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망중한 (4)
“어떻게 하겠대?”
“확답은 없었으나 곧 올 겁니다.”
강우의 얼굴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헌팅턴이 프로젝트를 협상하러 국내로 들어온다고?”
“명목상은 프로젝트 중간점검이죠. 우리와는 계약 기간이 이제 1년 남았고 한국대와는 6개월 남았으니까요. 점검할 때도 됐죠.”
차도도에게 불안감이 역력했다.
“그럼 우리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냐?”
“중간보고 자료는 만들어야죠. 물론 형식적이긴 한데요. 우리 실적은 이미 낸 논문만으로도 차고 넘치거든요.”
프로젝트 체결 후 헌팅턴이 연구비를 지원했다고 코멘트를 붙인 논문만 모두 5개나 된다. 고곽천재 각자의 이름으로 출간하는 바람에 개수가 늘었다. 고곽천재의 대학 진학이랑 엮이기도 했고. 여차하면 신새벽이 쓴 논문도 있으니 실적은 부족하지 않다.
“쌤은 차희에게 보고할 자료를 준비시키면 될 거예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강우의 지시에 차도도는 고개만 끄덕였다.
강우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아직 2차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한다. 단지 상온핵융합 상용화와 관련되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최근 들어 강우와 어색한 관계가 계속되는 바람에 제대로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뭔가를 준비하느라 바쁜 강우를 붙잡고 늘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지금 옆에 있는 신새벽이 신경 쓰였다.
애초에 헌팅턴 프로젝트와 신새벽은 전혀 상관없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걸까? 차도도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직면한 기분이었다.
“도와줄 건 없어?”
“괜찮아요.”
강우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 판은 자신이 벌인 일이니 앞으로 어떻게 요리할지 두 사람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헌팅턴을 앞세워 마도환에게 타격을 입히고 차도도 또한 그의 손으로 확실하게 잡을 생각이다.
물론 인생의 목표를 향한 전진은 당연하다.
“자, 그럼 저는 이만 갑니다. 헌팅턴에서 연락 오면 전달하겠습니다. 늦은 밤까지 고생하셨어요.”
강우는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은 B동 상담실. 지금은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다.
강우가 떠난 후 차도도와 신새벽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신새벽이 입을 열었다.
“강우 요즘 달라지지 않았어?”
“예전이라면 같이 가자고 했을 텐데…….”
“조금 사무적으로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차도도가 신새벽을 노려봤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날? 아,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런데 애가 왜 저렇게 변해?”
“이젠 애 아니라니까.”
두 사람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차도도도 지금 이 다툼이 괜한 트집임을 안다. 지금 신새벽을 야단치는 이유도 사실 자신을 향한 자책에서 비롯되었다.
‘그래도 강우가 꿋꿋하게 전진하고 있으니까…….’
강우가 핵융합의 꿈을 잃지 않고 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고마웠다. 적어도 자신이 강우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아서 안도했다.
“우리도 그만 가지?”
차도도가 먼저 소지품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뒤를 신새벽이 헐레벌떡 쫓아갔다.
“같이 가!”
* * *
한국대 물리학과 회의실에서 마도환이 대학원생들에게 소리 질렀다.
“발표 준비 끝났나? 다과도 장만했고?”
“예! 말씀하신 대로 모두 마련했습니다.”
대학원생 김상원은 회의실 탁자에 과자와 음료를 줄 맞추며 대답했다.
김상원은 현재 박사과정 5년 차다. 사실 그의 이력은 조금 복잡하다.
그는 이미 은퇴한, 마도환의 지도교수 밑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때 박사과정에 하늘 같은 선배인 마도환과 손강우가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도교수가 정년 퇴임하고 마도환이 한국대 교수가 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마도환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됐다. 그날부터 인생이 꼬였다.
이미 5년 차임에도 언제 졸업할지 기약이 없었다. 게다가 마도환의 비서처럼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느라 논문 연구에 매진할 시간이 부족했다.
가끔 불만을 내비치면…….
- 넌 걱정할 필요 없어. 졸업 후 내가 지방대에 자리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물론 그도 안다. 마도환이 과학계에서 숨은 실력자란 사실을. 마도환이 장담했으니 지방대에 꽂아주는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어쨌든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헌팅턴에서 중간 점검을 나왔다. 무려 부사장과 연구 개발 책임자가 방문한다고 했다.
김상원은 마도환의 눈치를 보면서 회의실의 의자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다. 마도환도 저렇게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정상이다.
‘발표할 게 있어야…….’
헌팅턴 프로젝트를 맡은 지 2년 반. 그동안 연구비를 열심히 타 썼으나 사실상 한 일이 없다. 물론 겉으로는 많은 일을 했다. 전 세계 핵융합 연구 현황을 조사했고 대한핵융합센터와 함께 수소 플라스마 안정화 실험도 수행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연구 목표와 거리가 있는 내용이다. 사실상 이론적인 핵융합 체계 정립은 겉돌았다. 성공한 연구는 전혀 없었고 프로젝트를 체결할 당시와 비교해서 한 발도 전진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그도 안다.
‘손강우 박사의 연구 자료를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능력도 부족하고.’
처음에 프로젝트 체결도 손강우 박사의 유품으로 시작했다. 마도환이 그 연구를 이어서 수행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대신에 마도환은 담당 대학원생을 들볶았다.
지방대 교수 자리를 약속하지 않았더라면 김상원은 학위를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힘든 시간이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그러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젝터와 스크린을 점검하고 옆으로 물러서서 시계를 확인했다.
헌팅턴과 예정된 회의 시각이 됐다.
한쪽에 앉은 마도환의 안색이 심상찮다.
“연락해봤어?”
“오고 있답니다.”
“누가 마중 나갔지?”
“마중은…… 고려 과학고에서…….”
마도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심히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다.
마도환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회의실에 노크 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렸다.
* * *
회의실로 헌팅턴 부사장인 고든이 들어섰다. 연구책임자 그레이엄이 뒤따랐다.
부사장인 고든은 직위만큼이나 묵직한 체구를 자랑하는 50대 중반, 그레이엄은 깐깐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40대 백인이다. 외모에서부터 두 사람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났다.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두 사람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자 마도환의 적대적인 표정이 감지됐다. 사전에 참석을 알았을 텐데도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니 어지간히 이 자리가 불편한 모양이다.
고든, 그레이엄과 악수한 마도환이 차도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신다고 고생 많았습니다.”
차도도는 악수 대신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당연히 마도환은 강우에게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곧바로 회의로 넘어갔다.
마도환 측의 인사는 모두 4명. 마도환 외에 박사과정 학생 둘과 석사과정 학생 하나였다. 헌팅턴 프로젝트에 투입된 인원이다.
마도환이 ppt를 띄우고 연구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2년 반 전 프로젝트 체결 후 지금까지 수행실적을 년도 별로 정리했다.
강우가 보기에 별 내용이 없었다. 단지 이것저것 거창하게 붙여놓았을 뿐 실속이 없다.
고든과 그레이엄의 표정도 밝지 않았다. 아마 저들도 실상을 알고 이 자리에 왔겠지.
“……이상으로 연구 현황 보고를 마칩니다.”
마도환이 발표를 끝내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긴장했다는 증거다.
그레이엄이 먼저 질문을 시작했다.
“마 교수님, 수소 플라스마 안정화 모델 연구 내용을 올려보시겠습니까?”
김상원이 옆에서 도왔고 사전에 준비한 ppt 자료가 스크린에 떴다.
“거기에 나온 수식과 분석 내용은 예전에 프로젝트를 체결할 때 예시로 들었던 자료와 똑같지 않습니까?”
“보셨다시피 저희는 이론적인 모델을 실제 실험과 비교 분석하는 연구에 중점을 뒀습니다. 토카막 실험장치에서 자기장으로 안정화한 플라스마를 1초 이상 유지했고 이 실험에서 각종 데이터를 얻어…….”
“연구 계획서에는 실험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는데요?”
“연구하다 보면 일부 노선이 변경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레이엄과 마도환의 설전이 시작됐다.
강우는 금방 상황 파악을 끝냈다.
마도환이 대한핵융합센터와 프로젝트를 체결한 이유가 보였다. 이론적인 연구를 수행할 능력이 없으니 면피용으로 실험을 붙였다. 사실 유사한 실험은 헌팅턴 본사에서도 수행할 수 있기에 애초 계획서에서는 빠졌던 부분이다.
‘이론 연구를 못 했으니 실험이라도 해야 발표 거리가 있다는 거군.’
그레이엄이 질책을 계속했다.
“우리가 기대한 부분은 이론적인 연구였음을 모르시는 겁니까?”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원래 연구란 게 막히면 답이 없는 거지요. 저희도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쉽게 이론적인 해법이 찾아지리라 예상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론 연구를 하다 보니 기초 자료가 부족하지 뭡니까? 그래서 실험으로 그 자료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실험을 수행한 이유죠. 계획서에 없던 실험까지 수행했으니 오히려 잘한 일 아닙니까?”
마도환은 당당하게 반박했다.
그레이엄이 한숨을 내쉬었고 고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할 수 있다는 겁니까? 못한다는 겁니까?”
“시간을 더 주시면…….”
이 대답의 의미는 명확하다. 프로젝트 기간을 연장하자는 뜻이다. 물론 연장에는 돈이 들어간다. 즉 헌팅턴으로부터 추가 연구비를 타내겠다는 심산이다.
만일 헌팅턴이 강우와 프로젝트를 맺지 않고 마도환과의 프로젝트가 유일했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기회를 줄 수밖에 없었다.
강우도 헛웃음이 나왔다.
그레이엄과 마도환이 서로 대치하며 회의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제 강우가 나설 차례다.
정상이라면 남의 프로젝트 심사에 3자인 그가 끼어들 이유가 없다. 오늘 이 회의는 헌팅턴과 마도환의 문제이고 국내 과학계에서는 암묵적으로 상대를 비즈니스적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있으니까.
상대가 마도환이 아니었다면 그도 그랬을 것이다.
“질문해도 될까요?”
강우가 손을 들었다.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며 저지하려는 마도환에 앞서 그레이엄이 수락했다.
“이야기해 보게.”
강우도 일어나서 본격적으로 질문했다.
“대한핵융합센터에서 실험한 내용과 데이터를 잘 봤습니다. 그런데 그 데이터를 대체 어떻게 이론과 연결하겠다는 것인지요? 수소 플라스마 모델에 반영할 수 있는 데이터는 아니지 않습니까?”
강우가 핵심을 찔렀다.
마도환은 버벅대면서 대답하지 못했다. 간신히 입으로 뱉어낸 변명은…….
“실험하느라 미처 이론 연구를 시작하지 못했네.”
“그럼 데이터를 어떻게 이론에 접목할지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이론 연구를 띄워 보시겠습니까?”
스크린에 한국대에서 수행한 이론 연구 내용이 쭉 나열됐다.
“첫 번째 항목은 손강우 박사님 논문에 있는 내용이고, 두 번째는 손강우 박사님 유품인 피씨에서 발견한 자료이고…… 세 번째는 계획서의 내용을 그대로 복사한 것…… 대체 이 년 반 동안 수행한 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마도환은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