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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84화 (284/325)

제284화 전환 (1)

정작 강우는 느긋했다.

그는 차도도의 결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아는 그녀라면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제자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 편안을 도모할 그런 인물이 아니다. 또 연구를 저버릴 만큼 책임감 없는 과학자가 아니며, 그를 외면할 만큼 서로의 정이 얕지도 않다.

설사 그녀가 서명하지 않더라도 헌팅턴과 다시 조율하면 된다. 지금 얻어낸 이익에서 조금 포기하면 어떤가.

그래서 그는 다소 느긋한 기분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쓰슥-

차도도가 계약서에 먼저 서명을 하고 서약서에 손을 올렸다.

서명이 끝났다.

“이것으로 헌팅턴과 강우 사단의 상온핵융합 개발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계약은 올해 8월부터 최소한 향후 5년간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전체 계약 기간은 모두 10년입니다.”

부사장 고든이 선언했다.

모두가 박수로 환영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고곽천재는 즐거워했고 차도도는 여전히 표정이 굳어있었다. 신새벽은 둘 사이에서 장단을 맞추기 힘든 듯 연신 차도도를 힐끔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손차희가 신이 나서 물었다.

“쌤? 그럼 이번에 쌤도 같이 유학 가는 거예요? MIT 석박사통합과정? 요셉 교수님 밑에서 학위를 밟는 거죠?”

“그래.”

“와아! 쌤과 같이 미국에 간다니!”

외로운 유학길을 친구, 선생님이랑 모두 같이 간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손차희와 윤수아는 흥분했다. 지금은 모두가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어 보였다.

서류를 챙기는 고든과 그레이엄에게 강우는 악수를 청했다.

“출국하십니까?”

“하하, 아뇨. 한국에 온 김에 이것저것 처리해야죠.”

“그럼 어디로 가십니까?”

“국방부 들렀다가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순양함 개발 기술이전 사업이 걸려 있거든요.”

역시 장사꾼은 다르다. 온 김에 돈이 되는 여러 일을 함께 해치운다.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하하! 괜찮습니다. 폐를 끼칠 수야 있나요.”

모닝을 떠올린 고든이 급히 손을 저으면서 사양했다.

덕분에 수고를 덜게 됐다.

“8월에 미국으로 건너가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강우는 학교 정문까지 따라가서 가장 큰 택시를 잡아줬다.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 후 몸을 돌렸다. 그의 옆에 차도도와 신새벽이 함께 있었다.

“차 선생님? 어제는 그렇게도 안 하겠다더니.”

“난 안 한다고 한 적은 없어요.”

“그래도 하기 싫다는 표시를 팍팍 풍겼는데?”

“그건 신 선생님 마음이겠죠.”

신새벽의 핀잔과 차도도의 반박이 이어졌다.

어쨌든 잘 끝났으니 그것으로 만족이다. 강우는 눈을 들어 파란 하늘을 쳐다봤다. 한여름, 햇볕이 내리쬐는 더운 날씨다.

“쌤? 가우스에서 커피 사 갈까요?”

“그래, 우리가 모두 몇 명이지?”

“여덟.”

강우는 프로젝트 카드를 꺼냈다.

더운 날씨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메뉴를 통일했다.

“커피 못 마시는 녀석이 있었는데…….”

신새벽이 핀잔을 줬다.

“누구요? 없는데요?”

“바로 너 말이야!”

강우가 평소에 핫초코를 즐겨 마신 것을 빗댔다. 요즘 부쩍 커버린 그를 의식해서이기도 하고.

“에이 오늘은 덥잖아요?”

“아닌 것 같은데? 이제 다 컸다고 시위하는 거지?”

차도도의 반박이 바로 들어왔다.

강우는 먼저 나온 커피를 두 사람에게 넘기고 나머지를 캐리어에 담아 손수 들었다.

신새벽이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이제 다 끝났어.”

“아뇨, 계약했으니 이제부터 시작이죠. 앞으로 5년간 우리는 무척 바빠질 거예요. 어쩌면 학교에 적응할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모두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해요.”

“강우가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신새벽이 그를 향해 윙크했다.

강우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겠죠? 열심히 시켜야지!”

“헉!”

그를 째려본 신새벽이 경쾌하게 학교 안으로 뛰어갔다.

뒤에서 강우는 차도도와 발을 맞췄다. 멈칫거리는 차도도의 태도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다.

건물 입구에 닿았을 때 차도도가 말했다.

“강우야, 저녁에 집에 잠시 왔다 가렴.”

“네, 그럴게요. 근데 쌤 요리는 사양인데요.”

미간이 팍 구려지는 차도도를 피해 강우는 후다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커다란 꾸러미를 들고 저녁 늦게 강우는 차도도의 아파트 현관에 있었다.

일단 숨부터 고르고. 그녀가 오라는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두 사람 사이엔 마지막으로 마무리할 일이 남았으니까. 그리고 그 준비도 했다.

이미 그는 속초에서 뜻을 전했었다. 그의 인생 목표는 두 가지이고 그 둘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녀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그녀가 함께 유학 가기를 권했었다.

오늘은 그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그녀는 뜻을 밝혔기에 내심을 추측할 수 있다.

사실 그녀를 끌어오려고 어찌 보면 치사한 방법을 동원했기에 지금은 그녀를 다독여줄 시점이다.

차도도가 그의 선생님이기에, 그것도 고등학교 3년 동안 그가 의지했던 담임이기에, 앞으로 인생을 함께할 연인이기에 더욱 이런 마음이 드는지도 모른다.

딩동-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이 없다. 오라고 했으니 분명히 집에 있을 것인데……. 알아서 들어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평소처럼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은은한 수면 등만 밝혀져 있고 창으로는 밝은 서울 야경 불빛이 화려하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왔어?”

창을 향한 흔들의자에서 차도도가 고개를 내밀며 그를 확인했다. 도심 야경을 배경으로 음영이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이 무척 반가웠다.

“불 꺼놓고 뭐 하세요?”

“바깥 구경 중.”

이 집에 오면 그도 종종 하는 짓이기에 그 심정이 이해된다. 답답할 때는 서울 야경을 구경하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니까.

“같이 볼까요?”

꾸러미를 한쪽에 두고 강우가 창가로 다가가자 차도도가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순간 강우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격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차도도는 예전에 그가 선물한 연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최근에 같은 스타일의 옷을 신새벽이 입고 있었기에 앞으로 이 옷을 절대 입지 않으리라고 예상했었다.

그 옷을 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 대화는 그의 의도대로 가능할 것 같다.

조금은 어색해진 분위기에 강우는 그녀와 나란히 서서 창밖을 바라봤다. 먼저 감사를 표해야 제자의 도리겠지.

“쌤! 고마워요.”

“넌 날…… 너무 힘들게 해.”

“알아요. 그래도 이해해 주고 따라와 주셔서 감사해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 말재주가 없는 강우는 직설적인 표현을 구사했다.

“제 인생의 목표는 두 가지라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쌤의 답은 뭐예요?”

“강우야, 프로포즈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예쁜 반지를 사고 꽃도 사고…….”

수락했다는 뜻이다. 그와의 결혼을.

“그건 제가 미처 준비를 못 해서 다음에…….”

“그래, 괜찮아. 반지가 중요하겠니.”

강우는 그녀의 뒤에서 슬그머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몸이 그의 품 안으로 쑥 들어왔다.

“앞으로 네가 연구에만 매달릴 수 있도록 내가 옆에서 뒷바라지해줄게.”

“제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고 쌤이 같이 연구하는 거라고요.”

“그래, 그렇게 해.”

오늘 차도도는 무척 부드러웠다.

“이제부터 우리는 총력전! 상온핵융합이 본궤도에 오를 때까지.”

아직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험난한 길이기에, 인류의 문명에 대변혁을 가져올 혁명이기에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둘이 함께라면 훨씬 쉬워지리라.

결혼을 승낙하는 순간 오가는 대화로는 너무 무미건조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과학자 부부이기에 그 속에 숨은 따뜻한 사랑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강우는 품에 안은 그녀를 돌려 얼굴을 마주 본 다음 그녀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진 적은 있어도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도도는 거부하지 않았다.

상체가 떨어졌을 때 차도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우야, 넌 내가 누구인 줄 알아?”

“고려 과학고 물리 선생님.”

“그리고?”

“모르죠. 그런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는 차도도의 배경을 전혀 모른다. 어차피 그에게 그런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차도도가 조용히 나무랐다.

“그래, 알아. 그렇더라도 결혼은 양쪽 집안의 결합이고 적어도 부모가 허락해야 해.”

“그건 알죠.”

지금은 조선 시대가 아니라고 반박하려다 그녀의 뜻을 알기에 바로 삼켰다.

“조만간 양쪽 집안에 인사드리자. 설사 허락받지 못하더라도 알려야 하니까.”

“저희 어머니께선 쌤 같은 며느리면 백점이래요.”

예전에 졸업식 날 강우의 어머니를 떠올린 차도도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도 백점 사위가 될 자신이 있고요.”

“내가 그동안 주저했던 이유는 집안 문제 때문이야. 부모님이 유학을 말린다고 했었는데…… 기억하니?”

“네. 과학을 싫어하신다고…….”

“그래서 결혼이든 유학이든 허락을 받아야 해.”

“제가 노력할게요.”

“그래, 만일 못 받더라도 신경 쓰지 마. 그땐 우리 둘이 알아서 미국으로 떠날 생각이니까.”

“그래도 허락받는 게 좋죠.”

강우는 그녀가 매우 엄한 집안의 딸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가끔 그녀가 비친 집안 내력으로 보면 부유한 집안이면서 딸에게 큰 애정을 갖지 않은, 딸이 괜찮은 집안과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는 그런 부모로 추측되었다.

“그래, 어떤 상황이 닥쳐도 우리 둘은 변하지 말자. 하여튼 조만간 자리를 만들 테니 준비하고 있어.”

“네. 그럼 우린 언제 결혼해요?”

강우의 재촉에 차도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급하긴. 일단 미국 가서 상황을 보면 어떠니? 내 예상에는…… 이삼 년 후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그때 국내에 들어와서 결혼식을 올려도 되고 여의치 않으면 현지에서 단출하게. 다른 의견 있으면 네 뜻을 따를게.”

“전 어떡하든 상관없어요. 쌤과 함께라면.”

출국 때까지 대략 한 달이 남았다. 급히 결혼하고 떠나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했다.

모든 합의가 끝나자 다시 둘만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오늘 같은 날, 강우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오래전 방송 출연 때 들었던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었다.

“쌤?”

“응?”

“노래 불러줘요.”

조금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살피던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같이 부르자.”

강우는 차도도와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았다.

차도도가 앉은 채 조용히 노래를 시작했다. 반주조차 없는데도 그녀의 노래는 훌륭했다. 매혹된 목소리로 그의 혼을 잡아끌었다.

오직 그만을 위해 부르는 노래였다. 물론 강우는 같이 부르지 않았다. 그녀의 노래에 그의 목소리로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강우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강우는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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