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97화 (297/325)

제297화 마지막 수업 (2)

장내가 숙연해졌다.

“전설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천재도 강우 형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입니다.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수학과 물리 두 분야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유일한 천재이자 헌팅턴으로부터 무려 120만 달러나 되는 연구비를 받아낸 학생이죠. 강우 형이 졸업 때까지 쓴 논문은 국제 저널에 실린 것만도 무수히 많습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달성했죠.”

학생들은 강우의 생활과 업적을 하은찬을 통해 알게 됐다. 학생들은 그처럼 뛰어난 선배를 봤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부풀었다.

“강우 형이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전 도무지 가늠이 안 됩니다. 그 형이 앞으로 성취하는 업적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도 큰 응원이자 보람이죠. 더 뜻깊은 일은 그 형과 함께 연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내년에는 MIT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형의 발자취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함께하고 싶거든요. 여러분도 함께해요. 여러분이 MIT로 진학하면 강우 형과 또 차도도 선생님과 헤어지지 않을 수 있어요.”

하은찬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짙었다. 이 순간 이 자리의 모든 학생은 꿈을 키웠다. 고려 과학고를 졸업하고 그들도 MIT에 입학하겠다고. 오늘의 헤어짐은 훗날 다시 만나기 위한 잠시의 공백일 뿐이라고 모두가 굳건하게 믿었다.

이 모든 상황을 김승범 기자가 기록했다.

그날 이후 학생들은 고려 과학고에서 진정한 천재는 강우뿐이라고 믿게 됐다. 그리고 강우의 찬란한 행보를 영원히 응원했다.

* * *

홀로 원룸으로 이동한 강우는 짐을 챙겼다.

반년간의 임대를 마무리하고 집을 비워줘야 하는 날이다. 그동안 세간살이를 늘리지 않으려고 애썼음에도 예상외로 짐이 많이 불어났다.

쓸모없는 것을 대충 버리고 재활용 수거함에 정리한 다음 남은 것을 차도도에게서 빌려온 모닝에 실었다. 순식간에 모닝 내부가 가득 찼다.

이 짐들은 일단 차도도의 아파트에 둘 예정이다. 그나마 차도도가 아파트를 정리하지 않아서 한시름 덜었다.

책상 위의 서적을 정리하던 그의 눈에 두꺼운 뉴클리어 퓨전 책이 들어왔다. 차도도의 서재에도 똑같은 책이 있었다.

문득 그날 밤에 책 뒷장에 낙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을 생각하니 술 취한 차도도의 모습이 떠올랐다.

‘충격이었지.’

신새벽 덕분에 다시 못할 구경을 했었다.

그 기억에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맨 뒷장을 펼쳤다.

그도 자신의 책에 같은 낙서를 했었기에 지금 그 낙서가 하나 남아 있어야 한다.

무심코 들여다본 낙서에 강우의 입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 이는 엠씨제곱(E=mc²).

이 낙서가 두 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강우 = 차도도라는 낙서까지.

익숙한 필체여서 누가 쓴 것인지 금방 알아챘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녀가 이 책에 이런 낙서를 했다는 것은 그가 한 낙서를 봤다는 뜻이다. 낙서로 연결되는 서로의 마음이 일치했다.

먹먹한 기분에 젖어 한참 책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강우입니다.”

- 강우 군?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 도도 아비일세.

차준범이었다. 예상치 못한 전화에 당황했다.

그때 문제해결책을 정리한 보고서를 송부한 뒤로 전혀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작전이 실패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다행히 그런 상황에서도 차도도가 흔들리지 않았기에 그도 신경을 쓰지 않던 중이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조금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일전에 보낸 보고서는 잘 받았어. 그 내용을 바탕으로 협상 전략을 수정했고 다행히 투자 협상이 잘 마무리되었어. 도움에 감사하네.

그나마 나쁜 소식이 아니어서 강우는 다행이라 여겼다.

“어쩌다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겁니다.”

- 아니야, 자네 능력을 인정하네. 기술부장도 자네를 대단히 높이 사더군.

“감사합니다.”

그를 보는 시각이 조금은 바뀐 모양이다. 의도하던 반응이 나왔음에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차도도의 유학 승인이기 때문이다.

- 내일 출국한다지?

“예, 그렇습니다.”

- 도도와 함께?

“네.”

반대하더라도 무시할 생각이기에 강우는 마음을 다지면서 굳게 대답했다.

- 그동안 고민 많이 했어. 딸 아이의 아버지란 그런 거라네. 입장을 바꿔 보면 자네라도 마찬가지일 거야. 갑자기 딸이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남자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남자라면 누가 좋아하겠나? 남자가 장난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저는 장난이 아닙니다.”

- 그래서 더 고민했어. 두 사람의 마음이야 내가 알 바 아닌데…… 두 사람의 앞날이 걱정되잖나. 특히 집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줄 딸이라면 말이야.

강우는 자녀는 집안에 예속된 존재가 아니라고 항변하려다 꾹 눌러 참았다. 견해 차이로 싸워봐야 이로울 게 없다.

- 잘 다녀오게. 자네가 유학에 적합한 인재임을 알겠네. 다만 도도와 결혼할 자격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그 문제는 훗날 결정하도록 하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허락하기도 반대하기도 곤란하니 일단 미루자는 뜻이다. 반대로 일삼던 과거와 달라졌기에 강우는 환영했다. 원하던 100%는 아니어도 50%는 되니까.

“감사합니다.”

- 다만 지나친 불장난은 삼가게. 둘 다 성인이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리라 생각하네. 그럼 이만 끊어. 지금 여기는 두바이라…….

전화가 끊어졌다. 강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그곳은 새벽이려나? 그만하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음을 알겠다.

전화 대용을 다시 곱씹었다.

그 정도 태세전환이면 충분했다. 훗날에는 지금의 선입견을 모두 바꿀 자신이 있으니까.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강우는 마지막 짐을 정리했다.

* * *

- 손차희 : 만세! 짐 다 풀었다!

- 윤수아 : 난 아직 멀었는데?

- 손차희 : 유성이가 안 도와줘?

- 윤수아 : 김밥 사러 갔어.

단톡방이 시끄러워졌다. 정작 도착한 날은 조용하더니 오늘은 난리다.

강우는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톡 내용을 보면서 그들이 MIT 기숙사에 무사히 입성했음을 축하했다. 그도 빨리 이곳을 떠야 하는데…….

- 강우 : 거기도 김밥 팔아?

- 윤수아 : 나도 몰라. 유성이가 자신 있게 사러 나갔으니까 팔지 않을까?

뭔가 수상쩍다. 한국 학생이 많으면 김밥을 팔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 강우 : 근데 거기 몇 시야?

- 손차희 : 새벽이지.

- 강우 : 밤에도 가게가 문을 열어? 그리고 수아 넌 밤늦게까지 유성이랑 같이 있어?

- 윤수아 : 짐 정리하는 바람에.

대학교 기숙사는 통금이 없나 보다. 고려 과학고와 비교하면 거의 천국 수준이다. 새벽인데도 잠을 자지 않는 녀석들이 이해된다. 아직 시차 적응이 멀었을 테니까.

- 강우 : 근데 대우는 왜 이리 조용해?

- 윤수아 : 대우? 낮에 애나 본다고 좋아서 나가던데?

최대우 녀석은 가자마자 애나부터 챙기나 보다. 강우는 블로그를 재빨리 확인했다. 역시 블로그에도 최근 며칠은 잠잠했다.

- 최대우 : 흐아암(이모티콘).

- 강우 : 살아있었네.

최대우가 저런 이모티콘을 올릴 때는 자느라 귀찮으니 말 걸지 말라는 뜻이다. 어쨌든 최대우도 무사히 태평양을 건넜으니 이제 남은 건 그뿐이다.

- 손차희 : 쌤은 언제 오신데?

- 강우 : 쌤? 오늘 마지막 수업하셨어.

정확히는 수업이 아닌 고별사였어도 수업이라고 대충 넘겼다.

고곽천재의 질문에 강우는 오전에 있었던 마지막 수업을 상세히 설명했다. 차도도의 고별사를 대충 요약해서 올리고 학생들의 반응도 전했다.

- 손차희 : 우는 학생 많았겠네.

- 강우 : 운다기보단 그냥 눈물 좀 흘리더라.

- 손차희 : 넌?

- 강우 : 내가 울 일이 뭐 있어?

- 손차희 : 나라면 울었을 텐데.

강우는 자신의 감성이 메말랐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차도도와 헤어졌다면 그도 눈물을 참지 못했을까. 어쨌든 지금은 차도도와 더 가까워졌으니 고등학교를 떠난다고 해서 크게 섭섭할 일이 없다.

- 윤수아 : 만세! 김밥 왔다!

- 손차희 : 어? 어떻게 김밥이?

- 윤수아 : 유성이가 선배네 자취 집에 가서 김밥 만들어왔어. 맛있다!

의외로 권유성과 윤수아가 친하다. 둘이 가까웠던 때가 중학교 시절부터이고 그 인연이 대학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흔한 인연이 아니다. 이 밤에 윤수아가 먹고 싶다고 하니 멀리 달려가서 어떻게든 구해오는 권유성도 새삼 놀랍기조차 하다.

강우는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물었다. 그도 곧 기숙사에 들어가야 하니까.

친구들이 알려주는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보고 있자니 다시 손차희가 물었다.

- 손차희 : 너랑 쌤은 언제 와?

- 강우 : 내일 오전 같은 비행기.

- 윤수아 : 요즘 두 사람 자주 붙어 다니네?

- 손차희 : 금방 오겠네. 근데 신새벽 쌤은 언제 온 데?

아! 신새벽! 이리저리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녀를 잊고 있었다.

신새벽은 맡은 반이 없으니 오늘 차도도처럼 고별사를 할 일은 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학교에서도 보지 못했다.

“벌써 가셨나?”

그와 친구들이 챙기는 차도도와 달리 신새벽은 딱히 챙기는 사람이 없다. 그나마 손차희와 윤수아의 2학년 때 담임이어서 이 둘이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 게 전부다.

그의 기억에 신새벽도 집에서 나와 홀로 살고 있었으니 오늘 집을 정리하려면 무척 바빴을 텐데.

- 손차희 : 우리가 신쌤한테 너무 무관심한 건가?

- 윤수아 : 에이 뭘, 알아서 잘 오시겠지.

전화번호를 누르려다가 멈췄다. 벌써 출국했으면 전화 연결이 힘들기도 하고 출국하지 않았다면 바쁠 테고. 같이 떠나면 연락하겠는데 그게 아니어서 괜히 쑥스러웠다.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마도환의 대학원생 김상원이다.

- 강우? 아직 안 떠났나 보네.

“어, 형? 내일 떠나요.”

강우는 김상원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김상원이 전화한 이유는 대충 짐작한다. 일전에 그가 요구했던 마도환의 비리 자료와 증거 때문이다.

가능성은 반반이다. 김상원이 마도환에게서 돌아섰다면 그 증거를 그에게 넘길 것이고 아니라면 증거를 주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에 맞춰서 대책을 세우면 된다. 설사 증거를 넘기지 않더라도 김상원은 마음이 편치 않을 테니까. 어쨌든 김상원은 일단 증거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크다.

- 강우야, 예전에 네가 말했던 그 자료 말이다.

“네. 마도환 교수 관련 말이죠?”

- 그래, 그거. 내가 그거 수집하느라 최근에 고생을 좀 하긴 했는데…….

김상원이 먼저 전화를 걸고 언급했으니 그의 편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더 커졌다.

“문제 있던가요?”

- 교수님 피씨의 자료를 복사했거든?

강우는 예전에 마도환의 연구실에 잠입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그 연구실 피씨에서 전화번호부를 찍어왔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요?”

- 거기에 교수님이 그동안 통화한 내용을 녹음해 둔 파일이 있더라고.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뭔가 엄청난 증거가 걸린 기분이다.

- 교수님이 중요한 문제를 통화할 때는 녹음을 하셨던 것 같아.

지금은 휴대폰 녹음이 쉬운 시대이니 그런 습성 자체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만일 녹음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면 예상외의 증거가 나올지도 모른다.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마도환을 끝장낼 증거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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