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88화 (288/325)

제288화 차성그룹 (1)

만난 곳은 평범한 한식집이었다.

반찬만 거의 스무 가지 이상 나오는, 동네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라 한다. 강남 한중간에 자리 잡고 룸이 있는 데다 제법 손님도 북적이는 곳이니 서민적이면서도 상당히 괜찮은 음식점이었다.

하얀 식탁보가 덮인 테이블 앞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기다렸다. 약속 시각인 12시가 되어도 차도도 부모가 나타나지 않았다.

차도도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여 강우는 잡담을 꺼냈다.

“쌤? 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글쎄다.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도 있고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도 있는데…… 일반 가정집에 비하면 가문에 조금 더 신경 쓰는 그런 부모랄까?”

순간 강우는 명절 때가 되면 티비에 나와 제사를 지내는 종갓집을 떠올렸다. 차도도가 둘째이자 막내이고 딸은 그녀 하나이니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을 텐데 그녀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없다.

“뭐 하시는 분이죠?”

“사업.”

얼핏 교장 선생님이나 교수 같은 딱딱한 집안을 떠올렸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평범하면서 조금 엄한 집안이라고 간주하면 되나? 강우는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강우야, 분위기가 조금 안 좋을 수도 있는데…… 절대 놀라지 마. 그리고 네 예상과 너무 달라도 절대 당황하지 말고. 넌 평소처럼 의연한 태도를 보여주면 돼. 알았지?”

그녀가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강우는 자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어린 학생일 뿐이어도 실상 그는 그녀보다 더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유학 가겠다는 내 결심에는 변함이 없어.”

그녀의 당부에서 힘을 받아 강우도 마음을 다스렸다.

애초에 여자 쪽 집안 덕을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비록 그의 집안이 가난에 찌들어 있더라도 그의 천재성이라면 충분히 안정적인 생활을 할 자신이 있다. 그녀의 거주 아파트로 추정컨대 그녀의 집안이 조금 부자인 듯하나 그런 정도로 기가 죽을 그가 아니었다.

약속 시각에서 5분 정도 지났을 때 룸 문이 열리고 두 부부가 들어왔다.

머리가 다소 희끗희끗한, 품위 있는 중년 남자와 예쁘고 우아한 중년 부인이었다. 차도도가 예쁜 이유를 확인했다.

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째 그를 보는 두 사람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흠.”

가벼운 기침으로 그를 노려보던 두 부부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차도도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강우 씨예요. 이름이 외자고요.”

“강우입니다.”

강우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그를 훑어보던 차도도의 어머니가 물었다.

“어려 보이는데?”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강우의 대답에 두 사람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반응에서 강우는 차도도가 그에 대해 전혀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상이었다면 분명히 말했을 텐데 정보를 주지 않은 이유가 가늠되지 않았다.

“설마 고려 과학고?”

차도도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네. 도도 씨가 제 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도도 씨?”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차도도에게 넘어갔다.

“넌 사귀는 남자를 데려온다고 하더니 어떻게 학교 제자를 데려왔어?”

차도도 어머니가 싸늘하게 물었다.

“엄마, 사귀는 남자 맞아요.”

“이게 말이 되니? 신문에 날 일이잖아?”

“졸업했으니까 둘 다 성인이니까 전혀 문제없어요.”

“그래도 그렇지 이게 말이 되니? 너! 우리가 자꾸 선을 보라니까 반발심 때문에 이러나 본데…… 이번에 소개한 그 사람하고 조건을 비교해봐. 나이부터 배경까지 모두 말이야. 주변에 물어봐라. 그 사람 괜찮다고 하잖아?”

강우는 얼핏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집안에서 선을 보라고 강요한다고 했던.

“끙! 남자친구를 사귄다더니 어린애를 데려왔군.”

차도도의 아버지 역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다시 어머니가 차도도를 달랬다.

“네 나이를 생각해봐. 이 학생과는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 선 들어온 그 사람과 결혼해. 그쪽 집안에서 제대로 챙겨줄 모양이더라. 결혼하면 네 형편도 안정되고 우리 집안도 덕분에 위상이 높아질 거야. 마침 이번에 합작 건도 있고 아주 좋은 조건이다. 이만한 혼처는 앞으로도 없어.”

강우는 알 수 없는 말이 오갔다.

대충 들어보니 그녀의 부모는 차도도가 임시방편으로 그를 데려왔다고 여기는 듯했다. 남자친구도 아니고 단지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데려온. 그렇기에 더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차도도를 설득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차도도의 결심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차도도는 대응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 태도로 평소 그녀와 부모 사이의 관계를 손쉽게 짐작했다.

“어쨌든 우리 말 들어. 다 네가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어린애랑 불장난하지 말고. 이런 소문이 그쪽 집에 들어가면 큰일이야.”

“어린애 아닙니다.”

드디어 강우도 설전에 끼어들었다.

옆에서 차도도가 그의 옆구리를 건드리며 말렸으나 강우는 고분고분할 생각이 없었다.

두 부모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어린애 아니면? 정말 도도와 결혼할 생각인가?”

“네, 그렇습니다. 곧 함께 미국으로 유학 떠날 예정입니다.”

“뭐?”

유학이란 말이 뜻밖이었나보다. 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고 어머니는 차도도를 향해 손가락질만 했다.

“정말 둘이 사귀는 거야?”

“그렇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함께 유학을 떠나면 앞으로 진행될 일이 뻔히 보인다. 둘이 단순한 사이가 아님을 이것으로 확실하게 증명했다.

“학생? 집안이 어떻게 되지?”

이제 현실이 파악되었는지 어머니가 집안 내력을 물어왔다.

“시골에 홀어머니 혼자 계십니다.”

“재산은?”

“시골집 하나……. 사회 배려대상자 전형으로 고등학교에 합격했습니다.”

하얗게 질린 두 사람이 차도도를 노려봤다.

“이 자식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리는 거야!”

“재산이 얼마인지 모릅니다만 그럴 일 없습니다!”

단호한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모두 처음엔 그렇게 말하더군. 그래도 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지지.”

차도도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빠! 강우 씨는 우리 집안을 전혀 몰라요. 그러니까 그런 말은 삼가세요.”

“모른다고?”

그제야 두 부모가 강우를 유심히 살폈다.

강우는 화가 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솔직히 어떤 집안이든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럼 무슨 돈으로 미국 유학을 가? 가난한 집안에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애가? 도도 네가 돈을 대지 않으면 어떻게 바다를 건너?”

“미국의 기업에서 5년간 학비와 체류비를 지급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 돈 쓸 일 전혀 없으니까 그런 말 마세요.”

차도도와 강우를 번갈아 쳐다보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강우에게 물었다.

“학생? 도도가 누구인지 아니?”

“학교 선생님요. 제 담임이기도 하고요. 무려 3년간 담임을 하셨는데요?”

“그거 말고.”

“다른 신분이 무엇이든 전 상관없습니다.”

자신만만한 강우의 대답에 안면을 굳힌 어머니가 조용히 타일렀다.

“도도는 차성그룹 둘째 딸이야. 차성그룹은 아니?”

강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차성그룹 총수 차준범. 가끔 뉴스에서 들어봤다. 그 사람이 지금 차도도의 아버지가 되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비록 경제에 문외한인 강우도 차성그룹을 안다.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5대 그룹 다음쯤으로 인정되는 거대 그룹. 드디어 차도도가 거주하는 최상층 복층 펜트하우스의 비밀이 풀렸다.

“압니다.”

“그래, 그럼 다시 묻지. 네가 차성그룹 딸과 어울린다고 생각해?”

“차성그룹이라 놀라긴 했으나 저희 관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차성그룹의 도움을 받을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지금이야 혈기 왕성해서 그렇게 말하겠지만……. 그나마 모르고 있었다니 재산을 노리고 도도에게 접근한 건 아니어서 좀 낫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조용한 설전이 이어졌다.

차도도와 어머니 사이에 다툼이 오갔고 보다 못한 아버지 차준범이 못을 박았다.

“넌 유학 가면 없는 자식으로 취급하겠다. 이 학생하고 사귀는 것도 끝내! 세간에 제자와 사귀는 선생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진 않지? 자, 오늘은 이쯤하고 밥이나 먹자.”

점원을 불러 미리 준비했던 요리를 들여오게 했다.

테이블 가득 전통 밥상이 깔렸다.

각종 반찬이 상당히 맛깔나게 차려졌으나 강우는 맛을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가 상당히 불쾌했다. 차도도의 부모님이라서 좋게 보려 해도 그를 도둑 취급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나마 쫓겨나지 않고 점심이라도 함께 먹고 있으니 다행인가.

힐끔 차도도를 쳐다보니 안색이 창백했다. 가끔 그에게 미안한 표정을 하기도 했고.

강우는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한참 밥을 먹고 있을 때 각진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손에 파일철을 하나 들고 있었다.

“회장님, 기획실에서 정리한 두바이 수소 플랜트 합작 사업 개요입니다.”

“정 실장, 거기 놓아두고 가게나.”

정 실장이 파일철을 차준범 옆에 놓아두고 룸을 나갔다.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너희 아버지 봐라. 얼마나 바쁘시니? 밥 먹을 시간도 제대로 없다. 이번에 AK 그룹과 합작으로 두바이에 들어가기로 했어. 우리 차성중공업에서 기술을 제공하고 AK 그룹에서는 자본을 투자하는 거로. 그 AK 그룹이 바로 너에게 혼담을 넣은 곳이야. 너도 이제 철 좀 들어라. 응?”

강우도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좋게 말하면 차도도에게 짝을 찾아주는 사업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업을 위해 차도도가 팔려가는 것이다.

당연히 차도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룹 경영은 오빠가 하잖아요? 전 앞으로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전 경영이 아닌 과학을 위해 살 겁니다. 과학자가 제 꿈이고요. 그 꿈을 위해 유학을 가는 거고 강우 씨랑 결혼도 하고요.”

차준범이 눈을 부라렸다.

“과학? 그거 다 부질없는 짓이야. 기초과학 발전이니, 기술 강국이니 떠들어대도 현실을 봐라. 국가 예산에서 기초과학에 얼마를 투입하는지. 정말 중요하면 정부에서 그렇게 무신경할 수 없어.”

“그래도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기업도 살고 국가도 살아요.”

“그거 다 헛소리야. 기술은 없으면 사 오면 돼. 돈만 주면 어떤 기술이든 다 살 수 있어. 돈이 부족해서 그렇지. 차성중공업만 해도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보다 외부에서 사들인 기술이 더 많아. 우리 기술 수준이 미흡한데 어쩌겠니?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게 돈이 덜 먹혀.”

이어서 세계적인 유명 기업들이 기술기업을 인수한 각종 사례가 나왔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아마존도 애플도 그런 식으로 덩치를 키워 사업을 확장했다.

“그래서 과학보다 경영이 더 중요한 거다. 너도 경영학을 전공하지 않으려면 유학 가지 마. 과학 그거 백날 해봐야 그룹에 하나도 도움 안 된다.”

과학을 얕잡아 보는 차준범의 엄한 말에 오히려 강우가 불끈했다.

막 그가 반박하려 할 때 차도도가 위험을 느끼고 재차 옆구리를 찔렀다.

잠시 차분하게 상황을 되새긴 강우는 돌파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계속 밀리면 그와 차도도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차도도의 부모와 경영과 과학을 놓고 논쟁을 벌이면 더 수렁에 빠진다.

“실례가 아니라면 그…… 파일철 잠시 봐도 될까요?”

상황전환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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