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94화 (294/325)

제294화 새로운 관계 (3)

그 시각 차도도는 신새벽과 상담실에 있었다.

차도도는 물리 실험실에서 강우와 함께 있고 싶었으나 다른 학생들 때문에 실험실 출입을 자제했다. 방학 중 그녀가 있을 곳은 이곳 B동 상담실이 적합했다.

출국이 임박해서 급히 할 일을 마무리 지었다.

바쁜 와중에도 강우가 장담했던 새로운 논문을 미리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논문 주제가 앞으로 일 년간 강우의 최대 관심사가 분명하기에, 그녀 또한 그 연구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하기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그렇게 관련 논문을 찾아 뒤적이고 있자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신새벽의 표정이 묘했다.

“할 말 있어?”

“혹시…… 강우를 부모님께 소개했니?”

역시 신새벽의 촉이 대단히 좋다고 감탄하면서 차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강우 어머니 만났고?”

마찬가지로 차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빠르네.”

“곧 떠나야 하니까.”

출국 날짜를 따져보면 정상이다. 겉으로야 제자 여러 명과 유학을 떠나는 모양새여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에 양쪽 부모에게 인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결과는 어땠어?”

신새벽의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그 관심에 부담이 가중되었으나 결국은 알게 될 일이라 숨길 생각은 없었다.

“쉽게 허락이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강우 어머님은 나를 무척 반겼거든?”

차도도는 반박하듯 대답했다.

“그렇겠지. 그때 졸업식 때 뵀을 때 강우 어머니께선 우리를 무척 좋아하셨으니까. 단지 학교 선생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며느리로도 받아들일 분위기였으니까.”

그건 신새벽이 아니라 그녀를 보고 나온 반응이었다고 정정해주려다가 차도도는 말을 삼켰다. 괜히 신새벽과 말다툼을 벌이기 부담스러워서였다.

“너희 집은 어땠어? 어린 남자가 나타났으니 허락이 쉽지 않았을걸?”

상황을 꿰뚫어 보는 질문에 차도도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도 결과를 알지 못했다.

차성중공업에 다녀온 이후 강우와 함께 보고서를 작성해서 아버지에게 넘겼다. 그 이후로는 소식이 없다. 두 사람의 사귐을 허락한 건지 또 그녀의 미국 유학을 허락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출국 날짜가 하루씩 다가오니 더욱 피가 마른다.

편치 않은 그녀의 표정을 꿰뚫어 본 것일까.

“쉽지 않나 보네. 하긴 아직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어린 남자를 부모가 좋아할 리 없지.”

“네가 걱정할 일 아니야.”

“넌 걱정 안 해. 강우를 걱정하는 거야. 강우는 아직 어리잖아? 특히 이성과 만남에선 어린애나 마찬가지고. 자칫 갈라서면 마음의 상처가 클 거야.”

“그걸 왜 네가 걱정해?”

“우리 교수님이잖아? 난 강우 없으면 MIT에서 버틸 자신이 없어.”

신새벽의 걱정을 이해한다.

물론 차도도는 신새벽의 걱정이 단지 저 문제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새벽은 그녀와 강우가 사귄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런 신새벽의 감정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우려되었다.

어쨌든 신새벽에게 강우는 무척 중요한 존재임을 그녀도 인정해야 한다. 반대로 강우에게 신새벽도 중요한 연구 동료다.

“강우가 흔들릴 일은 없을 거야.”

차도도는 확신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이 흔들림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그녀와 강우의 사랑, 다른 하나는 천재로서 강우의 능력. 이 둘은 강우와 그녀를 지탱해 줄 견고한 기둥이다.

“그걸 알면 얼른 집에서 허락받아. 강우 방황하게 하지 말고.”

신새벽이 충고하듯 말했다.

허락하지 않더라도 함께 유학을 떠나겠지만 강우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면에서 신새벽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차도도는 내심 다짐하면서 신새벽에게 선을 그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너야말로 이대로 유학 다녀오면 결혼하기에 나이가 너무 많아.”

“얼마 안 돼. 요즘 늦게 결혼하는 여자도 많고. 여차하면 혼자 살아도 되고.”

골드미스가 괜히 있는 말은 아니다.

차도도는 내심 연민을 느꼈다. 강우의 천재성을 실감했으니 앞으로 어떤 남자가 눈에 들어올까. 따지고 보면 신새벽은 강우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했다.

“늦지 않게 잘 판단해.”

더는 해줄 말이 없어서 차도도는 그쯤에서 입을 닫았다.

책을 뒤적이던 신새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잠시 바람 쐬고 올게.”

차도도는 만류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정을 익히 짐작해서다. 어찌 되었든 이래저래 정리되어 가나 보다.

* * *

강우는 신새벽의 톡을 받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신새벽이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여름인데도 제법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쌤?”

돌아보는 신새벽의 안면에 어설픈 미소가 어려 있다.

최근 들어 신새벽과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방학이기도 했고 유학 준비로 서로 바쁘기도 하고.

차도도를 MIT에 데려가려고 헌팅턴사와 꾸민 계략에 신새벽이 적극적으로 동참해준 이후 미처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때 신새벽이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우는 이모티콘을 보냈었다. 그게 진짜 그녀의 마음인지 알 수 없으나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을 거다.

비록 그동안 그는 신새벽보다 차도도를 항상 우선시했고 신새벽도 이를 눈치챘었다. 그래도 차도도와의 결혼까지 연상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본의 아니게 신새벽에게 폐를 끼쳤고 또 그녀를 차버린 모양새가 되어서 강우는 미안한 감정이 많았다.

“어쩐 일이세요?”

“이제 여기를 떠나면…… 못 볼 풍경이잖아? 그래서 눈에 담고 있었지.”

신새벽이 운동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강우도 옆에 나란히 앉아 교정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동안의 추억이 새삼 떠올랐다.

“전 운동장을 보면 고중전이 떠올라요. 1학년 때 경험했던.”

“그날 네가 OX 퀴즈와 특별 퀴즈를 휩쓸었지.”

“쌤도 기억하시네요.”

“난 너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다 기억해.”

새삼 신새벽의 마음이 깊다고 느꼈다.

“앞으로도 MIT에서 같이 있을 거잖아요?”

“그래도 만나기 쉽지 않을 거야.”

MIT 교정이 한국의 대학교보다 넓고 강우는 물리학과인데 신새벽은 화학과다. 게다가 그는 학부생이고 신새벽은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예상보다 큰 강이 가로막고 있다.

신새벽이 화제를 돌렸다.

“도도와 잘 되어 간다더라?”

“잘 되고 말고 할 게 있나요. 그래서 양쪽 집안 부모님도 찾아뵈었어요.”

“그 말은 들었어. 그래도 쉽진 않았겠지.”

“네.”

신새벽이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해주는 분위기라 강우는 마음의 부담을 한결 덜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도도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니까. 마음먹었으면 계속 밀고 나갈 사람이니까. 설사 집안에서 반대하더라도 도도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거야.”

강우도 그렇게 생각한다. 차도도의 평가는 누구의 눈이든 비슷한가 보다.

“반대하더라도 결혼해. 미국 가면 적당히 눈치 보면서 때를 잡아.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으면 부모가 반대해봤자지. 그렇지 않니?”

강우는 대답할 수 없었으나 입에선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도도가 부러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강우는 쉽게 맞장구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쌤이 석사과정 논문 쓰실 때 제가 끝까지 돕겠다고 했잖아요? 박사과정 때도 제가 끝까지 도울게요. 쌤은 저만 믿으시면 돼요.”

지금 이 말이 신새벽에게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지 강우도 안다.

그녀는 그가 MIT로 간다고 하자 엉겁결에 따라온 거니까. 물론 그녀의 능력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혼자서도 MIT에서 살아남을 충분한 재능이 있다. 3년간 그녀를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확실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를 연구 동료로 점찍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가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차도도와 달리 신새벽은 그에게 영원한 선생님으로 남아야 한다.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다시 질문이 들어왔다.

“그래서 도도와는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어?”

“연구하는 거요?”

“그거 말고. 키스는 했어?”

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어휴, 완전 숙맥 커플이라…… 여태껏 대체 뭐한 거야?”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저 말에 얼마나 많은 고충이 숨어 있는지 신새벽도 안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하루아침에 연인 사이로 바꾸려니 그게 어디 쉬울까.

“내가 기회를 만들어줄까? 무인도에 둘만 딱 가두면…….”

찌뿌둥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신새벽의 들뜬 목소리가 금방 가라앉았다.

“그래, 서로 아껴주는 것도 좋아. 강우야, 난 네 편이니까…… 네가 도도와 잘 되기를 바라. 항상 옆에서 응원할게.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해. 예전처럼 내가 해결할 다리를 놓아줄 테니까.”

차도도와의 사이에 신새벽의 역할도 컸다. 강우도 가끔 그녀를 이용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녀의 말이 더 가슴 아프다.

“쌤도 좋은 남자를 찾아보세요.”

“그래, 내 짝도 어디엔가 있을 거야.”

상심한 신새벽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았다.

강우는 지금까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죄송해요.”

“끼지 않더라도 네가 갖고 있으렴.”

신새벽이 받기를 거부했다. 얼핏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힌 듯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다시 운동장으로 시선을 향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둘의 관계는 이 운동장에 묻어야 한다.

미래를 새로 시작해야 하기에.

강우는 두 사람이 영원히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좋은 관계로 남기를 기원했다.

그는 신새벽도 두 사람이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고 믿었다.

* * *

조금 더 쉬다가 들어가겠다는 신새벽을 홀로 내버려 두고 강우는 가우스 카페로 향했다.

나온 김에 빙수를 사서 실험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정문을 나가는 도중에 전화가 왔다.

휴대폰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가슴이 섬찟했다. 마도환이다.

강우는 딱딱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강우입니다.”

- 마도환이다. 곧 한국을 떠난다는 소문이 들리더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그만 마도환을 신경 쓰는 줄 알았더니 마도환 역시 그를 주시하고 있었던가.

“유학 가기로 했습니다.”

- 잘 결정했어. 한국대로 오는 것보다야 낫겠지.

한국대 물리학과로 갔다면 두고두고 괴롭힘을 받았겠지. 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 국내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야. 자네에겐 외국이 더 잘 맞을 거야.

저 말속에 숨은 교묘한 속뜻을 안다. 다른 학교 물리학과로 입학했더라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으리란 경고로 받아들였다.

- 그날 국책 연구과제 심사에서 네가 친 깽판도 잘 구경했고. 나랑 전생에 원수진 일이 있나?

입안까지 올라온, 당연히 있다는 대답을 간신히 삼켰다. 이 녀석도 제법 눈치가 있네. 그렇더라도 손강우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임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지.

- 대답을 회피하는군. 이번에 도도랑 같이 간다지?

차도도가 유학 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대충 김윤택에게서 정보를 들었으리란 짐작이 갔다.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함부로 부를 이름이 아닐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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