너 혼자 미국 가면, 아니 나랑 같이 가면…….”
신새벽의 유학은 이미 정해졌으니 둘이 함께 갈 상황은 사실상 확정이다.
정작 강우는 아직 그런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미국에 가면 힘들 거야. 모든 게 낯설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 주변엔 천재들만 득실거리고 평소 우리를 보살펴주던 가족과 친구는 없으니까.”
“그렇겠네요.”
“그때 옆에 있어 주면 좋잖아?”
문득 지금 신새벽이 제안하는 내용이 그가 차도도에게 제안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나도 알아. 내가 부족하다는 거. 그래도 난 앞으로 네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계속 응원해줄 수 있어. 네가 연구 외에 다른 일에는 신경 쓰지 않도록 도울 수 있어. 어때?”
“그, 그게…….”
아마 신새벽이라면 정말 그럴 것이다.
애초 그의 계획에서 신새벽은 차도도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이다.
강우는 자신이 계획한 강우 사단이 숫자 계산처럼 명확하게 꾸려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인간이기에 사람의 감정, 특히 이성 간의 애증이 존재했다.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구축한 그의 세상이 현실에서는 감정이 개입되어 부실해졌다.
과연 차도도와 신새벽 두 사람과 동시에 함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손차희나 윤수아와도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나아가서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어.’
역시 남녀 사이란 복잡했다.
강우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신새벽의 제안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 이상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지금은 어떤 확답도 줄 수 없다.
신새벽이 그의 손을 꾹 잡았다.
그때였다.
“강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강우는 급히 뒤를 돌아봤다.
신새벽도 얼른 손을 떼고 안색을 수습했다.
강우는 예상치 못한 사람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었다.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차도도였다.
“쌤?”
강우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하필 신새벽과 이러고 있을 때 만나다니.
차도도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살폈다.
“둘이 뭐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산책 중…….”
신새벽이 허겁지겁 변명했다.
“밥은 먹었어?”
“응, 근처에서.”
“……어쩐지 강우네 집 옆에 네 차가 보이더라니.”
신새벽이 세워둔 차가 화근이었나보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학생처럼 강우와 신새벽이 멀뚱거리고 있자니 차도도의 눈이 신새벽의 옷을 훑었다.
차도도의 안면이 확 굳어졌다.
순간 강우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색상은 달라도 익숙한 스타일임을 차도도도 알아본 것이다. 한눈에 그녀는 신새벽이 입은 원피스의 정체를 파악한 모양이다.
차도도가 경멸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강우를 노려봤다.
강우는 그녀의 분노에 감히 맞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요즘 어색한 관계인데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이다.
한참 말없이 강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차도도가 몸을 홱 돌렸다.
“쌤!”
차도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강우가 급히 따라가서 차도도의 팔을 붙잡았으나 그녀는 그를 뿌리치고 더 빨리 달아났다.
“하아아!”
상황이 심상치 않다. 신새벽과 둘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해명이 쉽지 않은 판에 예전에 준 선물마저 신새벽이 입은 옷과 한 쌍이었으니 변명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
강우는 멀어지는 차도도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후에야 강우는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운 나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내가 잘 해명할게.”
신새벽이 그를 달랬다.
“괜찮아요. 그럴 때도 있는 거죠. 역사적으로 보면 지독히 운이 없었던 과학자도 있었거든요.”
18세기의 프랑스 천문학자인 르장띠는 금성이 태양의 가장자리를 지나는 금성일면통과 현상을 정확히 측정하면 태양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금성의 두꺼운 대기층 때문에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이 실험을 위해서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럽과 동시에 관측을 수행해야 했다.
르장띠는 인도의 프랑스인 정착지인 퐁디세리로 갈 계획을 세웠다. 르장띠가 퐁디세리에 도착했을 때 하필이면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 중이었고 영국이 그곳을 점령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배 위에서 관측을 시도했으나 배가 흔들려서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멀리 인도까지 간 보람을 찾지 못했다.
금성일면통과는 대략 100년에 두 번씩 연달아 일어나는 희귀현상이다. 그로부터 8년 후 또 한 번 예정되어 있었다. 그날이 지나면 앞으로 100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르장띠는 8년을 인도에 머물면서 절치부심 그날을 기다렸다. 치밀한 조사 끝에 르장띠는 기상 상태로 보아 퐁디세리보다 필리핀 마닐라가 더 관측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마닐라에서 대기했고 다행히 그날 하늘은 맑았다.
하지만 천문현상이 시작된 그 시각, 정확히 구름 한 점이 태양을 가렸다. 르장띠의 8년 계획은 무산되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퐁디세리에 있었더라면 하늘이 맑아서 성공했을 것이다.
재수가 없었던 르장띠는 관측에 실패하고 11년 만에 프랑스에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그는 거지가 되어있었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친척들이 그의 집과 재산을 모두 나눠 가져가 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과학자였다.
자신이 과학자라고 생각하는 강우는 운이 없었던 선대의 과학자를 떠올리며 마음을 달랬다.
* * *
헌팅턴에서 연락이 왔다.
급했는지 강우의 예상보다 더 빨리 상황이 진전됐다.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그레이엄에게서 온 전화였다.
- 미스터 강.
“말씀하시지요.”
- 말씀하신 대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물론 강우는 결과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제안했던 실험은 예외가 일어날 수 없었으므로.
그레이엄의 떨리는 목소리가 느껴졌다.
- 예상대로였습니다. 우리는 핵융합이 일어나는 현장을 처음으로 목격했습니다.
물론 인류 역사에서 핵융합은 실험실 수준에서 자주 있었다.
수소폭탄 개발이 대표적인 핵융합 반응이고 입자가속기에서 양성자를 가속하여 충돌시키는 것도 핵융합이다. 실험실의 토카막 장치에서도 아주 작은 규모의 핵융합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만 그 어느 것도 인류가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의 유의미한 핵융합은 아니었다.
- 우리는 수소 플라스마의 반응이 10여 분간 유지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이것은 핵융합 연구의 쾌거입니다. 이것을 조금만 더 보완하면…….
“그 수준으로는 상용화가 어렵다는 점을 잘 아실 텐데요? 제가 말씀드린 실험 방식으로는 딱 거기까지입니다. 현실에서는 그보다 월등히 많은 원자핵을 다루어야 하고요. 발생한 에너지를 처리하고 제어할 기술적 난관이 존재하죠. 그 실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수많은 난관을 극복…….
“앞으로는 더 큰 어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극복할 기술을 소유한 사람은 전 세계에서 오직 저밖에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다른 사람이 손댈 수조차 없는 기술이죠.”
- 압니다.
흥분했던 그레이엄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강우도 흥분한 마음을 억눌렀다. 그가 개발한 상온핵융합 기술이 현실이 되었으니 그 기쁨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헌팅턴 앞에서는 아니다.
“일전에 제가 말씀드린 제안을 기억하시죠? 절대 외부로 이 실험이 새어나가서는 안 됩니다. 한번 한국에 오시죠. 2차 프로젝트 협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그러잖아도 추진 중입니다만…….
“협상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헌팅턴 말고도 다른 기업이 대기하고 있으니까요.”
이 정도 말했으면 눈치챘을 것이다. 이번 협상에서 헌팅턴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강우는 추가로 의견을 덧붙였다.
“아마 헌팅턴 고위직이 움직이면 타 기업의 정보망이 눈치챌 겁니다. 그래서 한국 방문 목적을 프로젝트 중간 점검으로 잡으시면 어떨까요? 마침 한국대 마도환 교수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 곧 결정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강우는 전화를 끊고 앞을 바라봤다. 그의 앞에 차도도와 신새벽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