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92화 (292/325)

제292화 새로운 관계 (1)

모닝을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강우는 기분이 좋았다.

해결 실마리를 잡았으니 이제는 시간을 투입해서 정리하면 된다. 그의 보고서를 차준범이 어떻게 평가할지 알 수 없으나 예전처럼 무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투자 협상을 앞두고 문제의 해결책을 던져주니까. 특히 그의 기술적인 조언을 따르면 앞으로 차성중공업의 행보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는 경영이나 금융이 아닌 과학과 기술로 차성중공업에 보탬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즐거워 보이네? 해결책 찾았어?”

떠날 때부터 눈치를 보던 차도도가 물었다.

“추가로 확인할 문제가 남았는데…… 대충 찾았어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쌤도 감을 잡지 않았어요?”

차도도도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공장을 견학하면서 그녀는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차성중공업에서 어떤 사업을 벌이는지 알고 있었으나 세세한 부분을 알지 못했다. 특히 구체적인 기술 분야는 오늘 처음 접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도 놀랄 만큼 놀라운 이해력을 보였다. 그녀의 질문 하나하나가 사태의 핵심을 찔렀다. 스스로 대견할 정도였다.

물론 그녀가 플랜트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예전의 그녀라면 절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전이었다.

“강우야, 논문을 쓰면서…… 내 능력이 엄청 향상된 것 같아.”

비록 터빈 개발을 연구하진 않았어도 이 문제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된 이유는 과학적인 접근 방식 때문이다. 연구하면서 개발된 능력은 해당 분야 한 곳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앞으로 그녀가 연구하는, 또는 살면서 접하는 모든 분야에서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쌤이 천재라서 그래요.”

차도도가 천재임을 강우는 확신한다. 그의 옆에 있음으로써 그녀도 천재성이 깨어났다.

“강우가 칭찬하니 구름에 선 기분이야. 우리 오늘 어떡하지?”

“우리에겐 세 가지 길이 있어요.”

“뭔데?”

“벌써 시간이 늦었으니까…….”

고속도로 주변이 어둑어둑하다. 이대로 서울까지 올라가면 자정이 넘어 도착할 게 뻔하다.

“첫째는 그냥 서울로 직진한다. 밤이 늦어도 내일은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방안도 있어?”

“둘째는 부근 호텔에서 자고 내일 올라간다. 야간 운전을 피하고 무리하지 않으려면요.”

“셋째는?”

“셋째는 멀리 온 김에 둘이서 놀러 간다. 가는 길에 가볼 만한 관광지가 꽤 있어요.”

강우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그는 어느 것이든 상관없었다.

심각해진 차도도가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말했는데 다시 고민해보니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었다.

“아, 그, 그게…….”

“안 피곤하면 그냥 쭉 서울까지 올라가자.”

아직은 둘만의 진전된 관계가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그래도 앞으로 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많기에 급하지 않다. 이제는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다.

갈등하는 마음이 빤히 그녀의 얼굴에 보였다. 그렇기에 강우도 무리해서 끌고 나갈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데도 쉽지 않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래요. 빨리 서울로 돌아가는 게 좋죠.”

“고마워.”

“아마 결혼하면 자연스러워지겠죠? 결혼을 대략 이 년쯤 후로 생각한다고 하셨죠?”

“응, 그때쯤이면 덜 어색하지 않을까……. 지금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아.”

지금부터 두 사람은 함께 세상과 맞서야 한다. 낯선 미국 유학 생활은 그들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해줄 것이 분명하다.

“어제 아침에 책상에 적힌 제 연구 보셨어요?”

“아, 그거…… 상온핵융합에서 뮤온 입자의 활용 원리와 응용?”

“네, 그거요. 아직 연구 중이긴 한데 그 논문은 상온핵융합을 바꿔놓을 획기적인 논문이 될 거예요. 저자는 저랑 쌤이랑 요셉 교수. 전 이 연구가 인류 문명의 전환점을 앞당겨 향후 노벨상을 타게 할 중요한 논문이 되리라 봐요. 이 논문이 저널에 실리고 나면 결혼할 거예요.”

“그럼 그 논문이 안 나오면 결혼 안 할 거야?”

“논문이 안 실릴 수는 없을걸요?”

자신만만한 강우의 답변에 차도도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논문 빨리 쓰도록 도와야겠네.”

“빨리 결혼하고 싶으세요?”

대답 대신 차도도가 예쁘게 눈을 흘겼다.

강우는 계획이 완벽했다. 절대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차도도가 잘 따라올 수 있도록, 그녀와 모든 영광을 함께 하도록 인생의 여정을 조율하고 있었다.

차도도는 운전 중인 강우를 곁눈질했다. 그를 볼 때마다 적잖게 안심이 된다. 아직 어린 남자인데도 이상하게도 그를 보면 안정감이 있고 의지하고 싶어진다.

차도도는 살짝 몸을 기대면서 중얼거렸다.

“좋다, 지금 이 순간이.”

강우는 속도를 올렸다.

어둠 속을 모닝이 질주했다. 차량이 뜸한 어두운 고속도로가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번잡해지고 밝아졌다.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라면 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다고 다짐했다.

* * *

자정이 넘어 차도도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먼 거리를 이동했고 신경 쓴 일이 많아서 무척 피곤했다. 그런 느낌은 그만이 아니었다. 차도도도 집에 도착할 때쯤 완전히 녹초가 되어있었다.

피곤하니 어떤 생각도 나지 않는다.

차를 빌려서 원룸으로 돌아갈까 고민했으나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강우야, 피곤할 텐데 오늘은 여기에서 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환하게 웃는 강우를 차도도가 작은 주먹으로 두들겼다.

“음흉한 녀석.”

“쌤? 내일 봐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죠?”

“그래, 푹 자. 내일은 별다른 일이 없으니까.”

강우는 차도도를 올려보내고 욕실에서 샤워했다.

적당히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어둠 속에 누워 있자니 새삼 어제 만난 차도도의 부모가 떠올랐다. 비록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으나 부모 된 심정을 이해한다.

이래저래 그는 좋은 사윗감이 아니다. 차도도 부모가 볼 때 그는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을 나이이기에 그녀를 향한 마음을 진심이라고 여기기 힘들 거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편견을 뒤집을 자신이 있다. 그가 달리 천재인가. 훗날에는 그가 최고의 사윗감이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복잡한 심경을 달래며 눈을 감고 있자니 전화벨이 울렸다. 차도도다.

- 강우? 자니?

“자려고요.”

소리를 높이면 들릴 집안에서 전화로 통화하는 것이 두 번째인가. 직접 얼굴을 보며 말할 때보다 전화가 더 감정이 깊어질 때가 있다.

- 뭐하니?

“생각하죠.”

- 무슨 생각?

“그게…….”

- 또 핵융합 연구를 고민하는구나? 아니면 오늘 본 터빈 문제를 고민하든지.

실제로는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보는 그의 이미지는 연구에 미친 사람인가 보다.

- 무리하지 마.

“네, 이제 잘게요.”

- 오늘 고생 많았어. 네 덕분에 모든 게 잘 해결될 것 같아.

“쌤 덕분이죠. 주무세요. 자, 눈 감으시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그러다가 그녀가 뭔가 말한 것 같은데 소리가 낮아서 분명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물으려 할 때 전화가 끊어졌다.

무슨 말이었는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강우야 사랑해.

오늘 밤은 외롭지 않다.

* * *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강우는 차성중공업에서 받아온 자료를 정리했다.

직접 현장에서 보고 느낀 감각을 머릿속에서 차분하게 정리하면서 해결책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의 천재성이 작용한 결과다. 수년 동안에 걸친 연구 개발 노력에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점을 강우는 불과 하루 만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해결책은 단순하다.

수소 터빈은 훌륭해도 원료인 수소의 가격은 의문이다. 외부 요인에 좌우되는 이 단점을 내버려 두어서는 수소 플랜트 사업은 반쪽짜리일 뿐이다.

외부의 위험을 내부로 가져오면 그 위험은 증대하더라도 컨트롤할 수 있는 요소로 바뀐다.

제어할 수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고 위험 요인을 흡수할 수 있다.

“남에게 목을 맡길 수는 없지.”

강우의 방식이다.

자신이 주관하는, 또는 관여하는 문제점은 어떻게든 노력해서 해결하면 되니까.

그렇게 강우는 수소 터빈을 LNG와 수소의 혼용으로 바꾸었다. 물론 이것이 다른 터빈임을 안다. 일전에 개발된 적도 있었고.

다만 강우가 추구하는 방식은 이전과 다르다. 차이점이라면 예전에는 LNG 중심에서 수소를 섞으려 했다면 강우는 수소 기반에서 LNG를 넣을 고민을 했다는 점이다. 이 작은 접근 방식의 차이가 커다란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게 했다.

혼용으로 바꾸더라도 수소 터빈에서의 성능 저하는 극히 제한적이며 장점이 훨씬 커졌다. 터빈의 과학적인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한 그만이 내릴 수 있는 문제해결 방식이었다.

여기에 기존 터빈의 효율을 개선했다. 이는 차성중공업 터빈사업부 전체에 강력한 무기를 제공할 것이다.

타닥- 타닥-

차도도의 피씨를 이용해서 아이디어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강우야? 아침부터 뭐해?”

차도도가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그 접시엔 갓구운 식빵과 잼이 놓여 있었다.

“빨리 정리해서 보내야죠.”

“문제점 해결했어?”

“네.”

차도도의 시선이 모니터를 쭉 훑었다.

“어제 말한 대로네. 나도 이런 식의 접근이 안정성을 획기적으로 높인다고 생각해.”

2년 후까지 개발될지 알 수 없는 기술에 목을 매는 것보다 현재 실현 가능한 기술이 거의 같은 성능을 낸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특히 강우가 보완한 단점은 기존 터빈의 기술력을 한층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비법이기도 하다.

강우의 앞에 접시가 놓였다.

“지금 내가 요리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미안해.”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대요?”

“그럼 다행이고.”

“쌤이 주는 건 뭐든지 맛있어요.”

강우는 식빵을 잘라 입에 넣으면서도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들겼다.

“언제 끝날 것 같아?”

“오늘 저녁쯤요?”

“언제까지 준다고 했었지?”

“글쎄요, 빨리 해결책을 보낸다고만…….”

차도도는 강우의 집중력에 감탄했다. 의외로 그는 저돌적인 면이 있다. 과학을 향한 신념과 그녀를 향한 욕망까지…….

아버지의 두바이 출국은 아직 여유가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맞추었으니 목적을 완수했다. 이 해결 보고서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보탬이 될지 모르나 이로 인해 아버지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랐다.

강우를 보는 시각과 과학을 대하는 견해가.

그렇더라도 그녀의 유학을 허락하진 않겠지. 이젠 허락하지 않더라도 떠날 자신감이 생겼다. 강우가 함께 떠나니까. 이제는 가문의 한 구성원으로서가 아닌 그녀 자신을 위해 살아갈 생각이다.

키보드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식빵을 열심히 먹으면서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강우가 멋있게 보였다.

‘무엇이든 몰두하는 사람이 천재지…….’

집중하는 강우는 멋있다.

강우를 향해 눈을 반짝이는 그녀는 이미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기에 올라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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