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6화 전환 (3)
강우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했다. 논문에서 벽에 맞닥트린 부분은 그가 해결에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다만 조건이 있다.
“지금부터 논문을 계속 준비하되 마도환 교수에겐 그 내용을 보고하지 마세요. 최소한 헌팅턴과의 문제가 결정될 때까지. 현재로 봐선 헌팅턴에 적당한 위약금을 내고 계약을 파기할 것 같거든요. 마도환 교수도 부담이 있어서 소송하긴 쉽지 않을 테고요.”
“그렇겠지.”
“그러면 그 이후에 논문 쓴 것을 내놓고 졸업 절차를 밟으세요.”
김상원으로서는 강우가 사실상 최선의 방책이자 유일한 구원이었다.
안심하는 김상원에게 강우는 껄끄러운 부분을 파고들었다.
“마도환 교수와는 사이가 어때요?”
당연히 강우도 짐작하고 있다.
“흠, 그리 좋진 않아. 교수님이 워낙 안하무인 스타일이라. 갑질도 많고. 괜히 마 교수님 밑에서 박사과정을 했다고 후회 중이거든.”
“그런데 왜 하셨어요?”
“넌 잘 모르겠지만, 마 교수님이 학계에서 영향력이 대단해. 나중에 졸업하고 자리 잡기 쉬우니까. 지방대 교수라도 하려면…….”
실력이 없는데도 마도환 밑에 대학원생이 모이는 이유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김상원을 보니 요구조건을 말해도 될 것 같다.
“형, 마도환은 앞으로 몰락할 거예요. 그러니까 졸업 후에는 신세 질 생각 자체를 하지 마세요.”
“정말 그럴까?”
“실력이 없잖아요.”
“그래도…….”
김상원의 내심을 이해한다. 이 사회는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겠지.
“하여튼 졸업 후에 갈 곳 없으면 저에게 연락하세요. 그때쯤이면 미국의 괜찮은 교수 밑으로 포닥 정도는 꽂아드릴 수 있으니까요.”
“정말?”
강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보상을 미리 던졌고.
“대신에 형이 해주실 일이 있어요.”
“뭔데?”
“마도환 교수 연구실 출입할 수 있죠?”
“나야 뭐…… 비번 아니까. 평소에도 정리하느라 자주 드나들어.”
그동안 마도환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해온 김상원이니 모를 수가 없다.
“마 교수의 최근 4년간의 행적을 모아주실래요?”
“응?”
“예를 들면 연구비 유용이라든가…… 논문 베끼기라든가 여러 문제점을 잘 아시잖아요?”
김상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뜻밖이라는 듯 연신 강우를 힐끔거렸다.
“불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몇 년 후에 터트릴 생각이니까요.”
“몇 년 후?”
“아직은 먹히기 힘들고요. 그렇다고 마도환 같은 사람이 계속 학계를 주름잡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김상원도 찜찜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평소 마도환의 비리를 눈앞에서 봐왔고 또 직접 수행했던 당사자이기에 그 심각성을 모를 수 없었다.
연구비를 사적으로 유용한 증거만 해도 차고 넘치니까.
“나에게 해가 돌아오진 않겠지?”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불안하면 일단 증거만 확보해두세요. 졸업하고 나면 증거조차 못 모으니까요. 나중에 마도환이 갑질하면 형도 믿을 구석을 만들어놓아야 하잖아요.”
심각하게 고민하던 김상원이 이해한 듯 표정이 밝아졌다.
김상원이 동조하면 강우는 마도환의 가장 확실한 약점을 잡게 된다.
그리고 남은 마지막 하나는…….
“혹시 황 사장이라고 알아요?”
“황 사장…… 설마?”
“네, 마도환이 가끔 연락하는.”
“만난 적은 없어. 가끔 사적인 자료를 주고받고 돈 보내고 뭐 그런 일을 하긴 했는데…….”
새어나가면 안 되는 일은 대학원생을 통하지 않고 직접 했나 보다.
“그 사람과 관련된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확실하게 증거를 확보해줘요. 특히 지금부터 3년 반 전에 겨울에…….”
“그때 마 교수님이 황 사장이랑 속초에 같이 놀러 갔었거든. 내가 호텔을 잡아 드렸었는데…….”
중요한 증거가 나왔다. 손강우가 죽던 날 마도환의 행적을 뒷받침할 증언이다.
“그리고 그 직후에 제법 많은 돈을 송금하기도 했고, 그게 전부 연구비에서 짜낸 것이었지.”
비리를 입에 담기 어색한 듯 김상원이 강우의 눈치를 봤다.
강우는 김상원이 토해낸 여러 내용을 조목조목 적어 증거확보를 요청했다. 이런 증거라면 나중에라도 마도환을 옥죌 유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김상원은 쉽사리 결심하지 못했다. 대학원생으로서 감히 교수에게 반기를 들기 어렵다. 게다가 지금 강우가 지적하는 내용은 그도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게 여기던 것들이다.
흔들리는 상대의 마음을 확인한 강우는 김상원에게 신신당부했다.
“앞으로는 마도환 말고 저랑 손을 잡으시죠. 제가 지금은 비록 고등학교 졸업생이어도 몇 년 후가 되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이번에 저랑 같이 MIT로 유학 가면서 프로젝트 연구비를 받는 사람이 무려 여덟 명이나 돼요. 적어도 저는 형한테 해가 될 사람은 아니거든요.”
김상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우는 화제를 전환했다.
“지금 마 교수는 헌팅턴 프로젝트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쁜가요?”
“지금 맞닥트린 문제는 두 가지야. 헌팅턴 프로젝트와 국가 연구 개발 지원 사업 신청.”
“국책 R&D 사업요?”
“그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주관하는 국책연구 과제 신청인데 이번에 핵융합 관련해서 모두 3개 기관을 선정하나 봐. 곧 그 평가회를 개최하거든. 마 교수야 정부 쪽에 인맥이 탄탄해서 당연히 선정되겠지만 그래도 발표 준비를 해야 하니까.”
뜻밖의 정보를 얻게 됐다.
국가에서는 분야별로 주요 핵심 과제를 선정하고 이를 연구할 기관에 연구비를 지급한다. 기초과학을 육성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으나 기관별 나눠 먹기가 심하고 선정 및 평가 또한 주먹구구식이라 잡음이 많은 사업이다.
강우도 예전에 대학원에 있을 때 이런 과제를 여러 번 신청하고 수행했었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는 국책과제를 신청하면 항상 떨어졌기에 그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당일 마 교수가 발표하나요?”
“그럴걸, 자료는 내가 준비하고.”
“그럼 그 자료 혹시 저에게 보내주실 수 있나요?”
김상원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강우를 쳐다봤다.
강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마 교수 같은 사람이 국가 세금을 낭비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죠.”
“생각해볼게.”
김상원도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마도환의 비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에서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이 걸린다. 최근 마도환의 갑질이 심해져도 졸업 때문에 어쩔 수 없던 차에 강우가 당근을 던지니 생각이 많아졌다.
고민의 핵심은 마도환에 반기를 들고도 졸업할 수 있을지 또 졸업 후 자리 잡을 수 있을지의 문제다.
“적어도 졸업 전에는 형이 의심받지 않도록 해드릴게요.”
강우의 장담이 김상원의 고민을 한결 덜어줬다.
강우는 김상원에게 몇 가지를 추가로 당부한 후 헤어졌다.
가우스 카페를 나와서 학교로 돌아가는 그의 마음을 허탈한 기분이 착잡하게 했다.
당근을 던졌으니 김상원의 결심을 기다려야 한다.
자연의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가 과학을 논하지 않고 정치질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 슬펐다. 이런 환경에서는 이 땅에서 진정한 과학자가 살아남기 어렵다.
그렇기에 마도환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사람이 분명했다.
* * *
세종시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회의실에서 신규 국가 연구 개발 지원 사업 평가회가 개최됐다.
핵융합 개발연구 분야에서는 모두 세 기관에 연구비를 지원할 예정이었는데 이번에 연구비를 신청한 기관은 모두 8곳이나 됐다. 그 3곳 가운데 대한핵융합센터와 마도환의 한국대 물리학과는 사실상 결정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남은 한 자리를 놓고 여섯 개 기관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강우도 이곳 회의실에 신청 기관 자격으로 참석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김상원에게 이 정보를 듣는 순간 그는 대한핵융합센터를 떠올렸다.
대한핵융합센터는 국가에서 핵융합 연구를 지원하는 기관이니 당연히 이 국책과제를 신청한다. 그는 지난 세미나 때 의견이 잘 통했던 우기준에게 연락했다. 최대우 블로그에서 몽상가로 활약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예상대로 우기준은 연구비를 신청했고 당일 이 회의에 참석한다고 했기에 강우는 우기준 휘하 연구원으로 가장하여 이 장소에 합류했다.
지금 단상에서는 어떤 사람이 스크린에 ppt 자료를 띄워놓고 열심히 연구 수행 능력을 홍보하고 있었다. 서울의 유명 대학과 지방대학이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신청했다.
특별한 내용이 없어 강우는 굳이 정신을 집중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우기준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
“전부 비슷비슷하네요.”
“연구할 능력이 부족해 보이지?”
“그렇긴 해요.”
“능력과 무관하게 저 사람들은 이 연구비에 사활을 걸고 있어. 연구비를 따면 앞으로 3년간 편해지거든. 국책 연구과제라 까다롭지도 않고.”
이어서 우기준이 국책 연구과제의 문제점을 늘어놓았다.
예전에도 느낀 바인데 우기준은 여러모로 그와 통하는 지점이 많다.
“문제는 연구비가 능력 있는 기관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야. 모두 눈먼 돈이라 생각해서 나눠 먹기만 하려 해. 진심으로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연구비가 돌아가지 않아.”
그사이 발표가 끝났고 청중의 질문이 시작됐다. 질문은 하나같이 밋밋했다.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니 적당히 넘어가자는 태도였다.
“그래서 힘 있는 기관이나 교수가 연구비를 독식하는 경향이 있어. 물론 그 교수가 능력이 있으면 문제없으나 실제로는 연구 수행이 어려운 경우가 많거든.”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젊은 연구원이나 교수들은 연구비를 타기 위해 힘 있는 교수에게 들러붙을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또 연구비 나눠 먹기가 자행된다.
연구 결과 평가도 한통속에서 이뤄지니 사실상 결과를 나쁘게 평가할 사람도 없다.
이런 비효율은 수십 년간 이어진 관행으로 깨기 힘들 만큼 견고하다.
“자, 이번엔 한국대 마도환 교수 차례군. 얼마나 준비했는지 들어볼까?”
우기준이 입가에 비웃음을 내비쳤다. 그도 마도환의 이면을 확실히 꿰뚫고 있어 보였다.
마도환이 자신만만하게 인사했다.
다른 발표에 비해 박수 소리가 더 우렁찼다.
“한국대에서는…….”
마도환은 최근 한국대 물리학과에서 수행한 핵융합 과제를 열심히 설명했다. 그 대부분은 헌팅턴 프로젝트와 대한핵융합센터와 맺었던 위탁연구 내용이다.
김상원에게 전달받았던 자료 그대로였기에 강우는 그 내용을 눈감고도 외울 정도였다.
그는 우기준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제가 질문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요?”
“글쎄? 원래 이런 회의에서는 문제가 있어도 질문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라…….”
“그건 우 박사님 성격이랑 안 맞는데요?”
“지난번에 비슷한 다른 평가회에서 내가 나섰다가 너무 말을 많이 들어서…….”
이 동네는 바른말 하는 사람을 오히려 따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젠 안 하시게요?”
“크크, 내 성격에 그럴 리가. 잠시 전열을 가다듬는 중이야.”
대한핵융합센터도 평가받는 처지이지만 사실상 확정이나 마찬가지여서 우기준은 부담이 없었다.
그를 보며 피식 웃는 모습이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짐작한 느낌이다.
마도환이 연구 능력 소개를 끝내고 질문이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마도환에게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한국 핵융합 학계에서 마도환은 꽤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때 강우가 손을 들며 다짜고짜 일어났다.
“질문 있습니다!”
“너, 넌?”
뒤늦게 강우를 발견한 마도환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왜요? 질문하면 안 됩니까?”
“너!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호통치는 마도환을 무시하고 강우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