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7화 강우 사단 (3)
마도환은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겉으로는 마치 수도승처럼 편안한 태도였으나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내일은 핵융합 심포지엄이 열린다. 무려 노벨상 수상자가 세 명이나 참석하는 엄청난 행사다. 물리학과 주최로는 최근에 이만한 행사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이고 교수나 학생 할 것 없이 커뮤니티가 뜨겁다.
현재 분위기로 보면 행사는 성공리에 끝날 게 확실하다.
보통 때라면 물리학과 교수인 그는 당연히 축하했을 것이다. 문제는…….
“강우 그 자식이…….”
녀석이 유학에서 돌아오면 밟아주리라 장담했는데 엄청난 거물이 되어 돌아오는 바람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심지어 강우와 차도도는 한국대에 교편까지 잡았다.
뼈아픈 패배였다.
“젠장!”
지금 당장은 녀석에게 쏠린 관심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한국 최초 과학 노벨상 수상자란 후광이 녀석을 스타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일 년만 참자, 일 년만!”
대중의 관심이 가라앉으면 1년 차 풋내기 교수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장기로 녀석을 밟아줄 수 있다. 적어도 이런저런 영향력으로 국가 프로젝트를 좌우하고 교수회의 여론을 이끌 수 있는 그의 장점이 빛을 발할 거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선…….
마도환은 전화기를 들었다.
“아버지?”
- 무슨 일이냐?
과기부 장관을 역임했던 아버지는 지금도 정재계 인사와 두루 친하다. 특히 한국대의 장년층 교수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직도 대단히 크다. 이런 인맥을 이용해야 한다.
“이번 자연과학대학장 선거는 제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전화를 돌려주세요.”
지금 한국대에서는 자연과학대학장을 선출하는 학장 선거가 열리고 있다. 투표권은 단과대 교수와 교직원에게 있다.
모두 네 명의 출마자 중에 마도환은 화학과 배성환과 양강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를 앞세워 돌풍을 일으켰다. 정부와 조율을 잘한다는 강점도 선거에서 잘 먹혀들었다. 현재까지는 필승구도였다.
- 네 나이가 몇이냐? 아직도 이 애비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냐?
“그래도 확실한 게 좋지 않습니까? 이대로도 무난하게 이깁니다만 그래도 아는 교수님들에게 전화 한번 돌려주세요.”
- 알았다. 선거일이 언제였지?
“사흘 뒤입니다.”
- 좋아, 네가 단대 학장이 되면 다음에는 한국대 총장을 노려보자.
“당연합니다.”
발 넓은 아버지가 조금만 밀어준다면 필승구도는 더 확고해진다.
마도환은 전화를 끊고 다시 강우를 떠올렸다.
녀석이 노벨상 수상자라는 후광이 바래면 단과대 학장이 된 그가 권력을 통해 교묘하게 압박할 수 있다.
“얼마나 말을 잘 들을지 기대되는군.”
이 바닥에서 승자는 정해져 있다. 연구를 열심히 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권력에 줄을 댄 자신 같은 사람이다.
“내일 심포지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테니 선거에 이용해야겠어.”
강우도 물리학과 교수이니 대놓고 그를 방해할 수 없을 테니까.
* * *
날이 밝았다.
강우는 일찍 일어나 준비를 서둘렀다. 심포지엄 주최자는 일찍 도착해서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
노벨상 수상자 신분으로서는 한국에서 첫 강연이라 물리학자 외에 타과 교수, 학생들이 많이 참석할 분위기였다. 심지어 일반인까지. 거기에 내외신 기자 또한 덤이다.
오늘은 괜찮은 정장으로 멋을 내야 하기에 강우는 차도도의 도움을 받아 옷을 챙겼다.
고등학교 때도 그가 방송 출연할 때면 차도도가 직접 챙겨줬었다. 그때가 생각나서 그녀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신랑 괜찮네.”
재킷을 단정하게 잡아주는 차도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도도 씨도 얼른 준비해요.”
예쁘게 차려입은 차도도의 모습을 그리며 강우는 재촉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화사한 햇빛이 기분을 밝게 한다. 오늘은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이다.
띵동-
현관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 아침 시간에 누가?
쾅- 쾅-
급기야 발로 현관문을 찬다. 이 집에 저렇게 무지막지한 횡포를 부릴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역시나…….
“강우야 문 열어! 얼른!”
신새벽이 이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강우는 급히 문을 열었다.
“으흐흑!”
신새벽이 울음을 터트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 무슨 일이에요?”
순식간에 거실을 점령한 신새벽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엘리베이터가 열리면서 익숙한 녀석이 등장했다.
“가, 강우야, 신 쌤 여기 있어?”
“어? 대우야? 넌 또 왜?”
최대우가 대답할 틈도 없이 후다닥 안으로 들어왔다.
“으흐흑.”
신새벽이 차도도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강우는 신새벽이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항상 밝은 그녀였으니 다소 뜻밖이었다.
최대우는 멍한 표정으로 한 걸음 떨어져서 신새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쌤? 왜 그러세요?”
강우도 신새벽을 달랬다.
신새벽이 눈물에 눈화장이 번져 엉망이 된 얼굴로 최대우를 가리켰다.
“저, 저 녀석이…… 나를…… 덮쳤어!”
“네?”
이건 무슨 일인지. 강우는 신새벽과 최대우를 번갈아 살피면서 말문이 막혔다.
차도도가 그녀를 토닥이면서 물었다.
“너 어젯밤에 키스 소원 들어준다고 데려가지 않았어?”
“갔지.”
“그런데?”
“길거리에서 키스할 순 없으니까 일단 우리 집에 데려갔는데…….”
직감적으로 강우는 두 사람 사이에 어젯밤에 무슨 일이 발생했음을 확신했다.
“소원 말하라니까 그래도 키스하겠다고 우기더라고.”
“그래서 해줬어?”
“어쩔 수 없잖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신새벽이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뭘 그런 거로. 네 나이가 지금 얼만데.”
차도도가 그녀의 등을 쓸어주자 신새벽이 도리질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키스하랬더니 엄청 좋아하더라고.”
강우는 혀를 찼다. 뭐 그 정도는 이해하는데…….
“하여튼 그렇게 소원 들어줬거든? 이젠 내가 소원 말할 차례잖아?”
신새벽도 젊은 과학자 10인에 들었으니 당연히 권리가 있다.
최대우의 안색이 확 붉어졌다.
“그래, 그래서 무슨 소원을 말했는데?”
차도도가 차분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신새벽이 눈치를 보다가 대답했다.
“그때 네가 가르쳐준 거 그게 재밌겠더라고. 무드…….”
“헉!”
강우뿐만 아니라 차도도도 경악했다.
“네가 나처럼 무드 잡아준 거야?”
“아니, 대우가……”
강우와 차도도가 최대우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근데 왜?”
“그게…… 저 녀석이 흥분을 못 참고……. 흑흑.”
이게 울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어려웠다.
최대우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쌤! 제가 쌤을 책임지겠습니다!”
“야! 당연히 책임져야지!”
“근데 왜 울어?”
차도도가 물었다.
“한번 스승이면 영원한 스승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래서 좋단 거야? 싫단 거야? 내가 보기엔 네가 유도한 것 같은데?”
“물론 내가 뇌섹남을 좋아하는 건 맞는데……”
신새벽이 우물쭈물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직 군대도 안 다녀온 녀석이랑은 조금…….”
“쌤! 전 군대 안 가도 돼요! 그러니까 쌤이 고무신 거꾸로 신을 일 없어요.”
“왜 군대를 안 가?”
“몸무게 넘친다고 오지 말래요.”
최대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부터 신새벽은 머리가 좋은 남자를 무척 좋아했었다. 강우를 쫓아다닌 것도 그 이유고. 최대우는 무려 S급 재능이 두 개나 되니 그 조건에 딱 적당하다. 그리고 지금은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직전이고 세계를 선도하는 젊은 과학자 10인에 뽑혔다.
현실적으로 신새벽의 머리에 대적할만한 남자라면 최대우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가 보기에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다.
나이야…… 그랑 차도도도 마찬가지이니 장벽이라 할 수 없다.
분위기가 어째 그녀가 대우를 노린 것으로 몰리자 곧바로 신새벽이 반박했다.
“그래도 내가 손해야! 저 자식은 고등학교 때는 주연이랑 사귀고, 대학 때는 애나랑 놀았잖아?”
“쌤! 저는 주연이랑 손도 못 잡아봤고요! 애나랑은 물리 문제로 툭탁거린 기억밖에 없는데요? 저 대학원 때는 여자 근처에도 안 가고 공부만 했거든요!”
최대우가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녀석의 이력이야 강우도 잘 안다. 징징거려도 실제로 여자를 사귄 적이 없다. 이 녀석은 별과 결혼할 녀석이었으니까.
“흐아아, 그래도 내가 어쩌다 주기율표도 몰라서 헤매던 녀석이랑 이렇게 됐지……. 저 녀석 코흘리개 시절에 숙제 안 했다고 막 혼냈었는데 그런 녀석이랑 내가……. 어후! 술이 웬수지, 술이 웬수야.”
신새벽이 최대우를 째려보면서 뭐라고 주절주절 댔다.
강우가 보기에는 정말 불쌍한 녀석은 최대우다. 앞으로 신새벽의 등살을 어떻게 견딜지.
그래도 녀석의 표정을 보니 신새벽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저 녀석은 고등학교 때부터 차도도와 신새벽을 여신처럼 여겼는데 마침내 신새벽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꿈을 이룬 성공적인 인생이다.
차도도가 신새벽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래서 어떡해? 대우랑 사귈 거야? 말 거야?”
“뭐…… 내가 손해지만 어쩌겠어? 오늘부터 1일 하려고.”
“너 자랑하려고 아침부터 들이닥친 거지?”
“아씨, 그건 아니라니까!”
한사코 손사래를 치지만 강우가 보기엔 자랑하러 온 게 확실하다.
그래서 얼른 마무리했다.
“자!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두 사람도 할 일 많아요. 어서 준비합시다.”
“새벽이 넌 화장 새로 해야겠어.”
차도도가 신새벽을 데리고 들어갔다.
스쳐 지나가는 차도도에게 강우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그러길래 왜 첫날밤 무드 이야기를 해줘서는……. 아무래도 우리도 한 번 더 무드 잡아야겠어요.”
기겁하는 차도도를 향해 강우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 *
핵융합 심포지엄이 한국대 문화관에서 열렸다.
문화관 앞에는 노벨상 수상자 강우, 차도도 박사 강연이라는 거대한 현수막이 걸렸다. 학술행사임에도 비전공자인 일반인마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입구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오늘 강연 기대합니다.”
물리학과 동료 교수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축하했다.
익숙한 한 인물이 눈에 띄었다. 강우는 바로 뛰어가서 손을 내밀었다.
“한태규 교수님 오셨습니까?”
“허허, 와 봐야죠. 누구 강연인데. 난 예전부터 강우 군, 아니 강 박사가 노벨상을 탈 줄 알았습니다.”
한태규는 물리학과이더라도 핵융합과는 관련이 없다. 즉 이 심포지엄에 참석할 일이 없음에도 그를 축하하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셈이다.
항상 그를 믿어주고 지지하는 한태규에게 강우는 감사를 표했다.
한태규의 뒤를 이어 대한핵융합센터의 우기준이 등장했다. 과거와 비하면 한결 성숙하고 듬직해진 연구자로 변신했다.
“강 박사! 몇 년 만인가!”
같은 분야라서 자주 만날 법한데 이상하게 우기준과는 인연이 엇갈렸다. 우기준은 지금도 핵융합센터에서 후배 연구원을 독려하는 재미로 산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강 박사 응원하는 재미로 삽니다.”
“몽상가는 어떡하시고요?”
“그 블로그 주인 시리우스가 요즘 바쁜지…….”
“반년만 기다리시면 다시 활성화될 겁니다.”
강우는 우기준과 잡담을 나눴다. 열성적인 과학자를 만나면 그 열정이 전염된다. 우기준 같은 과학자가 있기에 이 나라의 과학기술은 발전한다.
손님을 맞이하고 있자니 마도환이 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