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출국 전야 (2)
대충 집안을 정리하고 가져갈 짐도 챙겼다.
강우는 원룸에서 가져온 짐이 방 한쪽에 쌓이는 장면을 지켜봤다. 이 방은 거의 창고처럼 변했다.
그 기분은 색달랐다.
만일 그를 남이라고 간주했다면 차도도 어머니는 이 짐을 아파트 내부에 두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와 차도도가 다시 국내로 돌아올 날이 적어도 몇 년은 지난 후이니 가볍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암암리에 승인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버지 차준범에 이어 어머니의 암묵적인 허락마저 얻은 셈이어서 강우는 한결 힘이 났다. 그날과 비교하면 엄청 큰 변화였다.
“다른 건 몰라도 학생이 특별하다는 건 나도 알겠어.”
어머니의 소감이 이어졌다.
“특별하지 않았으면 도도 씨가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 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우리 영감도 일단 두고 보자고 하는 거 보니 자네에게 관심이 생겼나 봐. 하긴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으니까.”
차도도가 웃으며 어머니에게 눈을 흘겼다.
어머니는 차도도를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어릴 때부터 도도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어. 그걸 우리는 기업 경영 쪽으로 유도하려고 무척 애썼고. 그러다가 대학 진학 때 크게 다퉜지. 나중에 도도가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했으나 우린 허락하지 않았어. 이공계 쪽 대학원은 탐탁지 않았거든. 지금 이렇게 되고 보니…….”
어머니의 말투에는 애환이 담겨 있었다. 부모의 바람과 어긋난 자녀의 희망이 그동안 서로에게 큰 간극을 형성했던 모양이다.
“도도가 얼마나 과학을 좋아하는지 알겠어. 그 열정을 꺼내준 자네가 미우면서도 고맙기도 해. 그만큼 재능이 있으면 좋을 텐데…….”
“훌륭한 과학자가 될 겁니다.”
“그러면 좋겠지. 이왕 그쪽으로 가기로 한 거…… 차성그룹 자식이라면 잘하겠지. 먼 곳으로 유학 가니까 무엇보다 건강 관리 잘하고…….”
차도도와 그를 향한 어머니의 당부가 이어졌다.
특별하게 입에 올리진 않았어도 그를 사위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심정이 깔려있었다.
“힘들면 중간에 돌아와도 괜찮아. 국내에서 마무리해도 되고 국내에도 할 일이 많으니까. 오늘 자네를 찾는 미국 교수들을 보니 그럴 일은 없을 듯하지만.”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죠.”
“그래, 내일 멀리 떠나니까 그만 푹 쉬어. 난 갈 테니까. 내일 공항에는 안 나간다. 먼 곳도 아니고 마음먹으면 하루면 갈 수 있는 곳이잖아. 하루면 돌아올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한국에서 두 사람의 성공을 응원하겠다고 덧붙이며 어머니가 짐을 챙겼다.
“강우 씨? 우리도 나가봐야 하지 않아? 밥 안 먹었다며?”
마도환 증거물을 분류하느라 끼니를 놓쳤다. 차도도는 회식을 마치고 왔으니 당연히 배가 부를 텐데 식사를 권하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그럼 같이 나가자.”
어머니를 배웅한답시고 차도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서 어머니를 보내고 강우는 차도도와 거리를 배회했다. 익숙한 이 강남 거리도 당분간 잊고 지내야 한다.
“뭐 먹을래?”
“밤이 늦었으니 간단한 분식이나 먹을래요.”
앞으로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라면이나 김밥, 떡볶이 이런 종류가 될지도 모르겠다.
마침 문을 연 분식점이 보여서 안으로 들어갔다.
차도도는 먹지 않겠다고 해서 강우 혼자 김치 칼국수를 시켰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이 분식이 그리울 것 같다.
그가 그릇을 비우는 동안 차도도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었다. 그 눈빛에 애정과 관심이 엿보였다. 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 순간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대충 배를 채우고 밤늦게까지 거리를 돌아다녔다. 마치 가출해서 갈 곳을 잃는 청소년이 된 기분이다. 법적으로는 성년이 되었으나 아직 청소년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3년간 강우라는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진 덕분이다.
이제 손강우는 아득한 과거의 한 그림자로 변해간다.
“이거 봐요.”
강우가 발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두 사람이 신은 운동화가 똑같았다. 차도도가 받아들였던 날 강우가 선물한 커플 운동화다.
알록달록한 색상이 조금은 어린애티가 나면서도 그들이 소화하기에 무난했다.
커플 운동화는 둘이 한마음임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마음에 꼭 들었다.
“그날 어떻게 알고 선물까지 준비했어?”
“제가 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물을 완벽하게 쳤으니까 다른 결과가 있을 리 없죠. 제가 달리 천재인가요?”
“내가 그물에 잡힌 고기였어?”
“어…… 그게 아니고요!”
“모든 게 계략이었구나?”
차도도의 주먹이 날아와서 강우는 재빨리 피했다.
도망치고 잡으러 가는 두 사람의 운동화가 유달리 화사했다.
“신발을 선물하면 도망간다는 속설도 있어.”
“도망쳐봐. 내가 백번 천번 잡으러 갈 테니까!”
강우의 장담에 차도도는 감격했다. 도망치던 그녀는 그 자리에 멈췄다.
강우는 차도도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나야말로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난 감히 유학 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야. 어학시험을 치던 작년 연말까지도 실제 유학을 떠나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거든.”
“언제부터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욕심은 계속 있었어. 요셉 교수에게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지원하고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면접을 치르는데…… 가슴이 뛰었어. 요셉 교수가 그러더라. 나에게 과학자의 재능이 있다고. 처음엔 그냥 하는 말이라고 여겼는데…… 나를 받아준 이유도 강우 때문에 허락했다고 생각했거든.”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본의 아니게 강우는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 그의 천재성이 너무 엄청나다 보니 그와 비교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다행히 지금까지 이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요셉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차도도는 강우와 무관하게 능력을 평가받았음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과학의 꿈을 불태웠다. 여전히 집안 허락을 얻기 어려웠으나 한층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는 차성그룹의 딸이 아닌 차도도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다.
“유학을 결정하고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의지가 굳건해지더라. 그래서 부모가 반대하면 의절할 각오를 하고서라도 무조건 떠나겠다고 다짐했어.”
차성그룹이라는 막대한 배경을 포기하기가 어디 쉬울까. 그만큼 그녀의 유학이 힘들었고 장애물이 많았다.
“아마 네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겠지.”
강우가 도와준 것은 없다. 모두 그녀가 스스로 했을 뿐. 그녀는 그가 많은 것을 주었다고 말해도 그가 그녀에게서 받은 것이 훨씬 많다. 그녀가 후견인이 되고 방패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훨씬 힘들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차도도와 떨어질 수 없다. 차도도의 능력은 앞으로도 그의 꿈을 이루어주는 큰 역할을 해야 한다.
“고마워요.”
잡은 손으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옆을 스치는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차도도의 미모에 괜히 그의 목이 뻣뻣해졌다.
“이제 우리 둘 사이에 다른 장애물은 없는 거죠?”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집안 반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스승과 제자라는 심리적인 벽이 더 컸고 10년이란 나이 차가 문제였을 뿐.
이젠 선생님이란 교직을 던져버렸으니 그 부담을 한결 덜었을까.
눈을 맞추자 차도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밤이 늦어 커피는 적당하지 않아 햄버거 가게 앞에서 떠올린 디저트였다.
강우는 밖에서 기다리고 차도도 홀로 들어가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샀다.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달려오는 그녀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뛰어오느라 바람에 휘날린 그녀의 스커트가 가로등 불빛에 출렁였다.
밤하늘의 별빛이 조용히 두 사람을 축복했다.
* * *
아파트에서 보는 야경은 항상 강우에게 특별한 기분을 준다.
특히 차도도의 아파트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면, 아니 그녀의 아파트이기에 더 특별하다.
서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오늘따라 더욱 감성을 자극했다.
층층이 쌓인 고층 빌딩 숲. 존재감을 알리는 현란한 선전광고판. 쭉 뻗는 거리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자동차 불빛. 이 모든 것들이 역동적인 현재와 미래를 상징한다.
강우는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밤을 잊은 듯 시가지를 환하게 밝히는 불빛이 그의 가슴을 수놓았다.
언젠가 도시를 밝히는 저 에너지를 상온핵융합으로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 이내에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구원하려는 그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의 꿈은 밝게 빛나고 그 꿈을 추구하는 그와 차도도는 더욱 환하게 빛난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 MIT에서 그 꿈을 이루리라!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강우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제 시작점일 뿐이어도 그의 마음은 달랐다. 자유롭지 못한 고등학생 시절과 비교하면 앞으로는 월등하게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 불과 일 년 후만 되어도 지난 3년간 이룬 업적을 훨씬 능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젠 시간이 주어지면 충분하다. 상온핵융합은 벌써 그의 머릿속에서 구체화하고 있으니. 상온핵융합을 가로막던 난관 상당수가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해체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꿈을 다지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그를 품에 안는 부드러운 감촉이 있었다. 등을 자극하는 뭉클한 느낌과 옆구리를 지나 그를 안는 가녀린 팔이 평소와 다른 떨림을 품고 있었다.
“쌤?”
“또 야경 보고 있어?”
“제 꿈이니까요.”
어떤 사람은 시야를 채운 아파트를 보며 내 집 마련을 꿈꾸고 어떤 사람은 늘어선 빌딩을 보며 거대한 부를 꿈꾸어도 강우의 꿈은 다르다. 그는 도심을 밝히는 빛을 꿈꾼다. 정확하게는 그 빛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다.
“……그 꿈이 머잖아 이루어질 거야.”
차도도도 안다. 강우의 능력이라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앞으로 에너지의 고민을 영원히 해결할 위대한 과학의 발견이 곧 이루어지리란 것을.
그렇기에 그녀도 가슴이 뛰었다. 강우를 볼 때마다 그에게서 퍼지는 아우라에 숨이 막힌다. 강우가 뿜어내는 빛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적어도 그녀가 느끼기엔 그랬다.
‘편안해…….’
강우는 차도도의 품에 안겨 그 안정감을 만끽했다. 두 사람은 창가에 나란히 서서 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강우는 창문에 흐릿하게 비친 차도도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차도도가 그의 몸을 돌렸다.
강우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처럼 두 사람이 편한 마음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있었을까. 이제는 서로를 인정한 사이이니 거리낄 것도 없다.
둘이서 은근한 눈빛을 교차하고 있을 때였다.
딩동-
갑자기 요란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헉!”
강우는 난감한 심정으로 차도도를 쳐다봤다.
차도도는 그보다 더 당황한 듯했다. 그녀는 급히 현관으로 뛰어갔다.
“올 사람이 없는데…… 엄마가 물건을 두고 가셨나?”
그때 현관 밖에서 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