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차성그룹 (3)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강우와 차도도를 강우 어머니가 놀라면서도 환영했다.
급히 운전해서 오느라 저녁을 먹지 못했기에 본의 아니게 저녁밥까지 신세를 졌다.
그래도 아들이 왔다고 열심히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드는 어머니 옆에 차도도가 붙어서 거들었다.
옆에서 도와주는 차도도가 연신 신기한 듯 어머니는 피곤하실 테니 쉬라고 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차도도의 요리실력을 아는 강우는 우려스러웠으나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차도도가 커피를 타왔다. 세 사람이 둘러앉아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선생님께서도 미국에 가신다면서요? 그것도 강우랑 같은 학교? 우리 강우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 어머니는 강우가 유학 간다고 걱정이 많았다. 철모르는 아이를 낯선 외국으로 보내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학교 선생님이 함께 유학 간다니 적잖게 안심이 됐다. 어머니가 아는 내용은 딱 여기까지였다.
“어련히 강우가 잘 알아서 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옆에 붙어 있으니까 어려운 일 없을 거예요.”
“아유,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지요. 우리 강우를 3년 내내 잘 돌봐주셔서…….”
어머니가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대충 안부 인사가 지나간 후 강우는 폭탄선언을 했다.
“저…… 쌤이랑 사귀기로 했어요.”
“그래, 쌤이랑…… 응?”
어머니가 잘못 들은 게 아니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결혼을 전제로. 우리 조만간 결혼할 거예요.”
강우가 다시 강조했다.
여전히 반응하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차도도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제가 미덥지 않더라도 우리 둘 사이를 허락해주세요.”
너무 뜻밖이어서인지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졸업식 때 선생님 같은 며느리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재차 강우가 승낙을 재촉하자 어머니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이 너무 고와서 그래. 난 네가 좋다면 다 좋단다. 내가 허락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니.”
긴장했던 차도도의 안색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강우랑 잘 지낼게요.”
“아유, 우리 강우가 선생님에게 평생 폐를 끼치게 되었네요. 이 녀석이 원래 여자애들이랑 별로 안 친했는데……. 중학교 때 따라다니던 미희라는 애 말고는…….”
갑자기 이상한 쪽으로 말이 튀었다. 어머니 본인도 놀라서 얼른 입을 다물고 차도도의 눈치를 봤다.
정작 강우는 미희라는 애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니 휴대폰에 있는 중학교 때 사진에서 유독 자주 보이는 한 여학생이 있긴 했다. 당연히 강우는 관심이 없었다. 강우의 중학교 시절은 그와 상관없는 시간이니까.
차도도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가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다음부터는 놀랍도록 차도도와 어머니의 죽이 잘 맞았다. 강우가 보기에도 신기할 정도였다.
차도도는 붙임성이나 사교성이 활달한 성격이 아니다. 그런 그녀가 낯선 어머니와 원만하게 대화하려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지 눈에 보인다. 노력하는 차도도가 고마웠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니?”
어머니가 어느새 차도도에게 말을 놓았다. 정말 며느리처럼 편하게 대했다.
“대략 2년쯤 후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 국내로 들어오거나 아니면 미국 현지에서 식을 올릴 계획이에요. 미국에서 하게 되면 당연히 어머님을 미국으로 모셔야죠.”
차도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정말 결혼이 현실이 됐다는 게 실감이 났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으나 역시 원하는 바를 향해 힘껏 노력하면 꿈은 이루어지는 법이다.
어머니의 표정에서 진정으로 차도도를 예뻐하고 있음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 * *
강우가 쓰던 방을 차도도에게 내어주었다.
대신에 강우는 오늘 밤 어머니와 함께 자기로 했다.
대충 방을 정리하고 이부자리까지 봐준 다음 침대에 차도도와 나란히 앉았다.
“오늘은 여기에서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잠 설치지 말고요.”
“강우야, 너도 오늘 운전 많이 했잖아? 고생했어.”
“그래도 이래저래 큰일들을 끝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다.
강우는 차도도네 집에 인사했고 차도도는 강우네 집에 인사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기에 쉽지 않은 하루였다. 특히 차도도네 집안에는 일방적으로 문제를 던져놓은 상황이다.
“나도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어.”
“쌤이 고생하신 거예요.”
차도도네 집안을 설득하려면 아직도 큰 난관이 남아 있음을 강우도 안다. 물론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수소 플랜트의 문제점을 해결한다면 그를 보는 눈이 달라질 테니까.
“저도 이 방에서 잘까요?”
“절대 안 돼.”
놀란 차도도가 급히 손을 저었다. 결혼을 전제로 사귄다고 해도 두 남녀가 붙어 있는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안다. 게다가 아직 두 사람은 그런 사이도 아니다.
“농담이었어요.”
강우는 차도도의 머리를 매만져주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일 봐요.”
강우를 내보내고 차도도는 편하게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금 강우네 집에 있는 현실이 꿈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관계가 진행되리라고 짐작했었는데도 낯설다.
무엇보다 아버지 차준범의 반응이 걱정스러웠고 이런 관계를 강우가 실망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사실 오늘 점심 식사자리에서 강우가 너그럽게 참지 않았다면 곤란했을 상황이 몇 번 있었으니까. 이해하고 참아준 강우가 무척 고마웠다.
지난 3년간 강우와 함께한 시간을 떠올렸다.
그녀 평생에 강우보다 더 잘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날 수 없다는 확신이 든다. 외적인 면은 몰라도 내면적인, 정신적인 교감에서 강우를 따라올 남자가 없다.
“앞으로 강우와 함께 연구에 매진해야지.”
강우가 천재성을 모두 끌어내어 세운 목표를 정진하도록 힘써야 한다. 3년간 가까이서 봤던 강우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의 천재성이 열어나갈 미래가 궁금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도 학위를 받고 연구에 동참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이어진다.
앞으로 그녀 삶에는 그녀와 강우가 함께 존재한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그녀의 삶에서 더 앞세웠던 적이 없었는데 지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아직은 이상한 느낌이지만. 익숙해지겠지.”
두 사람이 그려갈 연구 활동의 명확성에 비하면 두 사람의 삶 자체는 티끌 없는 하얀색 도화지였다. 어떤 삶을 그리게 될지는 두 사람의 손에 달렸다. 걱정이 앞섰다.
차도도는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다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차성중공업 공장장 김태진은 아침부터 비상을 걸었다.
공장으로 출근하는 이사진과 부장급 인사들이 줄줄이 회의에 불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정창수 관리부장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AK 그룹과의 합작 건으로 관련자들이 날밤을 새우며 문건을 작성한 게 불과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오늘 또 비상이 걸렸으니 달가울 게 없다.
“오늘 VIP가 오신다.”
김태진의 한 마디에 좌중이 술렁였다.
“회장님께서 오십니까?”
“대통령이 방문합니까?”
그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VIP는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런데 김태진 공장장의 대답은 달랐다.
“회장님 영애가 오신다.”
“네? 영애가 있었어요?”
회장 일가의 가계도를 머릿속에 떠올린 직원들이 그제야 잊었던 한 부분을 기억해냈다.
차준범 회장은 슬하에 일남 일녀를 두었다. 장남은 현재 착실하게 경영수업을 받고 있어 그룹 직원들이 익숙하다. 하지만 그 딸은 기억이 없다.
그들의 기억에서 딸은 잊힌 존재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일이 없고 회사를 방문한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그 정체를 궁금해했었다. 때로 직계가 아닌 숨겨놓은 첩의 자식이라거나 너무 못생겨서 앞에 나설 수 없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놀랍게도 그런 영애가 차성중공업 제 1공장을 방문한다고 했다.
“무엇 때문에요?”
“나도 몰라. 다만 어제저녁에 회장님의 특별지시가 있었다. 모든 편의를 봐주라고. 영애께선 이번 합작 건과 관련해서 공장을 투어하실 예정이다.”
“일반인이라…… 보셔도 모를 텐데요?”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갑작스러운 회장 딸의 방문 소식에 회의실에서는 별별 불평이 다 나오면서 긴장이 감돌았다.
그때 한 간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회장님 영애와 AK 둘째 아드님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고 들었습니다.”
“어? 그런 일이? 그럼 이번 합작 건이 혼수품인가?”
더 시끄러운 잡담이 오갔다.
어쨌든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던 영애의 방문 소식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최 이사, 정 부장! 두 사람이 오늘 옆에 붙어서 안내하게. 절대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되네.”
김태진은 최성호 기술연구 이사와 정창수 관리부장에게 모든 짐을 떠넘겼다.
두 사람의 안색에 먹구름이 끼었다.
회장 영애와 안면을 틀 기회임에도 괜한 물의를 일으키면 오히려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더 큰 임무다. 특히 공장 사정을 전혀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영애라면 더욱 골치 아프다.
만일 드라마에서나 보던 오만한 재벌 2세, 3세라면 더더욱 감당 불가능이다.
“후우, 오늘도 무사히…….”
두 사람은 하늘에 기도했다.
* * *
차성중공업 제1공장 정문에 도착했다.
모닝이 정문으로 진입하자 수위가 재빨리 차를 가로막았다.
“어디 가십니까? 누구 찾아오셨습니까?”
수위가 차 안을 들여다보며 강우와 차도도를 확인했다.
상대방의 안색을 쓱 훑어본 강우가 반대로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오늘 높은 사람이 방문하거든요? 차를 옆으로 빼세요! 이러다가 높은 사람에게 걸리면 큰일 납니다.”
강우가 웃으면서 차도도에게 말을 건넸다.
“높은 사람 온다고 했다는데요?”
“우리야 상관없잖아? 견학만 하면 되니까.”
“그렇긴 하죠.”
강우가 미적거리고 있자니 수위가 언성을 높였다.
“일반인은 차를 타고 안으로 못 들어갑니다. 저기 주차장 보이시죠? 저기 차 세워두고 정문에서 출입증 발급받으세요.”
정문 옆에 방문자용 주차장이 꽤 크다.
“여기 공장이 제법 넓다고 들었는데요?”
“걸어서 공장을 가로지르면 한나절 걸립니다. 어쨌든 차는 저쪽에 세우시고요. 높은 사람 오시기 전에 얼른 부탁드립니다.”
강우는 유쾌하게 반응하며 차를 옆으로 뺐다.
주차한 후 차에서 내려 옷매무시를 점검했다.
정문 안쪽에 정장과 작업복을 입은 무리가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강우는 다시 수위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예요?”
“뭐긴요! 높은 사람 기다리는 겁니다.”
“그 높은 사람이 누군데요?”
강우를 쓱 훑어본 수위가 귀찮다는 듯 그를 출입증 교환 건물로 내몰았다.
“그건 알 필요 없고요. 저기 가셔서 찾는 분 확인하고 방문증 교환하시면 됩니다.”
분위기를 훑어본 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통령이라도 방문하나 봐요.”
“신경 쓰지 말고 방문증이나 교환하자. 우리도 오늘 바쁘니까.”
차도도가 그의 소매를 끌었다.
방문증 교환대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마침 공장을 방문한 다른 사람이 있어서 강우네는 몇 분을 기다려야 했다.
“누구 만나러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