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7화 노벨상 수상자의 하루 (4)
강우는 와인이 차려지는 동안 오랜만에 고곽천재 톡방에 들어갔다.
십 년이 되도록 유지되는 단체 톡방이었으나 요즘은 매우 뜸했다. 각자의 일로 바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고 같은 학과에 묶여 있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헌팅턴과의 2차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서 사실상 그들의 공동 연구도 끝이 났다. 물론 강우는 그 후에도 수시로 그들에게 연구에서 도움을 주긴 했다.
- 강우 : 모두 살아 있음? 신새벽 쌤이 드디어 자리 구했어.
한참 만에 답변이 날아들었다.
- 손차희 : 어디 가셨는데?
- 윤수아 : 신쌤은 결혼 안 하시나?
- 최대우 : 흐아암(이모티콘).
손차희는 현재도 강우와 가장 가깝게 연구하고 있다. 그녀는 MIT 요셉 교수 밑에서 석박사 통합과정을 다니고 있고 아직 졸업하려면 2년쯤 남았다. 사실 강우가 유달리 빨리 졸업했다. 무려 노벨상을 탄 논문을 학부 때 쓴 학생이 박사가 아니면 그것도 이상하니까.
강우는 손차희의 재능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녀는 물리에 그리 재능이 없었다. 그런데도 전공을 물리로 정해서 박사까지 밟고 있으니 머리 위에 떠 있는 재능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극복 가능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어쨌거나 손차희는 차도도와 강우가 졸업하면서 생긴 빈틈을 훌륭하게 메우고 있다.
윤수아는 전산학과에서 인공지능 딥러닝 알고리즘을 연구하고 있다. 그녀 또한 현재 MIT에서 박사학위를 밟고 있다. 핵융합 쪽으로는 가끔 과외로 돈을 버는 수준. 지금도 헌팅턴과 상온핵융합 발전소의 각종 제어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진행 중이다.
최대우는 MIT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 원자핵공학과로 진로를 수정했다. 강우는 그가 하버드 천문학과로 가리라 예상했는데 보기 좋게 예측이 틀렸다. 최대우는 핵융합계의 거장 미치 해리스의 밑에서 핵융합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얼마 전에 그는 신새벽과 함께 세계를 선도하는 젊은 과학자 10인에 당당하게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아직 박사학위를 받지 않은 대학원생이 이 10인에 낀 것은 처음이라 했다. 그만큼 학계에서 최대우의 평가는 대단히 높았다.
물리와 천문학에서 S이고 수학에서도 A인 최대우의 능력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다.
그렇게 최대우는 현재 최고로 주가를 높이고 있었다.
이들 셋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20대인 그들의 나이를 보면 결혼하기 이르긴 하다.
- 강우 : 신 쌤 한국대 화학과 교수에 임용됨.
- 손차희 : 우와! 잘됐어!
- 윤수아 : 드디어 신 쌤이 해내셨네.
- 최대우 : 그럼 앞으로 미국에는 안 오는 거야? 울음(이모티콘).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외국으로 유학 간 학생의 대다수가 국내 괜찮은 대학교에서 자리 잡기를 원하기에 한국대 교수는 모두가 바라는 자리였다.
- 손차희 : 차 쌤도 한국대 교수지? 강우 넌 어떻게 됐어?
- 윤수아 : 강우 넌 찍는 대로 갈 수 있지 않아?
- 최대우 : 강우야, 빨리 자리 잡아. 나도 곧 간다!
- 강우 : 난 아직 확정 안 됐어. 군 문제도 해결 안 났고.
- 손차희 : 네가 군대 가면 국가적으로 손해임.
- 윤수아 : 맞아. 근데 대우야? 넌 군대 어떡해?
- 최대우 : 난 조금 더 먹으면 군 문제 해결돼.
- 윤수아 : ???
오랜만에 시답잖은 대화를 했다. 역시 고등학교 친구들은 언제 이야기를 나누어도 정답다.
강우는 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해서 함께 연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강우 사단에 속한 사람들이니까.
문득 차도도와 신새벽과의 미래를 떠올렸다.
같은 한국대 교수이니 얼굴을 마주칠 시간은 많다. 그러나 학과가 달라 연구로 엮이기는 쉽지 않다. 헌팅턴사와 차성중공업의 합작회사가 출범하고 상온핵융합 발전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큰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강우 사단을 더 효율적으로 한 곳에 묶을 방법이 없을까.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강우야? 뭐해?”
고민에 싸여 있자니 신새벽이 그에게 와인잔을 넘겼다.
“아, 고곽천재랑 톡했어요.”
“애들 모두 잘 있지?”
“당연하죠.”
차도도가 와인을 따서 각자의 잔을 채웠다. 와인의 진홍빛 색상이 영롱하게 빛났다.
신새벽은 고곽천재 학생들을 떠올렸다. MIT에서 함께한 지난 7년은 꽤 재미있었다.
“보고 싶네.”
“안 본 지 몇 달이나 됐다고?”
차도도가 빈정거리자 신새벽이 깔깔 웃었다.
“이번에 내가 대우랑 내기했거든.”
강우는 모르는 이야기라 귀를 기울였다.
차도도가 맞장구를 쳤다.
“무슨 내기?”
“1년 전에 세계를 선도하는 젊은 과학자 10인에 누가 빨리 선정되는가를 내기했어.”
“그건 좀…… 너한테 너무 유리한 거 아냐? 넌 이미 박사 받아 잘 나가는 중이었고 대우는 아직 학위도 없는 대학원생, 누가 봐도 네가 훨씬 유리한데?”
“그렇지? 그래서 내기를 걸었는데 대우가 겁도 없이 덤비더라고! 당연히 콜했지!”
강우는 내기의 본질을 분석했다. 얼핏 보면 신새벽이 유리해 보이지만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 전 세계에는 잘 나가는 젊은 과학자가 무척 많아서 10인 내에 선정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아무리 신새벽이어도 장담할 수 없고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최대우가 그사이 졸업하고 신새벽을 따라잡을 수 있다. 즉 10인 선정은 두 사람 중 누가 빠르냐의 경쟁이라기보다 시간이 지난 훗날까지 훌륭한 논문을 쓸 수 있는가의 경쟁이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두 사람이 동시에 선정됐다. 신새벽도 놀라운 쾌거였지만 최대우는 더더욱 놀라운 업적이었다.
차도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누가 이긴 거야? 무엇을 걸었는데?”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기! 둘 다 이긴 거지.”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대우는 무엇을 요구하던?”
차도도의 질문에 신새벽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내가 한국으로 도망 와버렸으니. 히히.”
대충 나중에 만나면 해결하겠다고 묻어버린 모양이다.
차도도가 피식 웃더니 강우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날렸다.
“그거 조심해야 해. 너 그러다가 대우한테 큰코다친다? 예전에 고곽천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생각해봐. 그때도 비슷한 내기 자주 했잖아? 이것들이 얼마나 음흉한데.”
“아! 그랬지.”
신새벽도 갑자기 강우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갑자기 눈총이 쏟아지자 강우가 마구 손을 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처럼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 어딨다고요!”
“그걸 누가 믿어! 너 예전에 우리를 굴리려고 그렇게 호시탐탐 노렸잖아?”
“으아! 굴려보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네 속마음이 그랬잖아!”
신새벽에게 이 일로 구박받은 게 백 번은 넘는다. 그때마다 강우는 그 시절로 돌아가면 진짜로 굴려보겠다고 이를 갈았다.
“도도야! 이 녀석 진짜 음흉하지? 그렇지?”
“어…… 그, 그게…….”
그의 편인 차도도가 시원하게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주저함에 강우도 당황했다.
“전 순진하다니까요!”
“아냐, 아냐. 이건 분명히 뭔가 있어! 차도도! 너 솔직하게 불어! 너희 둘, 강우 고등학교 졸업 전에 뭔가 사고 쳤지?”
신새벽이 마치 진실게임을 하듯 추궁했다. 그녀는 와인잔을 들고 와인을 마시기를 권했다.
강우는 잔을 부딪치고 와인을 들이켰다.
차도도도 시원하게 와인을 마셨다. 차도도의 주량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 없다. 와인 한 잔 마시면 반쯤 맛이 가고 두 잔을 마시면 인사불성이다.
물론 차도도가 술을 많이 마신 때는 맞선 사건을 제외하면 항상 강우와 함께 있을 때였기에 걱정을 끼치진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도도가 술에 취해 강우 앞에서 뻗은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야! 이 음흉한 녀석이 네가 취했을 때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알아!”
“우와! 막 덮어씌우네!”
강우의 반박은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신새벽이 질문했다.
“너희 둘 첫 키스 언제야?”
첫 키스가 언제였지? 드물게 한 두 번 차도도가 그의 이마에 입맞춤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뽀뽀도 한 기억이 없다.
“그야 당연히 미국 건너와서…….”
“그래, 미국 건너와서.”
차도도도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맞장구를 쳤다.
강우는 간신히 그날을 기억해냈다.
“그 언제였더라…… 미국 오고도 반년쯤 지나 제 생일 때였는데…….”
출국하면서 사귀는 1일이었는데 첫 키스는 그때부터 무려 반년이 지난 후였으니 목석같았던 두 사람이다. 사귀면서도 여전히 선생님과 제자라는 둘만의 벽이 남아있어서였다.
그런데 어째 차도도의 표정이 묘했다.
그녀가 강우와 신새벽을 힐끔 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거봐. 아니라잖아? 그 전에 있었지? 내가 보기에 스승과 제자 사이일 때도 뭔가 사고 쳤던 게 틀림없어!”
어? 치매에 걸렸나? 아무리 생각해도 강우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아닌데요? 없는데요?”
차도도가 안면을 붉히더니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고백했다.
“아냐, 있었어.”
“예?”
“우리 첫 키스가 언제였냐 하면…….”
차도도가 놀라운 비밀을 털어놓았다.
강우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올림피아드에 참석했을 때 고곽천재와 차도도는 보스턴에서 만났었다. 그때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마지막 밤에 그들은 보스턴의 작은 호텔에 머물렀다.
“설마…….”
강우는 황당한 기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날 강우 네가 내 방에서 나랑 같이 이야기하다가 피곤해서 잠들었었잖아?”
“그때 대우랑 쌤이랑 같이 옮겼다고…….”
“그래 옮기긴 했지. 근데 옮기기 직전에…….”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 강우를 일으키려다 차도도는 충동적으로 강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키스라기보단 단순한 뽀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애정 표현이었으나 그날의 일을 차도도는 혼자서 오랫동안 가슴 깊이 묻었다.
“아!”
강우는 가슴이 벅찼다.
고등학교 그 시절, 당연히 강우는 차도도에게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차갑고 도도한 선생님인 차도도가 그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그를 사랑스러운 제자로만 대했으니까.
“그럼 그때 이미 저를 남자친구로?”
차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킥킥,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이지. 도도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니!”
신새벽이 두 사람을 마구 놀렸다.
강우는 괜히 억울했다. 이건 그가 문제가 아니라 차도도의 문제다. 괜히 차도도 옆에 있다가 그마저 놀림감이 됐다.
“내가 너무 순진했어.”
한숨을 푹푹 쉬는 강우에게 차도도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렇잖아요?”
“음, 네가 얼마나 음흉한지 다 털어놓을까?”
“뭔데, 뭔데? 구린 냄새가 난다? 얼른 다 털어놔. 자, 와인 더 마시고.”
차도도에게 비밀을 알아내려는 듯 신새벽이 마구 부추기며 와인을 권했다.
신새벽은 아직 미혼이면서도 이런 연애사를 무척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와인을 마시고 얼굴이 발갛게 물든 차도도가 반쯤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강우가 얼마나 음흉한가 하면…… 결혼하고 첫날밤에 말이야…….”
“오올! 첫날밤에?”
“그날…… 나를……. 더 말할 수도 있는데…….”
“으악!”
강우는 재빨리 차도도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얼른 말해봐!”
“그때 거실에서 무드 잡아 놓고 나를…….”
얼른 계속하라는 신새벽과 결사적으로 막는 강우 사이에 끼어 버둥대던 차도도가 술에 취해 조용히 소파에 널브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