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306화 (306/325)

제306화 노벨상 수상자의 하루 (3)

순식간에 회의장 분위기가 변했다.

노창열의 안색도 푸르죽죽하게 바뀌었다. 그는 당황하면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배성환 학과장이 신새벽과 노창열을 번갈아 살폈다.

노창열은 얼른 정신을 수습했다.

“이건 오해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단순한…… 실수죠, 아니 농담이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명백한 대학원생 성희롱입니다.”

신새벽이 날카롭게 반박했다.

회의장 내부에 긴장이 내려앉았다.

다만 노창열은 교수들의 습성을 잘 알았다. 대부분은 점잔을 빼느라 이런 치졸한 싸움에 개입하기 싫어한다. 절반은 모른 체하고 일부는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를 오히려 나무란다.

‘여기는 내 홈그라운드야. 최소한 신새벽 편보다는 내 편이 더 많아.’

노창열은 머릿속으로 작전을 구상했다.

“신 박사의 무례가 하루 이틀이 아니니 이 사건의 진상을 모든 분이 짐작하실 겁니다. 이젠 없던 일도 만들어 내는군요.”

“노 교수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악마의 편집이죠. 앞뒤 다 자르고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공개하는.”

신새벽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녹취록을 재차 공개했다.

음식점에서 신새벽을 희롱하는 내용과 논문을 지도를 빌미로 찝쩍대는 상황이 가감 없이 공개됐다.

열 받은 노창열이 신새벽에게 소리쳤다.

“네가 아무리 그래 봐야 이런 식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을 동료 교수로 받아들일 것 같아? 왜인 줄 알아? 네가 들어오면 또 물의를 일으켜 학과가 시끄러워지거든. 네가 아무리 내 잘못을 고발해도 나에게 타격을 주진 못해. 잠시 자숙하면 그걸로 끝이야. 실질적으로 내가 준 피해가 뭐가 있지?”

노창열의 장담대로 신새벽이 더 불리했다.

지금 이 자리는 신새벽의 교수 임용을 결정하는 자리여서 분란을 일으키는 그녀를 좋게 보지 않는다.

신새벽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꾹 쥐었다. 분노가 들끓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다. 주변 교수들의 분위기를 살펴보니 여러 감정 속에서 그녀를 책망하는 듯한 시선도 있었다.

배성환 학과장이 한숨을 내쉬면서 신새벽을 진정시켰다.

“노창열 교수 문제는 추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는 신 박사 채용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교수님들 의견은 어떠십니까?”

노창열의 원수가 아닌 이상 당장 이 문제를 걸고넘어질 사람은 없었다. 상황이 신새벽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신새벽은 다시 입을 열고 하소연했다.

“이런 문제를 덮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다른 대학원생이 똑같은 갑질과 성희롱을 당하고 있어요. 내부에서 감출수록 문제가 더 곪아갑니다. 덧붙여 저를 성희롱하던 교수가 제 임용을 평가하는 방식 역시 부당합니다.”

“물론 이해합니다만……. 그럼 노창열 교수를 제외하고 찬반을 붙일까요?”

배성환이 신새벽을 달래려 할 때 노창열이 끼어들었다.

“절대 안 됩니다. 언제까지 거짓말을 일삼는 저 여자를 두고 봐야 합니까? 신 박사의 교수 임용을 포기하시죠. 전 절대 찬성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울러 제 명예를 훼손한 저 여자를 고발할 겁니다.”

노창열이 강하게 나오자 다른 사람들은 신새벽이 거짓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하게 됐다.

신새벽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배성환이 문제 해법을 고민할 때였다.

덜컥-

교수회의실 문이 열렸다.

최근에 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강우와 차도도였다.

“뭐야? 누군데 감히 교수회의실에 난입해?”

노창열이 버럭 소리 지르다가 강우를 확인하고는 입을 닫았다.

다른 교수들도 강우와 차도도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봤다.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두 인물, 거의 매일 뉴스에 등장하는 두 사람을 모를 리 없다.

“제가 불청객이긴 합니다만……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인가요?”

강우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배성환 학과장에게 인사했다.

배성환 학과장이 재빨리 그를 환대했다.

“오! 노벨상 수상자께서 몸소 화학과를 방문하시다니! 영광입니다. 들어오시지요.”

역시 노벨상은 과학 기술계에서 프리패스의 마법을 부린다.

강우는 노창열에게 비웃음을 날리고는 입을 열었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이곳을 두 번째 옵니다. 처음 왔을 때도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때도 신새벽 박사님과 함께였는데 노창열 교수가 난리를 피우더군요.”

“뭔 소리야?”

“노 교수님은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리셨나 봅니다. 그때도 별별 희롱을 다하시더니. 당시 저는 신새벽 박사님에게 배우던 고등학생이었죠. 기억하십니까?”

이곳의 교수들은 그 사건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때 신새벽과 같이 와서 도장을 받아갔던 그 당돌한 고등학생이 오늘날 노벨상을 받은 위업을 달성한 강우임을 처음 알았다.

“아! 그 학생이…….”

“신 박사와 각별한 사이였군요.”

“놀랍습니다. 그 고등학생이 이렇게 성장할 줄은.”

사람들의 감탄이 실내에 가득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노창열이 버럭 소리쳤다.

“노벨상 수상자면 다야? 얼른 나가!”

강우는 꿈쩍하지 않고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차도도가 서류봉투를 배성환에게 넘겼다.

“학과장님, 이 봉투 속에는 현재 노창열 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 여학생의 고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논문 지도를 빌미로 상대를 압박했고 심지어 권력으로 이성 간의 스킨쉽을 요구한 내용입니다. 이 여학생은 견디다 못해 박사과정 포기를 고민하고 있고요.”

노창열이 급히 변명했다.

“그건 그쪽 주장일 뿐이야! 난 진지하게 남녀 간의 교제를 원했다고! 그것도 결혼을 염두에 둔!”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교수의 갑질이었죠.”

“아니야!”

“제가 방금 그 학생을 만나고 직접 진술을 받아왔습니다!”

차도도가 매섭게 노창열을 노려봤다.

강우는 피식 웃으며 교수들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고등학생 때의 저를 보셨으니 제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모두 잘 아실 겁니다. 전 이런 문제를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또 이런 문제로 신새벽 박사님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 또한 묵과할 생각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신 박사님의 교수 임용 안건에서 노창열 교수의 의견을 배제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어떻습니까?”

다소 비웃는 듯한 강우의 표정이 다른 교수들을 얼어붙게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압력에 굴복할 교수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학과의 자존심을 걸고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이다. 이슈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 젊은 혈기를 고려하면 이 문제를 절대 그냥 덮을 리 없다. 자칫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면 화학과 전체, 아니 한국대 전체가 매도될 문제였다.

배성환 학과장도 상황 판단이 빨랐다.

그는 재빨리 학과 교수들에게 물었다.

“자! 다시 묻겠습니다. 신새벽 박사의 교수 임용을 반대할 분 있습니까? 있다면 그 사유를 말씀해주시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노벨상 수상자 두 사람과 지금 당장 대립할 만큼 간이 크지 않았다. 단지 노창열만…….

“왜 외부인이 교수회의에 난입해!”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배성환이 재빨리 결론을 선언했다.

“그럼 신새벽 박사의 화학과 교수 임용이 가결되었음을 알립니다. 신새벽 박사님! 축하드립니다. 다음 학기부터 한국대 화학과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해주세요! 앞으로 학과 발전에 큰 노력 부탁드립니다. 세계를 선도하는 젊은 과학자에 선정되셨으니 그 실력을 의심치 않습니다. 앞으로 같이 잘해봅시다!”

어떤 교수가 손뼉으로 응답하자 모두가 박수로 호응했다. 오직 노창열만이 썩은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두고 보자!”

화가 난 노창열이 협박성 경고를 날리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물론 강우는 노창열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입수한 모든 증거물을 가지고 학교 교수 윤리 위원회에 제보할 생각이다. 노창열 교수의 앞날에는 파면 외에 다른 길은 없다.

“하! 저 사람이…….”

배성환이 강우와 차도도에게 대신 사과했다.

“저 사람이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뇨, 예전에 저도 숱하게 만났던 사람입니다. 역시 사람은 안 바뀌는군요.”

강우의 빈정거림에 뻘쭘해진 배성환이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강우 박사님, 차도도 박사님, 그리고 신새벽 박사님, 제 연구실에서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차도도가 흔쾌히 수락했다.

* * *

한국대를 떠나 저녁까지 먹은 후 그들은 차도도의 펜트하우스에 모였다.

거실에 모여 앉아 강우는 신새벽의 교수 임용을 축하했다.

“이제 신새벽 교수님이라 불러야겠네요?”

“아냐, 난 강우가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게 더 좋아. 도도야, 너도 그렇지?”

신새벽의 반응에 차도도가 고민에 잠겼다.

지금도 강우가 쌤이라고 부르면 왠지 가슴이 뛴다. 고등학교 시절에 강우는 눈부시게 빛났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결혼한 지금은 아무래도 그때만큼 설렘은 없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선생님과 제자라는 벽 때문에 더 애틋하게 느꼈던 듯하다.

차도도의 무덤덤한 표정을 본 신새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요즘엔 뭐라고 부르지?”

“그냥 도도 씨라고…….”

“정상인 것 같은데…… 제자라서 뭔가 이상하긴 하네.”

신새벽의 반응에 강우는 얼른 덧붙였다.

“그냥 다양하게 불러요. 도도 씨, 선생님, 쌤, 박사님, 때로는 도도야, 차도도! 여보! 마누라!”

강우의 입에서 무수한 호칭이 튀어나왔다.

순간 신새벽이 강우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녀석이! 뭐? 도도야? 어디서 함부로 반말해?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고 했어? 안 했어?”

“으아악!”

순식간에 머리카락을 잡힌 강우는 아픔에 괴로워했다.

“이 자식이, 나한테도 ‘새벽아’라고 불러보지?”

“새벽아~ 으아악!”

의외로 신새벽의 손이 매서워 강우는 펄쩍 뛰었다.

차도도가 안면을 확 찡그리더니 조용히 경고했다.

“신새벽! 우리 신랑 그만 괴롭히지?”

“어쭈? 이제 강우 편을 드네? 이거 남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어?”

신새벽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그냥 골드미스를 뽐내며 혼자 사는 게 더 편하다나.

강우는 신새벽의 그 심정을 어렴풋하게 이해했다.

그가 알기로는 신새벽은 고려 과학고 선생님 시절에 변변하게 남자를 만나지 않았었다. 유학 가서는 좀 나아질까 했는데 그곳에서도 짝을 찾지 못했다. 부모님의 소개로 한두 번 선을 보기도 했었으나 모두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지금까지 독신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나이 삼십 대 중반이니 아주 늦은 편은 아니라지만 얼른 결혼을 서둘러야 할 때다.

한때 신새벽이 그에게 품었던 마음을 알고 있기에 강우는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신새벽이 좋아하는 남자는 그야말로 뇌섹남. 그녀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남자를 원한다. 모두 강우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문제다.

그런데 그녀가 워낙 똑똑하고 능력마저 뛰어나다 보니 주변에 눈에 차는 남자가 있을 리 없다. 천재라며 유학 왔던 남자도 그녀와 견주면 대부분 별 볼일 없었다. 이제 그녀는 홀로 살기로 작정하고 결혼을 포기했다.

강우도 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은데 방법을 찾지 못했다.

“자! 우리 오랜만에 자축연 열래? 예전에 여기에서 와인 파티도 했었잖아? 도도는 교수 임용 이미 끝났고, 나도 해결됐고, 강우는?”

“전 아직 군대랑 이것저것 걸려서요.”

“그래도 네가 안 될 리 없지. 너 안 뽑으면 한국대는 전 국민에게 욕먹으니까.”

차도도가 와인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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