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87화 (287/325)

제287화 전환 (4)

“대한핵융합센터 보조 연구원으로 왔습니다만 문제 있습니까?”

마도환의 시선이 옆에 앉은 우기준에게 돌아갔다. 입술을 실룩거리며 뭔가 욕을 내뱉은 것 같은데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앞에서 수행하셨다는 내용 말입니다. 그거 이번에 프로젝트 수행 미비로 헌팅턴과 계약 파기한 연구 내용 아닙니까?”

“그, 그게…….”

공적인 장소에서 허물을 파고들자 마도환은 빨리 대응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는 이 분야에서 이런 식으로 타인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사실을 말씀하시지요. 그래야 평가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헌팅턴의 오해입니다.”

“오해인지 아닌지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계약 파기가 들어왔고 그 이유가 연구 미비가 맞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마도환이 주먹을 꾹 쥐고 대답하지 않았다.

강우는 신경 쓰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실험하셨다는 내용 말입니다. 그건 대한핵융합센터에서 모두 주관하고 한국대에서는 참관만 했다던데요? 실험 결과분석도 한국대는 하지 않았다고요.”

대한핵융합센터 관계자가 바로 옆에 앉아 있으니 마도환은 변명할 말이 사라졌다.

피식 웃음을 머금던 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연구 제안서에 적힌 모델링과 수식들, 그건 전부 고 손강우 박사의 연구 결과 아닙니까? 손강우 박사의 피씨에서 빼낸 것이라던데요, 그렇습니까?”

마도환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마도환의 성격을 익히 아는 강우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충분히 예견했다. 조금만 더 성질을 건드리면…….

강우는 다시 한껏 조롱 섞은 말투로 질문했다.

“그리고 가장 초반에 나온 연구 목표 말입니다. 거기 둘째, 셋째 항목에서…….”

그 순간 마도환의 손에서 보고서 책자가 날았다.

그 책자는 정확히 강우의 머리를 가격했다.

“으윽!”

강우는 큰 타격을 입은 것처럼 상체를 휘청거리면서 쓰러졌다. 옆에 있던 우기준이 그를 품에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실제로 조금 아프긴 했으나 중요하진 않다. 그 이상의 타격이 마도환에게 돌아갈 거니까.

기겁한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국책연구를 심사하는 회의장에서 책자가 날아다니는 광경을 처음 봤다. 모두가 마도환의 후안무치한 행동을 속으로 욕했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인지한 마도환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결과적으로 강우의 말이 옳다는 것을 그가 손수 몸으로 인정한 꼴이었다.

우기준이 강우에 이어 발언했다.

“마 교수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책을 던져 사람의 입을 막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요즘 헌팅턴 프로젝트가 좌초되어 심기가 불편하시다는 건 알겠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상대는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인데요.”

경악한 사람들이 강우를 다시 쳐다봤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심해졌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핵융합 연구에 한 발을 걸치고 있어서 최근에 등장한 신동 고등학생을 들어봤었다. 텔레비전 예능과 선전에 나와서 다소 부풀려진 면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당사자를 오늘 처음 본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우기준이 미소를 지으며 대신 소개했다.

“이 학생은 올해 고려 과학고를 졸업했습니다. 국제 저널에만 모두 네 편의 논문을 실었고요…….”

“다섯 편인데요? 간접적으로 관여한 논문까지 합치면 아홉 편이고요.”

강우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누가 봐도 엄청 아파 보였다.

“오오, 진짜 신동이군요.”

“핵융합계의 천재가 출현했습니다.”

“고등학생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결과적으로 마도환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에게 화를 낸 못난 연구자가 됐다. 그것도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남을 공격한.

“으으.”

신음을 터트리던 마도환이 발표자료를 챙기고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 와중에도 그는 강우를 향해 인상을 쓰며 위협했다.

다음 발표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연구 계획서 발표가 종료되고 회의장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이 강우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강우를 칭찬하며 앞으로 이 나라의 과학계를 이끌어갈 훌륭한 사람이 되라며 덕담을 해주었다.

강우에게 따지려던 마도환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근처에 접근하지 못했다. 덕분에 강우는 마도환과 다시 마주칠 일이 없었다.

이날의 사건은 강우가 국내 핵융합 학계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보름 뒤 발표에서 한국대 마도환 팀은 국책 연구과제에 선정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마도환이 국책과제 선정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기에 이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 * *

최근 들어 강우는 밤늦게까지 연구에 몰두하는 때가 많아졌다.

2차 프로젝트를 위해 헌팅턴에 제안했던 실험결과를 받자마자 그는 이전의 연구를 다듬을 기회를 얻었다. 이 작업은 그의 연구에 날개를 다는 역할을 했다.

덕분에 그는 아이디어가 샘솟을 때는 날밤을 새우다시피 연구에 집중했다.

“으으…….”

강우는 찌근거리는 머리를 감싸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젯밤에 그동안 고민하던 벽을 뚫었고 흥분한 상태에서 연구에 집중한 여파였다. 그의 시선이 휴대폰을 찾았다.

“10시…… 늦었네.”

창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밤새 날아온 톡을 확인했다.

- 차도도 쌤 : 곧 도착할 거야.

- 차도도 쌤 : 설마? 아직 안 일어났어?

멍한 상태로 무슨 뜻인지 한참 고민했다. 막 의미를 깨달았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비 다 했어?”

차도도였다.

차도도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는 강우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일어난 거야?”

“네. 어? 쌤은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그냥 숫자 눌러보니 열리던데?”

강우의 원룸 비번은 0505였다. 차도도 생일이다.

빙그레 웃는 차도도를 향해 강우는 버럭 소리 질렀다.

“아, 그래도 인기척 좀 내고 들어와요!”

“내가 톡으로 얼마나 연락했는데.”

“초인종은?”

“초인종도 눌렀거든?”

차도도가 누른 초인종 소리에 그가 잠에서 깬 모양이다.

“시간 없으니까 얼른 씻어. 빨리 준비해야 해.”

차도도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오늘 점심에는 무려 차도도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가야 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약속이 잡혔다. 당연히 강우는 인정받을 기회라는 생각에 받아들였다.

어제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밤에 연구에 집중하느라 까맣게 잊어버렸다.

차도도의 손을 잡고 강우는 몸을 일으켰다.

사귀기로 한 다음에도 사실상 변화는 없었다. 특별히 데이트할 시간도 없었고.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게 전부다.

“얼른.”

그녀가 그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강우가 씻는 동안 차도도는 방안을 청소했다. 먼저 주방에 널린 그릇을 다시 깨끗하게 씻어 진열한 후 이불을 가지런하게 펴고 침상을 정리했다.

강우의 옷장을 뒤져 오늘 입을 옷을 골랐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괜찮은 옷으로. 예전에 방송에 출연하면서 입었던 옷을 찾아냈다.

차도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준비를 마친 그녀는 책상에 앉아 밤새 강우가 벌였던 사투를 확인했다.

“흐음, 이걸 결국 풀었나 보네.”

노트에 적힌 복잡한 수식과 코멘트를 확인했다. 최근에 그녀도 같은 연구에 몰두하면서 고민했던 내용이다.

“상온핵융합에서 뮤온 입자의 활용 원리와 응용.”

이 주제는 상온핵융합의 대세를 결정지을 중요한 연구다. 강우의 인생 목표를 달성할 가장 중요한 핵심 과제이기도 하다.

노트를 넘겨보니 그 첫 단추를 훌륭하게 끼웠다.

노트에 적힌 수식을 검토하던 차도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끄적인 수식과 설명을 볼 때마다 그가 천재임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잘 흘러가는 연구에 차도도는 자기 일처럼 뿌듯한 기쁨을 만끽했다.

‘오늘 늦게 일어난 이유가 있었어.’

아직 이 연구가 완성되려면 적어도 일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면 상온핵융합 기술이 인류의 손에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

노트를 챙기고 책상 위를 정리했다.

두꺼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뉴클리어 퓨전. 그녀의 책장에도 꽂혀 있는 핵융합의 기본서다.

불현듯 그녀의 책 뒷장에 쓴 낙서가 떠올랐다.

“여기도 있으려나?”

책을 펼쳐 맨 뒷장을 열었다.

놀랍게도 이 책에도 같은 지점에 이는 엠씨제곱(E=mc²)이라는 낙서가 적혀 있었다.

왠지 강우와 그녀가 낙서를 통해 연결된 기분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담담한 미소를 머금던 그녀는 펜을 들고 그 옆에 낙서했다.

그녀의 책에 적힌 낙서와 똑같이 이는 엠씨제곱(E=mc²)을 썼다. 그리고 그 아래에 강우 = 차도도라는 낙서마저 덧붙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등호 부분에 하트를 그려 넣었다.

“쌤?”

강우의 목소리에 그녀는 후다닥 책을 덮었다.

“응?”

욕실 문을 조금 열고 고개만 빼꼼 내민 강우가 보였다.

“어떡하죠?”

“안 볼 테니까 나와서 입어. 수건은 걸치고 있지?”

“그럴까요? 엿보면 안 돼요.”

차도도는 고개를 돌렸다.

‘좀 엉뚱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강우와 자신의 관계를 차근차근 되새겼다. 아직도 스승과 제자라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남친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어색하다. 얼른 극복해야 하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스승과 제자로 함께해온 삼 년이란 기간은 예상외로 길었다.

“이거 입어요?”

“그래, 그거.”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재빨리 원위치하며 대답했다.

“다 됐어요.”

그제야 의자에서 일어선 그녀는 강우의 옷매무시를 다시 정돈했다. 머리도 적당히 빗겨주고 양말까지 준비하자 마치 출근하는 남편을 챙기는 기분이다.

“오늘 누구누구 와요?”

“우리 아빠와 엄마. 두 분만.”

“그냥 남자친구라고 소개하는 거예요?”

“그렇긴 한데…….”

머뭇거리던 차도도가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예전에 마도환 교수랑 맞선을 봤었잖아? 그때 말했듯이 요즘 우리 부모님이 나를 시집보내려고 바쁘시거든. 일전에도 새로운 자리가 났다고 맞선을 보라고 해서…… 내가 사귀는 사람 있다고 거절했더니 데리고 와 보라더라.”

설명대로라면 남자친구 역할이다. 그런데 강우는 그 속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직 유학은 말씀 안 드렸어요?”

차도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곧 한국을 떠나야 하는데 그녀는 아직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다.

강우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상세하게 물을 수도 없었다.

“오늘 말할 거야.”

그녀의 음성에서 단호한 기운이 엿보였다. 어쩐지 오늘 만남이 심상치 않을 것만 같았다.

“쉽지 않은 하루가 되겠네요.”

“미안해.”

“괜찮아요. 전 쌤 편이거든요.”

도도 씨라고 말해보려다가 괜히 낯이 간지러워서 평소처럼 불렀다.

두 사람은 원룸을 나섰다.

밖은 여름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열기가 오늘 그들이 마주칠 고난을 의미하는 듯해서 강우는 전의를 다졌다.

남들이 보기에 지금 두 사람은 상식 밖의 커플임을 그도 안다. 아마 차도도의 부모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데리고 태평양을 건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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