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98화 (298/325)

제298화 출국 전야 (1)

- 강우야, 난 너만 믿는다.

김상원이 완벽하게 그에게로 돌아섰다.

평소 마도환의 갑질을 떠올리면 지극히 당연한데 이 또한 쉽지 않은 이유는 교수와 대학원생의 영원한 먹이사슬 때문이다. 학위를 받고 졸업하더라도 스승 제자 관계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학연이 생기고 이런 관계가 연구비 나눠 먹기로 발전한다.

마도환의 치부를 넘기면 김상원은 졸업 후 그 울타리를 벗어나야 하기에 결심이 쉽지 않다.

“알아요. 예전에 말했듯이 졸업 때까진 모른 척하시고, 졸업 후 자리 없으면 미국으로 건너오세요. 졸업 논문은 제가 어떤 식으로든 도움 드릴게요.”

- 좋아. 그동안 확보한 증거, 모두 이메일로 보낼게.

“고마워요.”

드디어 마도환을 얽어맬 최고의 무기를 손에 넣었다. 무려 3년 반만이다.

강우는 원룸 정리를 완료하고 모닝을 타고 차도도 아파트로 이동했다.

가져온 짐을 적당히 구석에 쌓아두고 서재로 향했다. 지금은 김상원이 보낸 증거를 확인할 생각뿐이다.

예상보다 수집한 증거가 훨씬 많았다. 마도환의 연구비 횡령에서 사생활까지. 국가에서 학생들 인건비로 지급한 월급을 다시 현금으로 돌려받기도 하고 연구비를 사적인 물품 구입이나 투자로 돌려쓰기도 했다.

지금까지 뒷바라지했던 김상원이 모아 정리했으니 이 증거는 마도환이 절대 피할 수 없다.

그중에 강우가 가장 바라던 증거는…….

- 우리는 설악산에 놀러 간 셈 치면 됩니다. 주변에서 녀석을 미행하다가 기회를 잡으면 되거든요.

- 인가보다 인적 드문 산이라면 더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겠죠?

- 속초 호텔에서 머무르며 기회를 봅시다.

- 흔적 지우는 건 제가 전문이죠. 걱정 붙들어 매세요. 현금만 확실하게 준비해주세요.

- 황 사장, 이번 일은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가는 겁니다.

마도환과 황 사장의 통화 녹음 파일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무슨 일인지 알기 어려워도 당사자인 강우는 쉽게 짐작했다. 통화 날짜를 보면 그 일이 확실했다.

이처럼 녹음한 이유는 만일을 대비하려는 습관이겠지만 그런 세심함이 오히려 녀석의 발목을 잡았다.

지금 당장 이 증거를 들이 밀어봐야 마도환의 권위라면 바로 묻힐 게 확실하다. 그가 중요한 인물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금까지 기다렸으니 몇 년 더 못 기다릴 일은 없다.

와신상담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허물이 아니다.

강우는 증거를 정리해서 클라우드에 저장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어느새 밤이 되어 창밖이 어둑어둑해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하던 강우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현관문 소리에 급히 일어섰다.

“쌤?”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니 마침 차도도가 집안으로 들어 오고 있었다.

“이제 와…….”

무심코 입을 열던 강우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차도도의 뒤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난감한 마음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옆으로 물러났다.

거실로 들어온 그녀의 어머니가 그를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벌써 동거 시작한 거니?”

“아니에요. 오늘 원룸 정리하는 바람에 잘 곳이 없다기에 오라고 했을 뿐이에요. 어차피 내일이면 떠나는데…….”

차도도가 급히 변명했다.

“그래, 알았다. 너도 얼른 짐 챙기고. 시간 얼마 남지 않았어.”

차도도가 돌아다니며 짐을 꾸리는 동안 강우는 투명인간처럼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다행히 차도도 어머니도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낮에 차준범에게 전화를 받았기에 큰 걱정을 하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발전이다.

그는 바삐 움직이는 차도도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녀는 반 학생에게 작별을 고한 후 교장 선생님과 동료 선생님들에게 인사하러 다녔다고 했다. 급기야 저녁 환송 회식까지 불려 가서 이제야 돌아왔다고.

가져갈 물건을 챙기고 당분간 집을 비워도 문제가 없도록 정리하려니 할 일이 무척 많다.

간간이 손을 거들어 주고 있자니 그녀의 어머니가 불렀다.

“강우 학생이라 했지?”

“예.”

다행히 그를 책망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관계가 되었는지…… 도도 말로는 단순히 가벼운 관계는 아니라던데?”

“저는 진심입니다.”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강우도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나이 차가 커서 걱정이야. 도도는 지금 때를 놓치면 결혼하기 쉽지 않거든. 난 학생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울리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옆을 지나던 차도도가 그를 째려봤다.

적절하지 않아도 지금 이 상황에서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학생이 대단하다고 도도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라. 솔직히 우리는 그런 것까진 안 바라. 그보다는…….”

이야기가 길어지는 찰나 강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국제전화다.

“전화 좀 받겠습니다.”

“그래, 전화부터 받고.”

허락을 받은 후 강우는 한발 물러서서 통화를 눌렀다.

“네, 요셉 교수님.”

- 강우 군, 곧 출발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강우는 영어로 대답했다. 눈치를 보니 차도도 어머니도 대충 영어를 알아듣는 듯했다. 바쁘게 오가던 차도도도 요셉이란 말에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이제 요셉은 차도도의 지도교수다.

- 차 선생과 같이 오나?

“예.”

- 그럼 바쁘겠군. 누구보다도 두 사람을 기다렸어. 할 일이 많거든.

“네?”

- 물론 자네가 헌팅턴과 2차 프로젝트를 계약하면서 할 일이 늘어났다는 것도 아네. 그것만으로도 매우 바쁘겠지. 그래도 그런 정도로 만족할 자네는 아니지 않은가?

“그, 그렇죠?”

- 도착하자마자 내 연구실에 들르게. 내가 이번에 신규 프로젝트를 받아왔는데 딱 적임자가 자네와 차 선생이야. 차 선생이야 내 밑에서 석박사과정을 밟으니 당연히 임무를 부여받겠지만 자네는 엄밀히 따지면 나랑 상관없는 자유의 몸 아닌가?

어째 대화 내용이 산으로 가는 기분이다. 미국도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가 한국 못지않다는 기분도 들고. 강우는 내심 호랑이 굴로 들어간 차도도의 명복을 빌었다.

- 그래서 자네를 위해 공간을 확보해줄 생각이네. 그때…… 강우 사단이라 했었지? 이번에 함께 오는 자네 친구들 말이야. 그 친구들과 같이 헌팅턴 프로젝트를 수행할 거잖아? 연구는 환경이 중요해. 그래서 그 환경을 내가 마련해주려고.

“고맙습니다.”

- 고마워할 것까진 없네. 호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 나와 같이 연구할 거리가 늘었어. 물론 싫다면 하지 않아도 상관없네만 자네 성격이라면 절대 마다하지 않을 거로 생각해.

두서없는 내용이었으나 연구실을 별도로 마련해줄 테니 같이 연구하자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헌팅턴 프로젝트 외에 다른 프로젝트까지.

물론 강우는 거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계적인 석학과 협업할수록 그의 존재감도 올라간다.

- 차 선생과 논의하기 전에 자네에게도 알리는 게 도리란 생각이 들었어. 당연히 합당한 보수는 지급하지. 비록 자네가 학부생이어도 전문연구원에 준하는 대우를 할 생각이네. 자네에게 핵물리 연구실 고참 연구원 대우를 해주겠네. 실제로 그동안 연구한 실적이 있으니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거야. 물론 차 선생도 마찬가지.

한참 동안 요셉 교수의 구상을 들었다.

요셉의 목소리에서 연구에 진심인 열정이 느껴졌다. 요셉은 그가 연구원으로 가담하게 된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요셉이 고마웠다.

긴 통화가 끝나고 강우는 관심 있게 그를 주시하고 있던 차도도에게 말했다.

“오자마자 연구에 합류하래요. 함께 연구하게 되어서 기쁘다고요.”

진심으로 기뻐하는 강우에게 차도도가 더 당황해서 충고했다.

“넌 연구 좀 적당히 해.”

핀잔을 준 차도도가 다시 짐을 싸러 갔다.

그제야 그를 지켜보던 차도도 어머니가 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미국에서도 인정받나 보네?”

“저도 이렇게까진…… 어쨌든 선택한 길이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성실하다고 누누이 들었어. 그런데…….”

그녀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다시 강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도 국제전화였다.

“또 미국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던 차도도 어머니가 또 물러났다.

강우는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시작했다.

- 강우 군?

“누구십니까?”

- 브라이언 윈터라고…… MIT 화학과 교수네.

브라이언 윈터는 신새벽의 지도교수다. 박사과정에 입학한 신새벽은 앞으로 윈터 아래에서 지도를 받는다.

“명성 많이 들었습니다.”

- 흐흐, 그럴 줄 알았네. 내가 보통 유명한 사람인가.

“신새벽 선생님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그러잖아도 신 선생에게서 자네 말을 많이 들었네. 신 선생이 입학 지원하면서 보낸 논문 초안이 대단히 흥미로워서 수시로 대화를 나눴는데 그 아이디어가 자네에게서 나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알아봤지. 이미 요셉 교수랑 프로젝트를 하고 있더군?

신새벽이 그를 윈터 교수에게 소개한 모양이다.

- 곧 비행기를 탄다지? MIT에 도착하면 신 선생과 같이 내 연구실에 들르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윈터도 요셉과 똑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

- 자네는 아직 학부생 아닌가? 학부생이니 특별하게 한 교수에게 종속될 이유가 없어. 물리학과라고 화학과와 담을 쌓을 필요도 없고. 자네가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충분히 배려해주겠네. 신 선생 말을 들으니까 일 년 후에 한국에서 학생 둘이 입학할 거라던데? 그 학생들을 자네가 이끌면서 같이 연구하면 어떻겠나?

비슷한 제안이 들어왔다.

강우는 요셉도 윈터도 그를 노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만큼 최근에 그가 쌓은 논문 내용과 실적이 대단했다는 뜻이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확답을 내릴 처지가 아니어서 대충 얼버무리자니 윈터가 재차 말했다.

- 내 솔직히 말하지. 핵융합 방면으로 MIT에는 유명한 사람이 셋 있어. 물리학과의 프리드 요셉, 화학과의 브라이언 윈터, 원자핵공학과의 미치 해리스. 이 세 사람이 학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크고 제일 잘 나가지.

“그런데요?”

- 조만간 해리스 교수도 자네에게 연락할 걸세. 자네 같은 인재를 구하기 어려워서 말이야. 모두가 자네와 공동으로 연구하기를 원하네. 레온 총장도 아마 자네 이름을 알걸? 그만큼 자네를 주시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야. 하여튼 MIT에 오자마자 나와 만나세. 내가 식사 대접 거하게 하도록 하지.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 자네, 신 선생만 나에게 던져놓고 모른 척하진 않을 것 아닌가? 연구는 같이할수록 즐겁고 할 수 있는 양도 늘어나네. 절대 요셉 한 사람에게 묶이면 안 돼. 요셉이 욕심이 많아서는…….

그 뒤로도 길게 잡담이 이어졌다.

만난 적은 없으나 윈터 교수는 수다쟁이가 확실하다. 말문을 트니 끊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하은찬과 죽이 잘 맞을지도.

어쨌든 윈터 교수의 학문을 향한 뜨거운 열기를 접하니 신새벽이 불쌍해졌다. 노창열과는 다른 의미로 화상을 입어서 쩔쩔맬 것 같다.

간신히 찾아뵙겠다고 수락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진이 다 빠져 한숨을 쉬고 있자니 옆에서 더 큰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차도도 어머니가 주인공이다.

본의 아니게 어머니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했다.

약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어머니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자네, 학부생으로 입학하는 게 맞나? 대학원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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