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차성그룹 (4)
여직원의 질문에 강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 공장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차도도를 쳐다보자 그녀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아는 사람 없는데?”
강우와 차도도가 멀뚱거리면서 고민하고 있자니 여직원이 심상찮은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용무 없으시면 못 들어가세요.”
“용무는 있어요. 공장을 둘러볼 일이 있어서…….”
“견학은 따로 신청하셔야 합니다. 개인은 어렵고 단체만 가능해요.”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처리해볼게.”
차도도가 차성중공업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조직도를 찾았다.
“이 사람 만나면 되겠지?”
“흠, 그 사람이면 딱이네요.”
강우는 방문자 명부에 기록했다. 만날 사람을 최성호 기술연구 이사로 적었고 방문자는 고려 과학고 소속 차도도와 강우로 했다.
두 사람의 신분증을 여직원에게 내밀었다.
최성호 이사의 이름을 확인한 여직원이 안면을 찌푸렸다.
“최 이사님 오늘 엄청 바쁘신데…… 혹시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사실 모르는 사이이긴 한데 오늘 꼭 만나야 해서…….”
여직원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사님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거든요. 예약하신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안으로 기별 넣어주세요.”
“아, 혼날 것 같은데…….”
여직원이 고민하다가 인터폰을 연결했다.
“이사님 만나겠다는 분이 정문에 오셨는데요?”
- 이사님 오늘 특별한 예약 없으신데, 이사님 찾아온 것 맞아요?
“아시는 분 같지는 않은데 꼭 만나야 한데요.”
- 오늘 비상 걸린 것 알잖아요? 다음에 다시 오라고 말씀드리고 돌려보내세요.
어째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차도도가 옆에서 냉큼 끼어들었다.
“차도도와 강우가 왔다고 말씀해보세요.”
“방문자 이름이…… 차도도, 강우라고…….”
- 네?
놀란 목소리와 함께 인터폰이 끊어졌다.
여직원이 안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들여보내란 거야? 말라는 거야?”
난감해하는 여직원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자니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장과 작업복 무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오, 오셨습니까?”
순식간에 주위에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그제야 강우는 사태를 파악했다. 오늘 방문하는 높은 사람이 바로 차도도였던 거다.
“회, 회장님 지시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우는 뒤로 한발 물러났고 차도도가 전면에 나섰다.
“누구신가요?”
“공장장 김태진입니다. 평소 회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공장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어서 줄줄이 돌아가며 직책과 이름을 밝혔다.
강우는 놀란 여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었다. 그들을 막아섰던 수위도 안색이 노랗게 변해 있었다.
“며, 명품 입었을 줄 알았는데…….”
“모닝이 뭐야…… 외제 스포츠카 타고 올 줄 알았지.”
물론 강우는 이들의 행동을 당연히 이해한다. 그도 차도도가 재벌 집안일 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으니까.
직원들의 과한 인사를 차도도가 재빨리 정리했다.
“오늘 볼 일이 있어서 방문한 거예요. 한 분만 안내해주시면 되고 다른 분들은 각자 업무 보세요.”
“하하, 그러시겠습니까? 아무쪼록 즐거운 방문 되셨으면 합니다.”
공장장이 미리 선정해두었던 두 사람을 불렀다.
중년의 두 남자가 차도도에게 꾸벅 인사했다.
“최성호 기술연구 이사입니다.”
“정창수 관리부장입니다. 저희가 오늘 하루를 책임지겠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공장 투어용 전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넓은 공장을 걸어 다니지 않아 다행이었다.
강우와 차도도는 두 임원과 함께 차성중공업 공장을 둘러보게 됐다.
* * *
대기업 공장 견학은 강우에게도 처음이었다.
손강우 시절 대기업 연구소나 국가출연 연구소를 방문할 기회는 숱하게 있었으나 제품을 제조하는 공장은 기억에 없었다. 자연과학대학과 공과대학의 차이이기도 했고 과학과 기술의 차이이기도 했다.
“대단하네요.”
예상외로 엄청난 규모에 강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발전 및 플랜트 산업이 주력인 차성중공업은 강우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연신 감탄하는 강우의 옆에서 차도도도 뿌듯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차성그룹의 딸이니 강우의 반응이 기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차성중공업이 개발한 최대 규모의 가스터빈으로…….”
대형 발전용 터빈 앞에서 최성호 기술연구 이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최근에는 과학과 기술을 같은 종류로 취급하고 이해하지만, 과학과 기술이 융합하기 시작한 시기는 20세기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넓게 확장해서 받아들이더라도 19세기부터다.
뉴턴이 만유인력과 운동의 법칙으로 물리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라부아지에가 화학의 신기원을 개척했으나 이런 과학이 산업기술의 기반이 되어 인류의 문명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지난한 세월이 걸렸다.
예를 들자면 포를 쏠 때 포탄의 궤적을 뉴턴의 법칙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해도 이를 실제 전쟁에서 활용하기엔 오차가 너무 컸다. 과학 이론보다 경험이 월등히 빠르고 정확했다.
산업혁명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를 연 증기기관의 발명도 속내를 따져보면 과학과 거리가 멀었다. 증기기관을 발명한 와트는 학자가 아닌 기계제작 사업자로 글래스고 대학 수리소에서 일했다.
이때는 과학 이론이 아닌 경험으로 기구를 제작했고 이 기구의 움직임을 해석하기 위해 과학자가 뒤늦게 이론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과학이 발전했다.
즉 폭발적으로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근대에도 과학보다 기술이 훨씬 앞서 있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과학이 기술을 추월했고 이제는 과학 이론에 근거하지 않은 기술은 발전이 어렵고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즉 과학 만능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이 과학과 기술의 차이였어.’
지금까지 강우는 과학에서 천재성을 드러냈다. 그는 복잡한 수식 계산과 이론 정립에서 탁월한 장점을 발휘했다.
그런데 지금 공장을 방문해서 생산 공정을 둘러보고 제품을 확인하면서 기술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수많은 과학지식이 응용과 융합을 거쳐 제품을 생산하는 기술로 변형했다. 이는 뜻밖의 경험이었다.
거대한 발전용 터빈을 목격하자 머릿속에서 터빈에 적용되는 열역학과 유체역학 이론이 떠오르고 이를 응용하여 설계 및 제작하는 각종 기술이 머릿속에서 정립됐다.
천재성의 확장. 다양한 분야로 끊임없이 넓어지는 능력에 그는 새로운 세계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처음 투어를 시작할 때와 달리 공장에 적응한 강우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터빈의 익형 개발은 비행기 날개와 이론적인 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강우는 유체역학에서 다루는 익형 원리를 거론하며 질문을 던졌고 최성호 이사는 대답하느라 쩔쩔맸다.
놀랍게도 투어를 진행할수록 강우의 질문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단순한 설계 차이를 묻던 질문이 어느새 제작공정으로 이어지면서 각종 문제점을 도출해냈다.
“혹시…… 터빈 개발 전공자이십니까?”
“아뇨, 오늘 처음 봤습니다.”
강우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최성호 이사는 잠시 후 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이제는 차도도마저 전문가 수준의 질문을 연거푸 입에 올리고 있었다.
“혹시…… 하시는 일이?”
“물리학을 전공했어요.”
그나마 조금 이해하기는 했어도 수긍하기는 어려웠다. 재벌 자제들이 이공계 쪽으로 공부하는 경우가 드문 데다 설사 물리학을 전공하더라도 지금처럼 제품을 한번 보고 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성중공업에서 다루는 기술은 수많은 기초과학을 결합한 첨단 분야이기에 이런 수준까지 이해하는 재벌 자제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오시기 전에 자료를 보고 공부하신 겁니까?”
“엊그제 올라온 보고서를 잠시 살펴봤어요.”
차도도의 대답에 최성호는 식은땀을 흘렸다.
대충 수박 겉핥기로 공장을 견학하고 갈 줄 알았는데 완전히 공장을 해부하고 있었다.
회장 딸이니 공장의 좋은 모습만 보여줘야 하는데 공장의 문제점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어떻게 이런 인재를 지금까지 숨겼지?’
임직원들도 거의 몰랐던 회장의 딸이 회사 기술력에 이렇게 이해도가 높을 줄 예상치 못했다.
어쨌든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불편함 없이 안내하라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AK 그룹과 합작하려고 개발한 수소 플랜트 부품은 어디에 있죠?”
“아, 그게…… 수소 포집 및 액화 시설과 수소 터빈 등인데요, 저쪽 건물입니다.”
최성호가 열심히 설명하면서 그들을 안내했다.
차도도가 이곳에 온 목적지로 옮겨가자 최성호는 더욱 긴장했다.
“발전용 가스터빈은 기술 집약 산업이라 진입장벽이 매우 높습니다. 현재 미국 GE, 독일 지멘스, 일본 미쯔비시 정도가 제품을 생산하고 있지요. 최첨단 터빈은 천연가스용인데 이를 친환경 수소로 바꾸겠다는 기치 아래 저희는 수소 터빈을 연구 개발하고 있습니다.”
최성호가 기본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아직은 시험용이라 터빈 크기가 작습니다.”
터빈이 작다고 해도 사람 키보다 훨씬 크다.
강우는 지금까지 구경했던 LNG용, 또는 디젤용 터빈과 비교하면서 고민에 잠겼다.
“수소 터빈의 가장 큰 문제가 뭐지요?”
“수소 비용입니다. 사실 수소가 엄청 비싸거든요. 또 상대적으로 고온 고압이어서 부품 개발이 쉽지 않습니다. 탄소 저감 정책이 아니라면 사실상 수소를 이용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수소의 장점이 있지 않나요? 수소는 LNG 대비 6배의 화염 확산속도와 3배의 발열량을 가지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최성호는 강우를 돌아보면서 함부로 설명하다가는 큰코다치겠다고 생각했다.
차도도와 강우는 관련 실무자를 불러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직접 제품을 확인하자 보고서에 언급되었던 문제점이 무엇인지 더 확실해졌다. 경제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이 결합한 문제점이어서 사실상 해결하기 쉽지 않다.
“두바이 플랜트 투자 발표회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게 되죠?”
“그게…… 수소 터빈이 아직 완성된 기술이 아니거든요. 일반 터빈과 달리 소형이고 특수한 용도에 국한되어 있어서…….”
최성호가 두바이 수소 플랜트 전략을 상세히 설명했다.
강우가 볼 때 현시점에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전략이었다. 2년 후에 개발될 기술을 담보로 한 제안이기에 당연히 타 회사보다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2년 후 신기술이 개발되지 않으면 플랜트 전체가 좌초할 위험성이 있다.
“수소와 LNG를 혼용하는 방식은 어떻습니까?”
“그게……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두 연료의 분사 방식에서 차이가 있고 그 경우 효율이 떨어져서…….”
최성호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개발한 적 있나요?”
“있습니다. 다만 그게 문제점이 많아서…….”
“개발 설계도와 개발 이력을 정리한 문서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강우는 실마리를 찾아냈다. 순수한 수소 터빈의 경제적 효율은 수소 연료의 가격에 좌우된다. 수소 연료의 가격문제는 차성중공업의 손을 벗어난 문제다. 그렇기에 훗날 수소 연료 가격이 하락하기를 바라면서 수소 터빈을 개발하는 것은 위험을 덮어놓고 회피한 방법일 뿐이다.
그보다는 수소와 천연가스를 혼합한 연료를 사용할 수 있게 터빈을 개발하는 방식이 월등히 유리했다. 수소와 천연가스 양쪽을 모두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도 효율이 지극히 높다면 훨씬 경쟁력이 있고 실패 위험도 없다.
강우는 관련 자료를 요청했고 차성중공업에서는 순순히 재료를 제공했다.
그 모든 자료를 들고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공장을 떠났다.
그들을 배웅한 공장장과 이하 임직원들은 차도도가 타고 온 모닝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