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화 프로젝트 협상 (3)
헌팅턴 두 사람을 모닝에 태우고 강우는 호텔에 도착했다.
“으으, 몸이 구겨졌더니…….”
“내일 오전에 모시러 올까요?”
“성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미스터 강, 같이 올라가시죠?”
그레이엄의 권유로 강우도 객실까지 올라갔다.
두 사람이 사용하는 스위트룸은 자잘한 비즈니스를 볼 수 있을 만큼 꽤 넓었다.
“식사는 괜찮았습니까?”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냉장고에서 맥주캔부터 꺼낸 것을 보면 어지간히 매웠던 모양이다.
“당신도?”
“전 운전해야 해서.”
강우는 손을 저어 사양했다.
일단 강우는 협조해준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하하! 그렇게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근데 그 정도로 차도도 씨가 미국으로 올까요?”
“조금 더 압박해봐야죠.”
강우는 두 사람이 한국으로 건너오기 직전에 오늘 나온 마지막 요구조건을 제시해 주기를 부탁했었다. 차도도를 엮을 최후의 방책이다. 이제 차도도도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 아마 지금쯤 고민에 잠겨 있겠지.
남은 결정의 시간은 길지 않다. 내일 오전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난다.
“뜻한 대로 잘되기를 바랍니다.”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는 생수를 마시며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레이엄이 서류가방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문제 말입니다. 혹시…….”
“히트 파이프의 열교환 결함 말이죠?”
“네, 그 문제랑…….”
최근에 헌팅턴과 2차 프로젝트를 협상하면서 헌팅턴에서 뜻밖의 의뢰를 해왔다.
소형 잠수함에서 발생하는 열교환 결함으로 골치 아팠던 그레이엄이 생각 없이 강우에게 문의했다.
강우가 보기에는 해결이 어렵지 않은 문제여서 한국에 들어오면 해답을 주겠다고 대답했었다. 당연히 기술 자문료는 별도로 받는다.
그레이엄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회사 내 숙련된 기술자를 다년간 괴롭히던 문제를 강우가 단번에 해결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대신에 작은 힌트라도 얻으면 다행이라 여기던 차였다.
강우는 노트와 펜을 요구했다.
두 사람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에서 강우는 노트에 쓱쓱 도면을 그리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이 부분의 재질이 문제입니다.”
“거긴 하중을 받아야 해서 반드시 금속 재질이어야…….”
“그렇게 접근하니 열전달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죠. 이 부분은…….”
강우는 구조물에 새로운 보조대를 설치하고 대신에 재질을 변경했다.
“이때 열전달을 계산해보면…….”
대학에서 열전달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수식이 나열됐고 하중 계산에서는 재료역학에서 흔히 적용되는 수식도 등장했다.
그의 설명이 단순하면서도 쉬웠기에 그레이엄은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충분할 겁니다. 잘 보시면 공간도 더 확보되었고요. 여러모로 이 방식이 유리해요.”
설명을 마치자 그레이엄이 입이 쩍 벌어졌다.
“처, 천재다…….”
“천재가 아니라 기존 연구자들의 사고가 굳어있기 때문이죠.”
“네?”
“발상 전환이죠. 이게 열전달과 재료역학 양쪽을 고려해야 하는 문제거든요. 한쪽에서만 접근하면 답이 안 나오죠.”
그레이엄은 탄성을 터트렸다. 각각의 이론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 이론을 융합해서 현실에 맞게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강우가 쉽게 해치웠다. 잠수함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게 융합 과학이군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요.”
강우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의 천재성을 남들과 차별화하는 가장 핵심적인 무기가 바로 이 융합과 사고의 유연성일지도 모른다.
같은 물리학이라도 깊이 들어가면 수많은 분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강우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 세부 분야를 통합해서 적용하고 있다.
방금 그레이엄이 난관에 빠졌던 문제도 그런 능력을 지닌 강우에게는 기초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그럼 이 문제는?”
“그것도 비슷해요. 이건 실험 데이터 변환 과정에서 에러가 발생한 경우거든요.”
“그럴 리가……. 그런 기초적인 실수는 아닌데요?”
“잘 보시면 푸리에 변환에서…… 이건 이산적인 데이터를 변환해야 하는 문제잖아요? 이때 함수의 선형성이 문제가 되는데…….”
강우의 긴 설명이 이어졌다.
강우가 해결책을 제시했을 때 고든과 그레이엄이 받은 인상은 단 하나였다.
이 사람은 천재다. 이 사람이 마음먹으면 못 할 일이 없다. 그렇기에 상온핵융합도 이 사람이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강우 한 사람이 헌팅턴의 수많은 연구자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보였다.
그렇다면 2차 프로젝트 체결에 앞서서 그들이 할 일은 하나였다.
‘주식을 사야겠어!’
‘일단 집부터 팔고!’
헌팅턴 주식을 사서 그들도 5년만 보유한다면 강우와 같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회사 임원이니 주식을 사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에 고든이 그레이엄을 쳐다봤다. 같은 생각을 한 듯 그레이엄 또한 그를 향해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 *
강우는 자동차 키를 돌려주려고 차도도의 아파트에 들렀다.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갔을 때 차도도는 거실의 창가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정한 위치에 키를 놓고 나가려 할 때 차도도가 그를 불렀다.
“바로 갈 거니?”
“그래야죠.”
“혹시…… 헌팅턴과 사전에 논의한 게 있었니?”
찔끔한 강우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를테면 스톡옵션이나 아니면 서약서거나.”
강우는 차도도의 추리에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밝힐 수는 없다.
“그럴 리가요. 스톡옵션은 그 자리에서 구상한 거예요.”
“그렇게 중요한 일을?”
“어차피 돈이 중요하진 않거든요. 저에게는 상온핵융합의 실현이 훨씬 중요해요. 제 인생의 목표니까. 돈이 필요하면…… 다른 일로 벌어도 되고요.”
강우의 능력을 고려한다면 이상한 대답은 아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안정된 유학 자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20만 달러를 요구한 것뿐이고요. 8사람, 20만 달러씩 해서 5년간이면 총 800만 달러인데 헌팅턴 기업 규모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죠. 연구 개발에 그 정도는 투자해야죠.”
사실 겉으로 보자면 이 800만 달러가 실질적으로 투입되는 연구비이고 스톡옵션은 실현 어려운 보너스 성격이었다.
“요셉 교수에겐 뭐라고 설명할 건데?”
“그분은 헌팅턴에서 별도로 챙겨주실 거니까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넌 참 철두철미하네.”
강우는 본인이 그렇다고 여기지 않았으나 남들이 보기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가 자신의 역량을 정확하게 재단하고 있어서일 뿐이다.
생각에 잠기는 듯 차도도가 흔들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 그녀의 시선은 강우가 아닌 창밖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지금 인생의 행로를 결정해야 할 순간에 닿아 있으니까.
이윽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내가 내일 서명할 거라고 생각하니?”
“글쎄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너무 태연한 강우의 대답에 차도도가 헛웃음을 삼켰다.
“하긴 그렇긴 해. 내가 없어도 너 혼자서 다 할 수 있을 테니까. 굳이 내가 무슨 필요가 있겠니.”
약간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예상한 반응이기에 강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내일 한 사람이라도 서명을 거부하면 계약은 무효예요. 다른 사람은 상관없을지 몰라도 저와 쌤, 그리고 신 쌤은 반드시 서명해야 계약이 성립되죠. 저 혼자서 할 수 있고 없고는 계약이랑 무관하고요.”
반박하지 않는 것을 보니 차도도도 그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것치곤 여유로운데?”
“2차 프로젝트가 중요해도 제 인생을 결정지을 문제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 인생 목표가 핵융합 개발이잖아?”
“그렇죠. 반드시 헌팅턴일 이유는 없죠.”
답답한 듯 흔들의자가 앞뒤로 움직였다.
강우는 자신의 승부수를 머릿속으로 되새기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예전에 말씀드렸었죠. 제 인생의 목표는 두 가지라고. 하나는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구하는 것, 다른 하나는 부부가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는 것. 그 부부에는 차 쌤이 들어있다고요.”
“…….”
얼마 전에 프로포즈하면서 했던 말이니 차도도가 모를 리 없다.
“그 어디에도 헌팅턴은 들어가 있지 않아요. 예전에 말했잖아요? 쌤이 MIT에 가지 않겠다면 굳이 나도 갈 이유가 없다고요. 같이 있는 게 중요하니까 한국에서 함께 연구 개발하면 되죠. 여건이야 나빠져도 시간이 더 걸릴 뿐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건…….”
“재수해서 한국대에 가거나 아니면 그냥 고졸 프리랜서로 연구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안 돼!”
“상관없어요!”
여기까지면 충분할 것이다.
그녀를 괴롭혀 마음이 아프더라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솔직히 그녀가 왜 유학을 거부하는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집착이라 할지라도 강우는 순순히 차도도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인생 목표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를 옆에 두고 그녀의 천재성을 키워 왔었는데.
강우는 그녀와 함께 노벨상을 받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뜻깊은 순간일 것이다.
“그만 갈게요. 쌤은 저를 신경 쓰지 마시고 쌤 인생을 두고 고민하세요. 설사 내일 서명하지 않더라도…… 전 원망하지 않아요.”
미련 없이 강우는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마 차도도는 오늘 불면의 밤을 보낼 것이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우는 신새벽의 톡을 받았다.
- 신새벽 쌤 : 어때? 잘 될 것 같아?
- 강우 : 모르겠어요.
- 신새벽 쌤 :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나 보네.
- 강우 : 여러 인생이 걸린 일이니까요.
- 신새벽 쌤 : 나도 도도를 자극해봤는데 생각보다 밋밋하더라.
톡을 보내면서 강우는 지하철에 올랐다.
퇴근하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였다.
- 신새벽 쌤 : 만일 도도가 서명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 강우 : 원점에서 다시 계획을 짜야죠.
- 신새벽 쌤 : 설마 너도 MIT 포기하는 거야?
- 강우 : 그것도 생각해봐야죠.
- 신새벽 쌤 : 도도에게 진심이었어. 울음(이모티콘).
신새벽의 톡에서 약간은 실망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물론 강우도 그녀의 마음을 안다. 졸업한 이후부터 유달리 둘 사이에 거리감이 줄어들었으니까. 단지 그가 미안할 뿐이다.
언제부터 차도도가 그의 마음에 깊이 들어왔는지 그 시점을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예쁜 여자니까, 또래 이성 친구와는 정신연령이 맞지 않으니까 그래서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연구하다 보니 그의 천재성에 반응하는 그녀가 신기했다. 그렇게 점차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젠 차도도를 따로 떼놓고는 그의 인생을 논하기 힘든 수준까지 도달했다.
오늘이 그녀를 압박하는 마지막 날이 되기를 바랐다.
앞으로는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연구에 매달리고 싶다. 그녀가 그의 옆에 있으면 가능하다. 함께 연구를 수행하는 동료로서, 인생의 반려자로서 항상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원룸이 가까워질수록 지하철 내부가 한산해졌다.
강우는 자신이 개발한 상온핵융합 원자로에서 생산된 전력으로 움직이는 미래의 지하철을 상상해봤다.
오늘 밤에는 그도 편히 자기 힘들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