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300화 (300/325)

제300화 출국 전야 (3)

“도도! 강우! 문 열어! 뭐해? 얼른!”

이건…… 신새벽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갑자기 여기에 왜?

문을 열어주자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를 두 개나 끌고 신새벽이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고 있었기에 빨리 안 열어줘?”

“너 여기 무슨 일이야?”

차도도의 모습을 쓱 훑어본 신새벽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올! 뭔가 수상쩍은데? 강우야? 강우 어딨어?”

강우도 현관으로 뛰어갔다.

“쌤?”

“짐 좀 받아! 나도 가진 집이랑 자동차랑 다 처분해버렸더니 갈 데가 있어야지. 그렇다고 다 큰 처녀가 모텔에서 혼자 자기도 그렇고. 그래서 여기로 왔지. 잘했지?”

“눼.”

못했다고 할 수 없어서 강우는 캐리어를 받았다.

화가 나서 찌뿌둥한 표정의 차도도를 무시하고 신새벽은 넉살 좋게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으, 힘들다. 강우야? 내 짐은 네가 자던 그 침실에 넣어. 나 오늘 거기서 잘 거니까.”

“예? 그럼 저는…….”

신새벽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넌 너 자고 싶은 곳에서 자. 위층에 도도 침실에서 자거나 아니면 여기 거실에 퍼질러 자도 되고, 꼭 침대가 필요하면 내 옆으로 와. 내가 재워준다. 오늘은.”

차도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실 거 없어? 목말라 죽겠네.”

“너 줄 음료수가 어딨어?”

“그래? 그럼 강우야! 네가 찬물이라도 꺼내와라. 설마 너도 선생님 구박할 건 아니지? 한번 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다?”

그녀의 말이 묘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강우는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목을 축인 신새벽이 다시 질문을 쏟아놓았다.

“떠날 준비는 다 했어? 놀러 가는 거랑 달라서 가져갈 게 많을 건데? 나야 뭐 미리 부치고 웬만한 건 현지에서 조달할 생각이라…….”

“저도 그런데요?”

신새벽이 웃으며 노트북을 꺼냈다.

“나도 할 일이 있어서 여기 왔거든? 윈터 교수가 숙제를 벌써 내주더라고. 비행기 타고 오면서 할 일 없을 때 살펴보라고 참고논문을 잔뜩 뿌리네? 힘없는 대학원생이 어쩌겠어?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럼 비행기에서 보면 되지. 왜 하필 지금…….”

“강우한테 물어보려고.”

가볍게 차도도의 반박을 처리한 신새벽이 강우를 붙잡아 옆에 앉혔다.

“이거 말이야…….”

어쩔 수 없이 강우는 신새벽과 논문을 들여다보았다.

떠나기 전날 밤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하소연할 곳도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요셉 교수도 그에게 비행기에서 보라며 숙제를 내주지 않았던가.

‘이거 미국 교수들 전통인가?’

두 사람을 노려보던 차도도가 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갑자기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차도도가 아닌 신새벽과 보내게 생겼다.

오늘 밤은 거실에서 잘 수밖에 없다.

논문을 대충 훑어보니 윈터 교수가 정확히 신새벽과 관련되는 논문을 보내왔다. 역시 학계의 거장답다는 감탄 속에 앞으로 박사학위를 마칠 때까지 신새벽 앞에 높인 고난의 길에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물론 그 고난 속에서 신새벽은 한층 성장하고 훌륭한 과학자로 거듭날 것이다.

* * *

다음 날, 강우는 차도도, 신새벽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중앙 사이언스 인터넷판에 기사가 올라왔다.

- 얼마 전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천재 소년의 등장을 기억하는가?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와 물리 올림피아드에서 초유의 최우수상을 거머쥔 세계적인 천재다. 예능프로 방송과 CF에도 출연했기에 대중에게 비교적 익숙한 인물이다. 바로 고려 과학고에 재학 중이던 강우 군이다.

- 천재란 어떤 사람인지 꾸준히 화두를 던졌던 강우 학생이 드디어 외국 유학을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날 모교에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꿈과 희망을 털어놓았다.

- 그의 꿈은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해방하는 일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상온핵융합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무한의 에너지, 수소 핵융합을 인류의 손으로 실현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이 연구가 완성되고 그의 꿈이 실현되면…….

기사에 수소 핵융합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세하게 덧붙였다.

-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은메달 하나, 금메달 두 개를 딴 3학년 하은찬 군은 강우 군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고려 과학고에서 천재라 불릴 사람은 오직 강우 한 사람뿐이다.’ 미래에는 이 수사가 이렇게 바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천재라 불릴 사람은 오직 강우 한 사람뿐이다.’

- 고려 과학고 학생들의 기대를 품에 안고, 국민 모두의 바람을 한몸에 담고 강우 군이 드디어 해외로 발을 넓혔다. 우리는 그가 대한민국의 진정한 천재임을 전 세계에 알리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 그에게는 미국이라는 나라도 세계라는 무대도 좁을 것이다. 지금은 한 명의 천재가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다. 강우 군이 성장한 그 날 우리는 이 나라를 먹여 살리는 진정한 천재를 보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 강우 군과 함께 떠난 또 한 사람이 있다. 강우 군과 지난 3년간 핵융합 연구를 함께 수행했던 담임 차도도 선생님이다. 3년 동안 강우 군을 지켜보며 강우 군의 천재성을 키워주었던 선생님이 이젠 연구 동료가 되어 핵융합에 매진하게 됐다. 두 사람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과대학 MIT에서 그 꿈을 펼치게 된다.

-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을 품은 강우 군은 떠나면서 두 가지를 장담했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상온핵융합이 인류의 문명을 바꾸는 현상을 보게 되리라고. 또 앞으로 10년 이내에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가 되어 다시 돌아오겠다고. 그는 과감하게 부부 노벨상을 언급했다. 과연 그가 말한 자신과 함께 부부 노벨상을 받을 또 한 명의 과학자는 누구일까?

- 강우 군과 차도도 선생님에게 무한한 영광이 함께하기를 기원하면서 이 나라의 과학기술이 10년 후에는 한 단계 도약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 *

7년 후.

늦은 시각 마포 먹자골목의 소금구이 가게에 손님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을 모두 메운 손님들은 불판에서 익은 돼지고기를 뒤집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흔히 볼 수 있는 직장인들의 퇴근 풍경이었다.

“카아! 좋아!”

대학병원 인턴 일 년 차인 고현성은 소주를 들이켰다.

지금 그가 앉은 테이블에는 모두 네 사람이 둘러앉아 고기를 집어 먹고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들인 이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졸업하고 나서도 가장 가까운 녀석들이었다. 바쁜 인턴 생활 와중에 하루 휴가를 받을 때면 오늘처럼 모여 술 한잔하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상철아, 넌 요즘 어떠냐?”

“나? 대학원생이 뻔하지. 낮에도 연구, 밤에도 연구, 눈 뜨면 연구, 눈 감아도 연구. 월화수목금금금. 항상 연구! 이게 바로 대학원생의 일상이다!”

비장하게 말하는 전상철은 한국대 수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흔히 의대생은 10년 동안 공부만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공계에서 공부하는 연구자도 마찬가지다. 박사까지 밟으려면 10년이 후딱 지나간다.

고현성은 전상철에게서 동류의식을 느끼면서 옆에서 열심히 고기를 뒤집는 두 녀석을 노려보았다.

조영제와 오동섭. 이 두 녀석은 대학을 졸업한 후 일찌감치 회사에 취직했다.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조영제는 자동차 회사 연구원으로 오동섭은 차성중공업에 다닌다.

고현성, 전상철, 조영제, 오동섭. 이 네 사람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조로 묶여 동고동락한 사이다.

이렇게 밤늦게 모여 앉아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는 것도 모두 그때의 인연이 이어진 덕분이다.

그들의 신세 한탄이 과거의 추억과 엉켜 아득한 그리움을 자아냈다.

“강우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차도도 쌤은 어디로 사라지셨지?”

투덜대는 고현성과 전상철에게 오동섭이 물었다.

“넌 차희랑 아직 연락하지 않아? 차희가 소식 알 텐데?”

“요즘 차희가 바쁘다고 소식이 뜸해. 차희도 MIT에서 박사과정 중이라. 특히 강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아.”

“차희랑 헤어졌어?”

“언제 사귀기라도 했어야 헤어지지. 아직도 그냥 친구 사이. 거리가 머니까 방법이 없어. 그래도 난 언젠가 차희가 돌아오리라 믿어.”

그들은 고등학교 때의 친구를 추억했다.

씁쓸한 기분에 술잔을 들이켠 고현성이 시선을 텔레비전으로 돌렸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 마감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 오늘 미국에서는 모두 10기의 상온핵융합 발전소가 완공되었습니다. 대서양 앞바다에 인공섬을 만들고 그 섬에 발전소를 세웠습니다. 이 발전소는 그야말로 인류의 모든 기술이 집약된 결정체라 하겠습니다.

- 이 발전소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 이 10기의 발전소가 감당할 전력량은 전체 미국 전력 소모량의 20%입니다. 지금 태평양 앞바다에도 10기의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어서 수년 내로 전체 미국 발전량의 절반을 넘어설 게 확실시됩니다.

- 상온핵융합 발전이 대체 뭔가요?

- 한마디로 꿈의 에너지입니다. 물에는 수소가 무한정 있지요. 이 수소가 핵융합하여 헬륨이 되면서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한마디로 태양과 똑같은 방식인데요. 그래서 엄청 쌉니다. 사실상 연료값이 제로 수준이라 보시면 됩니다.

- 원자력발전이라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 그게 핵융합과 핵분열은 다릅니다.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원자력이 위험한 이유는 방사능 때문인데요, 이번에 새로이 개발한 핵융합 발전에서는 방사능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친환경 에너지라 할 수 있지요. 전문가들은 향후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력발전은 문을 닫으리라 예상합니다. 무늬만 친환경이었던 태양광발전이나 풍력 발전도 사실상 수명이 끝났습니다.

- 인류가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를 핵융합 발전으로 만들게 된다는 뜻이군요.

뉴스에서는 최근 들어 핵융합 발전 기사가 자주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자코 뉴스를 듣던 전상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강우가 관심 있어 하던 분야 아니었어?”

“그러게. 녀석이 고등학생 때부터 연구했는데…….”

“헌팅턴인가? 그 업체랑 위탁연구 했었지.”

방금 뉴스에서 상온핵융합 발전소를 건설한 기업이 헌팅턴이라 했으니 그 업체는 결국 개발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한때 들어본 업체와 연구과제를 뉴스에서 접하자 친구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에휴, 고곽천재 녀석들은 뭘 하고 있는지.”

MIT로 유학 간 후 처음 얼마간은 SNS로 자주 연락했다. 미국 소식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교류가 뜸해졌다. 세상사란 게 멀리 있어 보지 않으면 멀어진다더니 딱 그러했다.

각자 바쁘다 보니, 특히 유학 간 녀석들은 더 바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서로 잊어버렸다.

그들이 평가해도 남다른 천재였던 고곽천재는 미국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줄 알았는데 넓은 세상에 휩쓸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재라더니…… 역시 어쩔 수 없나…….”

고현성은 소주를 잔에 채웠다. 이런 날일수록 손차희가 더 보고 싶다. 그렇다고 손차희를 나무랄 수는 없으니 그 분노가 강우에게로 돌아갔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병원에서 찌들고 학교에서 시달리고 회사에서 축나는 삶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빛나는 꿈을 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신세를 한탄하며 다시 뉴스로 시선을 돌렸을 때 커다란 자막이 떴다.

- 속보! 한국 최초 노벨 물리학상 수상!

“어? 저거 뭐야? 노벨 물리학상?”

고현성은 한때 노벨상을 타겠다던 강우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 올해의 노벨 물리학상에 MIT 박사 강우와 MIT 박사후 연구원 차도도 수상!

강우와 차도도의 소식이 뉴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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