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93화 (293/325)

제293화 새로운 관계 (2)

차성그룹 회장 차준범은 최성호 차성중공업 기술연구 이사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이 방안은 어떤가?”

차준범이 내민 보고서는 두바이 수서 플랜트 투자 사업의 기술적인 문제점 해결 방안이 담겨 있었다.

최성호는 저 보고서를 누가 작성했는지 안다. 바로 며칠 전 차성중공업을 방문한 회장의 영애가 주인공이다.

‘모닝을 타고 와서 아무도 몰라봤던, 투어 중에 날카로운 질문을 연신 퍼부었던, 특유의 미모로 모든 사원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짧은 시간이었으나 차도도의 방문은 차성중공업에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게…….”

“읽어보기는 했나?”

“예! 기술진 모두가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보고서 평가는?”

최성호는 차준범의 눈치를 살폈다. 부하 직원이라면 그룹 총수의 심기를 읽고 그에 맞는 답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 일은 무려 회장의 딸이 엮인 문제 아닌가.

그는 차준범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발견했다. 회장이 원하는 답은 명확했다.

“놀라웠습니다. 보고서의 지적과 해결법은 현재 기술 수준에 바탕을 둔 방법이고 실현 가능성이 무려 90%가 넘습니다. 이 해법을 바탕으로 진행한다면 적어도 차성중공업의 기술력을 5년은 당길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5년이나?”

“그렇습니다.”

회장의 딸이 제시한 방법이라 부풀린 의견이 아니었다.

사실 회장 직계가 기술적인 문제를 알아봐야 얼마나 알까. 보고서 검토를 요청받고도 큰 기대를 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견해는 불과 몇 페이지 만에 바뀌었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이 분야에서 수십 년을 매진한 전문가가 진단했다고 착각할 만큼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접근 방식을 조금 비틀었을 뿐인데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더군.”

“이 보고서를 낸 사람은 천재입니다.”

“자네…… 아부가 심하군.”

나무라면서도 차준범의 표정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저, 회장님?”

“왜 그러나?”

“영애를 그룹 기술담당 주역으로 키우시면…… 앞으로 차성그룹의 미래가 더욱 굳건해질 겁니다.”

“그 정도인가?”

“기술적인 감각이 대단합니다. 문제에 접근하는 과학지식과 해결하는 통찰력도요. 인재를 내버려 두시면 안 됩니다.”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은 아니었다. 최성호는 정말 차도도에게서 그런 직감을 받았다. 그녀가 그룹에 관여해서 지휘한다면 기술력에서 타 업체에 절대 밀리지 않을 거라고.

“그럼 두바이 투자 건은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수정하면 되겠나?”

“그렇습니다.”

“그만 가보게.”

홀로 남은 차준범은 차도도와 함께 왔던 어린 고등학생을 떠올렸다. 키가 크고 잘생긴 학생이다. 얼핏 보기에는 그리 똑똑한 인상은 아니었는데…….

그 녀석을 처음 본 순간 정말 황당했던 마음이 떠올랐다.

어떻게 저런 녀석에게 그의 딸이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지. 그것도 학교에서 담임을 맡고서 가르치는 제자와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해결 보고서를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천재라고. 이런 사람이라면 무조건 그룹에 스카우트해서 길러야 한다.

문제해결 보고서를 그 녀석이 작성했는지 아니면 딸이 작성했는지 불분명해도 어찌 되었든 둘 가운데 한 사람은 천재다.

“아니면 두 사람 모두 천재일 수도 있고…….”

이번 사건은 차준범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그는 지금까지 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었다. 어릴 때부터 이과 쪽을 고집했던 딸을 그룹의 미래와 연관 지어 문과 쪽으로 진로를 잡도록 고집했었다. 그랬기에 딸이 과학적인 재능을 얼마나 품고 있는지 관심 없었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그룹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물론 그도 틈만 나면 과학기술 개발을 외쳤고 그룹의 운명은 기술개발에 좌우된다고 역설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 내면에서는 떨어지는 기술은 외부에서 사들이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기술개발에 들이는 돈이라면 유사한 기술을 충분히 사 올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차성그룹이 세계 일류가 아닌 국내 일류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도가 물건이란 건가, 아니면 그 자식이 물건이라는 건가…….”

어쨌든 지금은 차도도가 천재라고 믿기로 했다. 자식이 뛰어나다는데 싫어할 부모는 없다.

흐뭇한 마음으로 차도도의 얼굴을 떠올리던 그는 정 실장을 불렀다.

“도도가 제시한 보고서를 참고해서 투자 협상 전략안을 다시 만들어와.”

강우가 차성그룹에 처음으로 영향을 미친 순간이었다.

* * *

고려 과학고 물리 실험실이 떠들썩했다.

방학 중인데도 학생들이 나와서 모인 곳은 이곳뿐이다.

평소 고곽천재의 연구실이었던 이 실험실에는 오늘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중에 가장 튀는 녀석이라면…….

“네가 여기서 왜 나와?”

“학교에서 쫓겨났니?”

“언제 다시 돌아가는데?”

모두의 시선이 한 녀석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바로 권유성이다.

MIT에 입학해서 일 년을 다닌 권유성이 여름방학을 맞아 국내로 다시 들어왔다. 지금 고곽천재는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이기에 이 만남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못 올 곳 왔어? 나도 여기 졸업생인데!”

“그렇긴 한데 학교는 어떡하고?”

“나도 방학을 챙겨야지. 이것들이 선배 알기를 뭐처럼 안다니까. 내가 고등학교 선배, 대학교 선배! 후배님들! 선배 잘 모셔야지, 응?”

권유성의 말에 모두 콧방귀를 뀌었다.

나이가 한 살 어린데 실상은 일 년 선배다. 고곽천재와 권유성의 이런 꼬임은 결국 대학에서도 이어지게 됐다.

“알았어, 유성아.”

윤수아가 웃으며 달랬고 권유성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특히 너! 지금까지 한 번도 선배 대접 안 했지?”

권유성의 손가락이 강우를 가리켰다.

당연히 강우도 날 선 반박을 퍼부었다.

“이게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고서는!”

“선배라고도 안 했으면서!”

“넌 아직 미성년자잖아?”

“뭔 소리야, 미국에선 성년으로 친다고!”

다시 두 사람의 설전이 벌어지자 윤수아와 손차희가 두 손을 들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언제 건너가는데?”

지금 고곽천재는 출국일정이 초유의 관심사다. 모두 함께 떠나지 못하고 각자 사정이 있어서 이래저래 나뉘었다.

“이틀 뒤.”

권유성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틀 뒤면 수아랑 같은 날?”

“같은 비행기.”

권유성과 윤수아가 서로 죽이 맞았다.

윤수아 혼자보다 현지 사정과 지리에 익숙한 권유성을 동반하면 한결 안심이다.

“흐음, 이거 수상쩍은데?”

손차희가 두 사람을 묘한 눈으로 의심했으나 정작 강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저 둘은 3년 내내 누나 동생 하면서 어울린 사이인데 그 관계가 절대 발전할 리 없다. 그것도 헤어져 있던 기간이 무려 1년인데.

어쨌든 강우는 권유성이 MIT를 일 년 먼저 경험했으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거기 애들은 좀 이상해. 엉뚱하다고 해야 하나? 뭐…… 천재가 엉뚱한 건 당연한가…….”

“내가 보기에는 네가 더 엉뚱해.”

윤수아가 바로 핀잔을 줬다.

강우가 보기에 권유성은 MIT에서 같은 부류의 천재와 어울리면서 천재 기질이 더 뚜렷해진 듯했다.

“걔들은 공부도 이상하게 하더라고. 공부는 평소에 해야지, 시험이 닥치면 날 밤을 새워. 게다가 이성 친구는 왜 그리 많은지 맨날 갈아치우는 녀석들이 숱하게 많아. 나한테도 사귀자고 찝쩍대는 여자가…….”

윤수아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순간 실수를 감지한 권유성이 얼른 손을 저었다.

“……물론 나는 거절하긴 했어.”

“네가 거절할 녀석이야?”

손차희가 바로 핀잔을 줬고 권유성은 순식간에 카사노바와 동급이 됐다.

권유성의 MIT 일 년 체험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고곽천재도 곧 맞이하게 될 일상이었기에 그들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어쨌든 저 녀석을 미국에 가서도 계속 보게 된다니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짐은 다 챙겼어?”

“일부는 이미 보냈고 나머지는 처리하고 있고, 그래서 요즘 당근하느라 정신없어.”

권유성의 물음에 윤수아가 투덜댔다.

손차희는 혼자서 미국으로 건너간다. 반면 윤수아는 어머니와 함께다. 아버지와 오빠가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수아는 정리할 게 많아 요즘 중고시장에 물건을 내놓고 팔고 있다고 했다.

강우도 자신의 상황을 점검했다. 그도 지금 묵고 있는 원룸을 정리해야 한다. 잠시 불어났던 세간살이를 모두 없애고 일부는 차도도의 아파트로 옮길 예정이다.

차도도는 아파트를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전세라도 주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돈이 필요하지 않은 데다 가끔 한국으로 돌아오면 묵을 장소가 필요하니 남겨두려 한다나.

어쨌든 강우만 정리하면 준비가 끝난다.

최대우는 서울에 별다른 짐이 없기에 몸만 떠나면 된다. 모든 건 현지에서 조달하겠다는 전략이다.

잡담을 나누고 있자니 익숙한 녀석이 들어왔다.

“넌 또 왜 왔어?”

“어이, 브라더! 씨스더! 차희 만나러 왔지.”

고현성이다.

이 녀석은 대학에 가더니 멋쟁이로 변했다. 입은 옷의 패션 감각이 남다르다.

고현성이 손차희에게 손짓하자 손차희는 바로 콧방귀로 응수했다.

“의대면 열심히 공부해야지?”

“예과는 더 많이 놀거든!”

이래저래 소문으로는 고현성은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손차희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물론 손차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리 마누라 미국 간다는데 배웅해야지.”

“누가 마누라야? 너 죽고 싶어?”

곧바로 손차희가 날 선 목소리로 반박했다.

“우리 썸 타는 사이인데?”

“썸은 무슨! 난 너랑 썸 탄 적 없거든!”

여전히 고현성의 일방통행인가 보다.

의대에 들어가서 부인을 편하게 해주겠다는 고현성의 꿈이 과연 달성 가능할지 모르겠다.

“혹시 미국까지 따라갈 거야?”

강우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고현성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가고 싶은데 내가 가면 미래의 우리 부인을 누가 먹여 살려? 그러니 난 갈 수가 없지.”

“이산가족이네.”

“눈물이 앞을 가리지.”

“너! 얼른 안 꺼져?”

손차희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찔끔한 고현성이 눈치를 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가우스 카페에서 기다릴까?”

“기다리든 말든!”

“알았어. 거기 있을게.”

고현성이 돌아서면서 모두에게 인사했다.

“브라더! 씨스더! 내년 여름에 다시 한국 들어오면 연락해!”

떠나는 고현성의 입술이 헤벌쭉 벌어져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손차희가 가우스 카페로 고현성을 만나러 가리란 예감이 들었다.

강우는 고곽천재 친구들을 한 명씩 눈에 담았다.

이들과는 3년의 추억이 이곳에 남아 있다. 모두 같은 대학으로 진학하니 향후 4년의 세월 또한 함께한다.

윤수아는 이틀 후에 출국하고 손차희는 3일 후에 최대우와 함께다.

그리고 그는…… 차도도와 함께 일주일 후다.

차도도가 늦어지는 이유는 고려 과학고 교직을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는 1학년 담임을 맡고 있어서 첫 개학일에 반 학생들에게 마무리 인사를 하고 떠나겠다고 고집했다.

당연히 강우도 동의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이 고려 과학고는 누가 지킬까.

훌륭한 후배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메울 것이다. 인생이란 세상일이란 그런 거니까.

지금은 고곽천재와 함께 꾸며갈 미래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고등학교보다 자유로운 대학교에서 고곽천재와 함께 과학에서 사고를 쳐봐야겠다. 그들이 있기에 강우의 미국행은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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