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83화 (283/325)

제283화 프로젝트 협상 (4)

차도도는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고민에 잠겨 있었다.

강우가 떠난 뒤에도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자러 들어가야 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녀의 몸이 점점 의자에 깊숙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난 그저 돕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3년 전에는 강우는 단지 학생이었다. 선생님으로서 그의 미래를 밝혀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와 엮였고 이제는 그의 연구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그래도 좋았다. 연구를 시작하면서 그녀는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하고 싶었던 연구에 매진하자 삶의 희열을 깨닫게 됐다.

그렇게 지난 3년을 살았다. 그 3년은 그녀의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두려워하던 순간이 닥쳤다.

유학. 갑자기 그녀의 유학이 왜 쟁점이 되어버렸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유학 가지 않는다면 강우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될 상황에 부닥쳤다.

“하지만…… 난 갈 수 없는걸…….”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를 따라 유학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녀의 집안은, 부모는 그녀가 가문에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비슷한 다른 재벌 가문과 정략 결혼해서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기를 바란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미래와 역할은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결혼 시장에서 최고 가치의 나이가 됐다.

자라면서 부모의 뜻을 거스른 적이 세 번 있었다. 문과 이과 선택, 대학 전공 선택, 선생님이란 직업. 그 세 번이 현재의 그녀를 만들었다. 부모의 아바타가 아닌 그녀 자신의 의지를 가진 독립된 인간으로. 그런데 아직 조금도 부모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에도 거슬러야 할까. 부모의 얼굴을 떠올리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고 지금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 중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차성그룹이라는 집안 배경을 고려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그녀의 어머니였다. 받을까 말까 한참 고민했다.

어떻게든 오늘 밤에 결과를 내야 한다면 차라리 전화가 걸려왔을 때 이야기해 보아도 괜찮을 듯했다.

“엄마?”

- 왜 이리 늦게 받아?

“잠 잘 준비하느라 미처…….”

- 그래, 됐고. 맞선 들어왔다.

“네?”

- AK 그룹이라고 알지? 거기 둘째다. 그룹 규모도 우리와 비슷하고 해외 유학파에 현재 아버지 밑에서 착실하게 경영수업 받고 있다더라. 사람도 아주 괜찮다는 평이야. 어떠냐?

난데없이 또 맞선이 들어왔다.

그녀의 나이를 보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어도 왜 하필이면 오늘인지.

“엄마, 전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되었거든요?”

- 너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그땐 네가 좋다는 학자 집안을 골라줬는데도 싫다고 했지? 이번엔 네가 양보해라.

“엄마! 전…….”

- 거절은 없다. 지금 우리와 AK 그룹이 두바이에 합작회사 설립 논의가 오가고 있어. 이 사업이 무척 중요해. 너도 이제 집안에 손을 보태야 하지 않겠니? 보름 내로 약속 잡아보마.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차도도는 목소리를 높였다.

“난 AK 그룹 싫어요!”

- 그럼 네가 적당한 사람 데리고 오든지! 네 나이가 몇인 줄 알아? 너 지금까지 계속 퇴짜만 놓았어! 그러다 나이 많아지면 시집도 못가!

“안 간다니까요!”

- 하여튼 그렇게 알고 있어! 끊는다.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그녀의 부모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비슷했다.

그룹 차원의 합작과 혼사가 함께 논의되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빠져나가기 힘든 상황이 됐다.

그녀에게 진학의 꿈이 없었다면 이런 결혼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사랑과 결혼은 별개였고 그녀의 부모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였었다.

하필 혼사와 유학 문제가 동시에 걸리니 해결하기 힘든 압박감이 짓누른다.

유학을 가면 부모의 뜻을 완전히 거스르는 결과를 맞이한다.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부모와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살 수 있을까.

애초에 차성그룹 자제라는 타이틀은 그녀에게 큰 이익을 주지 못했다. 지금 당장은 부모의 경제력도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애초에 차성그룹은 그녀의 오빠가 경영하기로 내정되어 있으니까.

“난 어떡해야 하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일단 이 고통에서 멀어질 수만 있다면…….

차도도는 발작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지금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것이라면…… 바로 물리학이었다. 연구에 몰두하면 복잡한 세상사를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서재로 올라가서 눈에 보이는 책을 폈다.

복잡한 수식이 눈앞을 채웠다. 핵융합의 기본 원리를 정리한 수식이다.

하필 펼친 책이 뉴클리어 퓨전이라니. 차도도는 쓴웃음을 지으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책의 가장 뒷면을 봤다.

이는 엠씨제곱(E=mc²).

“……!”

예전에 그녀가 낙서했던 수식이 지금도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그 수식 옆에 익숙한 필체로 같은 수식이 또 적혀 있었다. 그보다 더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아래에 적힌 낙서였다.

차도도 = 강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강우가 보고 싶었다.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차도도는 주먹을 꾹 쥐고 투명칠판 옆에 섰다.

그녀는 하얀 마카로 수식을 적기 시작했다. 상온핵융합에서 수소 플라스마와 뮤온 입자의 거동을 표현하는 수식으로 현재 그녀가 연구 중인 내용이다.

칠판의 절반을 채우며 유려하게 적히던 수식이 일순간 멎었다.

동시에 그녀의 사고도 끊어졌다.

“다음엔 어떻게 풀어야 하지…….”

수식 전개가 막혔다.

애초에 모르던 내용이고 지금 처음 풀이하는 과정이니 이런 상황은 당연했다. 사실 여기까지 전개한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차도도는 이 지점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당면한 그녀의 문제를 잊고자 오로지 수식 전개에 집중했다.

“하아아!”

마치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다음 풀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풀이를 알고 싶었다. 전 세계에서 이 수식 전개의 해답을 알고 있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처음 연구하는 내용이니까.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차도도는 충동적으로 칠판에 적힌 수식 전개를 폰으로 찍었다.

그리고 강우에게 톡을 넣었다.

- 차도도 : 이다음에 어떻게 될까?

- 애제자 강우 : 쌤? 아직 안 주무셨어요?

- 차도도 : 갑자기 연구가 생각나서…….

- 애제자 강우 : 잠시요. 저도 풀어보고요.

그리고 불과 5분도 되지 않아 사진이 날아왔다. 태블릿에 손으로 수식을 풀어 스크린샷한 사진이다.

강우가 푼 다음 풀이를 본 순간 차도도는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렇게 풀면 되지.”

차도도는 칠판에 수식을 계속해서 풀어나갔다.

그녀는 정신없이 풀이에 몰두했고 칠판에 수식을 정리했다. 마치 며칠을 굶었던 사람이 눈앞에 밥을 놓고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그런 심정이었다.

마카가 지나갈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칠판에 수식으로 표현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시 마카가 움직임을 멈췄다.

“이다음엔…….”

머리를 쥐어 짜봤으나 다시 안개에 갇힌 기분이다.

다시 그녀는 칠판의 사진을 찍어 강우에게 톡을 넣었다.

놀랍게도 수식에 몰두하자 근심이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차도도는 다른 어떤 일보다 그녀는 연구가 더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타고난 과학자였다.

* * *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강우는 태블릿에 수식을 전개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 밤에 차도도가 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지 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런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그녀가 연구에 몰두할수록 그녀는 그를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오늘은 그녀가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순간이기에 강우도 그녀의 톡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해서 차도도가 질문한 수식의 다음 풀이를 고민했다.

“이 문제는…… 평범하지 않은데…….”

그녀가 보낸 수식을 보았을 때 그의 놀라움도 컸다.

그녀의 연구 수준이 그의 예상을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독자적으로 수행 중인 이 연구를 지금 그와 짜 맞추면 훨씬 진전된 결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수식은 상온핵융합 기술의 새로운 단계의 시작점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도 독자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 확인됐다.

강우는 푼 수식을 캡쳐해서 톡으로 보냈다.

- 강우 : 전 이렇게 풀리는데요?

- 차도도 쌤 : 내가 확인해볼게.

그리고 10분쯤 후 답신이 날아왔다.

- 차도도 쌤 : 그렇게 푸는 게 맞아. 그런데 여기에서 또 걸리는데?

- 강우 : 그건 조건이 달라져서 그래요.

- 차도도 쌤 : 아! 그렇지. 이산화된 통계 미분식을 처리하려면.

그녀와 톡을 주고받고 수식을 넘기고 받고 하느라 강우도 잠을 잊었다.

신기하게도 그녀와 연구하면 죽이 잘 맞다. 막혔던 부분도 그녀와 함께 고민하다 보면 쉽게 해법이 찾아졌다.

지금도 마찬가지. 오늘 두 사람이 붙어 있었다면 연구에서 새로운 신기원을 이루어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하는 연구가 재미있다.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기분이다.

그렇기에 그는 절대 그녀를 놓을 수 없다. 분명히 그녀도 이런 삶을 더 좋아한다. 그녀를 반드시 그의 삶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 밤이 지나간 후 과연 그녀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무엇보다 궁금해졌다.

* * *

고려 과학고 회의실에 다시 모였다.

오늘은 어제보다 두 사람이 늘었다.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인 하은찬과 유혜림이다. 두 사람은 주어진 서약서를 마주했을 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미국 동부로 유학 가면 앞으로 5년간 일 년에 20만 달러를 손에 쥔다. 그들에게 손해라면 고작 미국 서부의 대학을 고를 수 없다는 것뿐이다.

유혜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현실이야?”

“우리 엄마가 과도한 친절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고 했어. 모르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그런데 강우 형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건 아닌 것 같고…….”

하은찬의 시선이 헌팅턴의 두 사람을 살피다가 강우에게로 옮겨갔다.

강우는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택의 자유야. 다만 이보다 더 나은 조건은 앞으로 없을 거야.”

“유학비를 다 주는 거예요? 명문대 아니더라도?”

“학교는 상관없어. 대신에 연구 활동을 수행해야지.”

두 사람은 사실상 유학을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금까지 두 사람의 성적과 실적을 보면 MIT 진학도 어렵지 않다.

고든이 모두에게 서약서를 돌렸다.

“자! 본사에서도 이 계약을 승인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서명하시면 됩니다. 서명은 계약서와 서약서 두 곳에 모두 하셔야 합니다. 내용은 어제 말씀드렸던 대로…….”

강우는 가장 먼저 계약서에 서명한 후 차도도에게 넘겼다.

그리고 차도도를 주목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별다른 고민 없이 서약서에 서명했다. 지금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며 뿌듯한 기분에 감겨 있었다. 이 기쁨을 차도도가 엎지는 않으리라고 믿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다른 변수는 없다. 오직 차도도만이 아직 명확한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신새벽이 차도도의 옆구리를 툭 쳤다.

“뭐해?”

차도도는 서약서를 다시 꼼꼼하게 읽었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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