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89화 (289/325)

제289화 차성그룹 (2)

의아한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던 차준범이 파일철을 툭 던졌다.

회사 기밀일 텐데 강우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현실을 깨달으라는 의미다.

모두 입을 다물고 식사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 강우는 파일철을 넘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차성중공업 두바이 수소 플랜트 EPC 합작건. 최근에 중동과 동남아에 복합화력발전소 건설이 유행이니 그 관련 사업인 듯했다.

다만 이 사업의 특이점으로 친환경 미래 에너지로 알려진 수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가 수소 핵융합을 연구하다 보니 수소에 유독 눈이 갔다. 물론 이 수소는 핵융합과 상관없는 말 그대로 수소 화학에너지다.

대충 확인해보니 천연가스에서 수소를 생산하고 이를 포집해서 액화한 다음 수소 터빈을 이용해 발전하는 방식이다. 수소를 태우면 물이 생성되기에 지구 온난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름대로 기술개발에 열심이야.’

방금 차준범의 과학을 낮춰 본 발언과 달리 여러모로 기술개발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었다.

차준범의 견해는 두바이 사업 합작에 들어가면서 AK 그룹에 투자를 요청하다 보니 그 여파로 나온 말인 듯했다.

문득 AK 그룹 투자와 차도도 혼담이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파일철에는 사업 규모와 기간, 양쪽 나라의 관계 및 두바이 담당자의 성향 등이 상세하게 조사되어 있었으나 굳이 강우가 신경 쓸 내용은 아니었다.

파일을 넘기던 강우의 눈에 기술개발 문제점 항목이 들어왔다.

수소 액화플랜트 건설 과정과 수소 터빈 개발에서 문제점이 노출되어 시급한 보완이 필요하다고 적시되어 있었다.

그 전략으로 일단 사업 체결과 기술 문제점 보완을 별도로 진행하자는 의견이었다.

당연히 두바이 쪽에는 완벽하다고 가장해야 한다. 사업이란 모든 진실을 상대에게 내보일 필요가 없고 중공업이나 건설 분야는 다소 무대포적인 성향이 있다. 일단 밀어붙인 후 천천히 수습하는 방식이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강우가 파일철을 덮자 차준범이 물었다.

“뭔지 알겠나?”

“대충 감을 잡았습니다.”

“똑똑한 친구로군. 하긴 과학고니까 당연하겠지. 도도야, 우리 그룹에 장학재단 있잖니? 내가 이 친구에게 유학 장학금을 지급할까 하는데 어떠냐?”

당연히 그 뒤에 조건이 숨겨져 있다. 차도도와 사귀지 말라는 의도다.

강우는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 여기에 보고된 사업을 훑어보니 현재 수소 플랜트와 수소 터빈 개발에 문제가 있다고 나와 있는데요?”

“문제점을 금방 찾았군. 그래서 기술자들이 문제란 말이야. 그 문제를 발견한 지 벌써 몇 년인데 여태 해결책을 못 찾고 있어. 매달린 기술자들만 몇이더라? 한국대 출신도 많고 해외 유학파도 많은데 지지부진이야. 그래서 내가 과학을 믿지 못하는 거야.”

과학을 불신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 사업을 못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 체결 후 2년의 시간이 있고 그동안 해결해 봐야지. 끝까지 해결 못 하면 기술도입으로 방향을 틀면 돼. 독일에 이쪽 분야에서 선두를 질주하는 기업이 있거든.”

그가 어리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어쨌든 기술개발이 현재 당면한 최고 문제라는 거죠?”

“겉으로는 그렇지, 속으로는…… AK 그룹을 확신시켜 투자를 받아내는 문제가 있고.”

설명하면서 차도도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가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물러설 수 없다.

“그렇다면 제가 이 문제를 한번 해결해 봐도 될까요?”

강우의 도발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차도도가 한숨 쉬며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고 차준범이 피식 비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말했듯이 사내 일류 기술자들이 모두 들러붙어도 해결 못 하던 문제야. 그런데 자네가 어떻게? 전공자도 아니고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나?”

차도도가 끼어들었다.

“강우는 천재로 소문났어요. 지난번에 저와 예능 방송 및 CF에 같이 출연했었어요.”

“너! 티비에도 나왔었니?”

차도도는 티비 출연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차도도가 CF 동영상을 찾아 휴대폰에 띄운 후 부모에게 내밀었다.

“흠, 우리 딸 예쁘게 나왔네.”

그래도 딸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그대로였다. CF에서의 차도도는 정말 여신이었으니까.

CF를 감상한 두 사람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대단한 학생이었군. 그러니 도도가 사귀겠다고 마음먹었지.”

“자네가 똑똑한 것은 알겠어. 나중에 대학 졸업 후 차성그룹에 입사하게. 어떤가?”

엉뚱한 쪽으로 대화가 튀자 강우가 바로 되돌렸다.

“그런 것보다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습니다. 며칠만 시간을 주시지요.”

“괜히 무리할 필요 없네.”

차도도가 강우를 응원하고 나섰다.

“아빠, 할 수 있어요. 기술적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워도 과학으로 접근할 수는 있거든요.”

“어차피 차성중공업이 손해 볼 일은 없잖습니까?”

강우가 눈을 피하지 않고 계속 주장하자 차준범이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굳이 하겠다면 말리진 않아. 대신에 하나만 약속해주게.”

“뭡니까?”

“해결하지 못하면 도도와 헤어지게. 어떤가?”

“아빠!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말 안 될 것 없다. 네가 좋아하는 과학이 얼마나 별 볼 일 없는지 확인시켜 주마. 그리고 너와 사귀려면 그 정도 능력과 패기는 있어야지.”

은근히 신경을 긁으면서 차준범이 강우를 노려봤다.

차도도가 강우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강우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자신도 있었고 이런 식으로라도 돌파구를 찾아야 했으니까.

“그럼 해결하면 교제를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건 두고 보마.”

손해인 듯해도 차도도네 부모와 굳이 다투고 싶지 않다.

강우는 곧바로 승낙했다.

“좋습니다. 며칠 내로 해결책을 구상해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차성중공업을 방문했으면 합니다. 제조 공정을 확인하고 관련 기술자로부터 상세한 문제점을 들어야 하니까요.”

이론과 현실은 다르기에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예상외로 흔쾌히 차준범이 승낙했다.

“좋아, 공장 견학이야 뭐 어려울까. 공장장에게 연락해 두지. 언제 가볼 생각인가?”

“내일 당장 가겠습니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어디 한 번 능력을 발휘해보게.”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

처음으로 차도도의 부모를 만난 자리를 그렇게 마무리했다.

대충 전통 밥상 한식을 먹었고 강우는 별반 맛을 느끼지 못했다.

차도도는 나이가 찼으니 결혼을 염두에 두라는 잔소리를 계속 들었고 강우는 파일철을 다시 훑었다.

식사를 마치고 부모님을 보낸 후 차도도가 우려를 표했다.

“어떡하려고 끼어들었어?”

“순수한 과학적 욕심에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며칠 만에 가능해?”

“해봐야죠. 안 되면 되게 하고요.”

자신감 넘치는 강우의 대답에 차도도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항상 이렇게 말하던 강우가 결국은 해냈으니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번에는 일반적인 과학연구가 아닌 기술적 문제라 어렵다고 여겼다.

정작 강우는 헌팅턴의 기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이력도 있어 걱정하지 않았다.

“정말 공장에 갈 거야?”

“공장이 어딘데요?”

“창원.”

제법 거리가 멀다. 내일 간다고 했으니 오늘 저녁이나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떠나야 한다.

“같이 갈래요? 모닝 타고?”

둘이 가면 여행 기분이 나서 좋다. 물론 당면한 난관 때문에 놀 기분은 아니다.

“내가 너 혼자 어떻게 보내겠어? 당연히 나도 가야지.”

“흠, 그럼 가는 길에 우리 집에도 들려요. 우리 어머니께도 인사해야 하잖아요?”

뜻밖의 말이었던 듯 차도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둘이 사귀고 결혼까지 염두에 둔다면 당연한 순서다.

물론 강우는 그녀가 가지 않겠다고 해도 끌고 갈 생각이다.

“그럴게.”

예상외로 순순히 그녀가 수락했다.

그녀도 진지하다는 생각에 강우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쩌면 그녀 부모의 뜻은 이 시점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 *

급히 집으로 돌아가 대충 짐을 챙긴 다음 강우와 차도도는 차를 타고 남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차도도의 소형차를 강우가 운전했다.

그들의 계획은 단순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은 데다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시간 여유도 넉넉하지 않다. 그래서 한꺼번에 모두 처리하기로 했다.

오늘 저녁에는 강우네 집에 도착해서 일 박을 하고 내일 아침 일찍 차성중공업에 들어가기로 계획을 짰다.

강우는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 편안한 반면 차도도는 적잖게 긴장했다. 몇 시간 전과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다.

“뭘 그렇게 긴장해요?”

“어머니께서 나를 싫어하시면 어쩌지?”

“졸업식 때 보셨잖아요? 어머니가 쌤을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그건 선생님일 때고.”

차도도는 걱정이 앞섰다.

“그때도 쌤 같은 며느리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잖아요?”

“그거야 하시는 말씀이지.”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어머니는 제가 좋으면 무조건 오케이거든요.”

강우의 웃음이 차도도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도심의 건물이 점차 사라지고 푸른 나무가 우거진 산과 들로 고속도로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강우의 고향에 도착하려면 한참 시간이 걸린다.

그들의 대화는 다시 오늘 부모와 만난 일로 돌아갔다.

“오늘 제가 무례하진 않았나요?”

“조금 그런 면이 있긴 했는데…… 너다웠어. 잘했어.”

“다행이네요. 점수를 더 잃진 않았으니. 어차피 더 잃을 점수도 없고요.”

“미안해. 미리 내가 누구인지 미리 말해주지 않아서.”

“괜찮아요. 알았다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거예요. 오늘도 재산을 탐내는 남자로 비쳤겠죠.”

강우의 판단은 옳았다. 만일 그녀가 차성그룹 딸임을 알고 있었다면 지금까지처럼 편히 그녀와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겠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의 공동 연구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오늘 부모와 만날 때도 역효과를 냈을 게 뻔했다.

“다만…… 그런 비밀을 숨겼으니 용서하기 힘들겠죠?”

“응? 용서가 안 돼?”

차도도가 당황해서 그를 쳐다봤다.

그녀를 놀리는 재미도 쏠쏠하게 재미있다.

“당연하죠. 어디 보자, 지금까지 쌤이 내게 잘못한 일이…… 집에서 두 번 쫓아낸 거랑 신분 숨긴 거랑 또 뭐 있나…….”

“너! 은근히 뒤끝 작렬이다?”

“원래 천재는 그런 법이거든요.”

차도도가 그의 어깨를 툭탁거렸다.

따지고 보면 그도 숨긴 게 있긴 하다. 무려 손강우라는 어마어마한 비밀이.

“그런 법이 어딨어? 그래서 혼낼 거야?”

“그래야죠. 어떻게 혼낼까…… 요즘은 애 안고 결혼식하는 게 유행이라던데 우리도?”

“으이그, 이 녀석이 점점 능구렁이가 되어가고 있어!”

차도도의 손이 강우의 귀를 잡고서 쭉 늘렸다.

“으악! 쌤! 운전 중이라고요!”

“흥! 운전하든 말든 넌 좀 혼나야 해!”

운전석에서 도망칠 수 없는 강우는 그 자리에서 차도도의 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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