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화 새로운 관계 (4)
- 크흠, 내가 생각해봤어. 자네가 왜 나를 싫어하는지. 짚이는 거라곤 도도밖에 없더군.
마도환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사실 강우는 마도환의 저런 태도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먼저 전화를 걸어 시비를 거는 것이야말로 녀석이 당황했다는 증거니까. 하지만 차도도의 이름을 마구 부르는 태도에는 화가 치밀었다.
- 도도랑 사귀나 보지? 도도만 나오면 나를 막아서더니 이젠 함께 유학까지 가다니.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강우는 바로 반박에 나섰다.
“흥, 이제 알았어? 쌤이 넌 싫다고 하더군. 너보다는 내가 백배는 더 좋다고 하더라.”
강우의 말투에도 존댓말이 사라졌다.
이제는 서로 존중하지 않는 적일 뿐이다.
- 좋아, 독기가 올랐어! 두 사람 사이는…… 예전부터 짐작했었지. 그날 맞선 자리에 등장한 너를 보고 말이야.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어.
“그래서?”
- 흐흐, 그날 재미 좀 봤나 본데? 술 취한 여선생과 고등학생 제자라…….
“개 눈에는 개만 보이겠지.”
한동안 비웃음을 마구 터트리던 마도환이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 어쨌든 좋아. 1라운드는 내가 패했다고 인정해주지. 그런데 앞으로는 어떨까?
“뭔 소리야?”
- 잘 생각해봐. 네 녀석이, 또는 차도도가 국내에서 학교에 다니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게 외국 나가서 물 좀 먹고 온다고 달라지지 않거든?
강우는 마도환의 경고를 알아챘다.
국내 학계를 꽉 잡은 마도환이다. 그 영향력은 그와 차도도가 학위를 마치고 국내에 들어올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도환의 위협은 그때도 계속될 것이다.
-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쯤 후에는 차도도가 박사학위를 따고 국내에 들어와 대학교수 자리를 구하겠지? 자네는 조금 더 걸리겠지. 어쨌든 마찬가지 아닐까? 과연 그때 적절한 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내 장담하지! 너희 두 사람이 내게 무릎을 꿇지 않는 이상 국내에서는 실업자가 될 거야.
마도환이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실제로 녀석의 영향력이라면 불가능하지도 않다.
- 크크크, 고생해서 외국에서 학위를 따왔는데 갈 곳이 없어. 그보다 더 처량한 일은 없겠지.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넌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지?”
강우도 비웃음을 날렸다.
- 기백이 좋군. 역시 아직 사회 물정을 모르는 한심한 녀석다워.
비록 오늘 마도환의 경고에도 강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먼 훗날이 되면 과연 무게추가 어디로 기울어질까.
지금 마도환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크다 해도 그가 학위를 받고 나면 상황은 반전될 것이다. 그가 꿈꾸는 미래에서 강우는 그 누구보다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므로.
“좋아, 그날을 기대해. 내가 다시 국내로 돌아오는 날, 네 녀석이 설 자리는 없을 테니까.”
- 흐흐, 기대하지. 네 녀석과 차도도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 날을 말이야.
“좋아, 두고 보자고! 넌 잘못한 게 많아서 잠도 안 올 거다!”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손강우의 복수를 해야 한다. 그때 몇 배로 갚아줄 생각이다.
강우는 카페에서 빙수를 추가했다. 이런 날은 시원한 빙수로 화를 풀어야 한다.
고곽천재의 빙수와 차도도, 신새벽의 몫까지 왕창 사서 강우는 학교로 들어갔다.
* * *
현 물리학계에서 강우가 교류한 유일한 사람이라면 카이스트 교수인 한태규가 있다.
KTX에서 만난 인연이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한태규는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었다. 그렇기에 강우는 국내 생활을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한태규에게 안부 인사를 전했다.
그 인사는 조금 특이했다.
예전에 프로젝트를 하면서 KTX 논문을 썼고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때때로 생각날 때마다 추가로 연구했다. 그렇다 보니 고속전철과 관련하여 연구 결과가 조금 더 남아 있었다.
이를 묶으니 훌륭한 한 편의 논문이 만들어졌다.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교정을 보고 다듬은 다음 이 연구 결과를 한태규에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첨부해서 보냈다.
한태규라면 이 논문을 재가공해서 적절한 저널에 실어줄 것이다.
메일을 보내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한태규에게서 연락이 왔다.
- 강우 군?
“교수님 안녕하세요.”
- 논문 잘 받았네. 놀라워. 바쁜 와중에 이렇게 결과를 내주다니.
“예전에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미뤄두었던 겁니다. 최근에 다시 정리했어요. 저널에 발표할 수준은 될 거예요.”
- 훌륭하더군. 내가 적당한 곳에 제출하겠네. 자네 덕분에 나도 논문 실적을 하나 더 올리게 되었어. 고맙네.
한태규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얼마 전 마도환의 전화를 받았을 때와는 기분이 정반대다.
- 유학을 간다고 했지?
“예, 차도도 선생님과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 자네도, 차 선생님도 대단한 인재이니까 큰 성과를 얻어서 돌아올 거네. 축하해.
이런저런 축하 인사를 건네던 한태규가 화제를 바꿨다.
- 혹시 마도환 교수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나?
“왔었습니다. 협박하더군요.”
- 그럴 줄 알았어. 얼마 전에 자네 때문에 국책 연구과제에서 떨어졌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마도환이라면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 봤는데 역시 속이 좁은 사람이었어.
그런 마도환을 제대로 꿰뚫고 있는 한태규도 역시 대단했다. 강우는 물리학계에서 그와 같은 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웠다.
- 그래, 뭐라고 하던가?
“학위 마치고 국내에 돌아오면 자리가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저도, 차 선생님도요.”
- 그 사람 학계 영향력이 상당해서 원래 갑질이 심해. 물론 그런 말을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긴 한데 그렇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네.
“알고 있습니다.”
- 한국대에 자리가 없으면 카이스트에는 자리가 있으니까. 자네나 차도도 선생님이라면 충분히 교수로 임용될 자격이 있다고 난 생각하네.
“감사합니다.”
한태규의 응원을 받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오늘 한태규가 전화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를 안심시키고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다. 한태규는 학자로서도 선배로서도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그의 선택과 미래를 응원한다는 격려를 들은 후 앞으로 자주 안부를 전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태규는 훗날 그가 돌아왔을 때 그의 편이 되어줄 첫 번째 동료다.
그때쯤이면 지금보다 더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을 테니 큰 도움을 줄 인물이다.
* * *
찰스 레온 MIT 대학 총장은 신학기 신입생 명단과 입학 사정 결과를 검토하고 있었다.
치킨집 주인처럼 하얀 수염의 부드러운 인상을 뽐내는 노년의 레온 총장은 미시건대 대학원에서 신경과학을 전공하고 교육 엔지니어링에 뛰어든 인물로 미국 행정부에서 과학기술 자문위원을 맡은 교육행정가였다.
MIT 총장에 부임한 후 기부금 순위가 대폭 상승했고 연구 관련 지원금과 산학협력 지원금도 늘어나 안팎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신입생 모집 결과를 찬찬히 살피던 레온 총장이 맞은 편에 앉은 팀 울프 입학처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울프 처장은 학생 선발 시스템을 혁신해서 레온 총장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다.
“올해 특이사항이 있습니까?”
“작년 대비 질적인 평가 기준을 늘렸습니다. 덕분에 우수한 학생을 대거 유치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입학 사정은 양적 지표 평가와 질적 지표 평가로 나뉜다. 고교 내신과 SAT 성적 등 학문적 성취도가 중요 양적 지표다. MIT는 양적 지표로 먼저 선발한 후 질적 지표 평가로 넘어간다. 에세이, 인터뷰, 교사 추천서, 학교 외 활동이 중요 질적 지표다.
물론 상이한 국가적 배경과 경제적 문화적 특성을 고려해서 학생을 선발한다.
울프 처장의 교육 신념을 잘 알고 인정하기에 레온 총장은 쉽게 수긍했다.
결과 보고서를 쭉 읽어내려가던 레온 총장의 눈에 특이점이 보였다.
“올해는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이 많군요?”
“모두 대단히 우수한 학생입니다.”
“올림피아드 수상자인가 보죠?”
“그렇습니다.”
레온 총장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과학 올림피아드 수상이 우수한 학생의 지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의문표가 붙기도 했다. 특히 극동지방 학생의 경우에는 다른 지역과 같이 취급할 수 없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사교육으로 중무장해서 학생 본연의 재능과 달리 과다포장된 학생이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학생은 입학 후 오래지 않아 능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학업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게다가 최근 들어 중국계 학생 수가 늘었다는 불평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과 한국은 다른 나라인데도 겉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우니 같이 취급당하기도 한다.
레온 총장의 심기를 읽은 울프 처장이 급히 손을 저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릅니다.”
“어떤 점이요?”
“학생들이 올림피아드 수상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연구 논문 실적을 갖췄습니다.”
레온 총장의 미간 사이 주름이 더 구겨졌다.
“논문 실적은…… 명목상 이름만 추가하는 경우가 많아 실질적인 지표로 보기 어려울 텐데요?”
“그게…… 올해 한국 학생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왜 그렇죠?”
“논문 주저자가 우리 학교 교수거든요. 프리드 요셉이라고 물리학의 대가가 있습니다.”
“아! 요셉 교수라면 저도 알지요.”
요셉 교수는 물리학과 원자력공학에서 큰 실적을 거둔 주요 석학이다.
레온 총장이 다시 한국 학생 명단과 세부 내용을 확인했다.
울프 처장이 입학 사정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
“저도 요셉 교수에게 확인해봤습니다. 그 학생들의 능력과 재능이 어떤지. 요셉 교수가 칭찬에 칭찬을 반복하더군요. 특히 거기에…… 논문 실적이 5편이나 되는 학생 있잖습니까?”
“……우 강?”
“네, 그 학생 말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천재라고 했습니다. 그 학생으로 인해 우리 MIT가 향후 명성을 얻으리라고 장담하더군요. 요셉 교수가 그렇게 학생을 칭찬하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허허,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라도 된다는 말 같군요.”
레온 총장은 헛웃음을 들이켜며 평소의 요셉을 떠올렸다. 학문적으로 깐깐하고 칭찬에 인색한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다. 그간 MIT를 졸업한 훌륭한 학생이 많았으나 요셉의 마음에 들었던 학생은 없었다. 그런 요셉이 그렇게 칭찬할 정도라면 보통이 아닌 학생이 분명하다.
“다른 학생들에 대한 평가도 대단히 좋았습니다. 그 바람에 한국 학생들이 대거 입학하게 된 것이지요.”
“요셉 교수는 학생을 보는 눈이 특히 뛰어나니 믿을만하지요. 요셉 교수의 장담대로 학교를 빛낼 학생들이 대거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은 학생의 면면을 다시 확인했다.
같은 고등학교라는 문제점이 있으나 학생들 자격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정말 고등학생이 맞는지 의문이 될 정도다. 게다가 어떤 학생은 MIT가 자랑하는 슈퍼컴퓨터로 연구했다.
그 비용을 요셉 교수가 모두 지불했다니 서쪽에서 해가 뜰 일이다.
해마다 부푼 마음을 품고 입학하는 신입생처럼 학교 관계자도 부푼 미래를 그리며 학생을 뽑는다. 대개는 평범했다. 그런데 올해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온다.
그들은 올해의 신입생들이 과학기술 연구 개발에서 첨단을 달리고 있는 MIT의 위상을 한층 높여주기를 기대했다.
“요셉이 장담하니 저도 확신합니다! 총장님도 한번 지켜보시죠.”
입학처장의 자신감 넘치는 설득에 레온 총장은 기대감을 높였다.
레온 총장은 지금 주시한 인물이 불과 몇 년 후에 과학기술계에서 파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