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3 #1 - 내 부하가 미친 듯이 유능하다 =========================
#1 - 내 부하가 미친 듯이 유능하다(13)
고블린 따위는 카이사르와 리나의 몸풀이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까놓고 말해서 미궁쥐와 함께 미궁 피라미드의 최하층에 있는 놈이다.
고블린이랑 괴물쥐를 붙여놓으면 7 대 3 정도의 승률을 지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가 아닌가.
덩치만 크지, 별 것도 아닌 괴물쥐에게 열 번 싸워서 세 번 패배하는 녀석들이라는 건 이미 말 다했다고 봐도 좋다.
“어떻습니까, 제 실력은.”
그런 고블린 네 마리를 수십 토막으로 만든 카이사르가 녹색의 피웅덩이 사이에서 살벌한 눈을 번뜩였다. 어지간히도 리나의 방해에 쌓였던 게 많았던 모양이다.
“지저분하다.”
“...!?”
“B1층은 별 볼일 없군. 준비한 식량에는 여유가 있으니 B2층으로 전진해보지.”
지저분한 사냥이라는 말이 적잖이 충격적이었는지, 카이사르는 꽤나 침울한 상태로 뒤따랐다.
B2층은 통로가 좁아지고 갈림길이 늘어났는데, 여기서부터는 지도가 없다면 길을 외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도적 클래스의 상위직업인 암살자 클래스의 리나가 있으니까 길 외우기 정도는 가볍게 해내리라 생각하고 B2층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편하기는 한데 뭔가 지루하네.’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저놈의 고블린이 뭐가 강하다는 거야?’
리나가 건성건성 던지는 단검에 푹 맞고 죽고, 카이사르가 우와아악 하며 휘두르는 장검에 우르르 베여 죽는다.
저런 고블린을 레이드보스 몬스터 사냥하듯 대했다는 게이머들의 말이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툭 치면 억하고 죽는 개복치처럼 보인다.
“다음 고블린은 내가 상대하겠다.”
나의 당당한 선언에 카이사르가 당황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안될 거 뭐 있나.”
“하지만 보스께서는... 알겠습니다.”
뭔가 찝찝한 반응인데.
카이사르와 달리 리나는 두 눈을 빛냈다.
“와아! 보스가 싸우는 건 처음 봐. 의외로 엄청나게 강한 거 아니야? 언제나 분위기 잡고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은거고수일지도 모르는 거잖아?”
이 녀석은 기대가 무겁다.
은거고수 소리 들으려면 얼마나 잘 싸워야 되는 건데.
뭐, 그래도 허접 소리는 안 듣겠지.
‘일단 마법검도 있고.’
매서운 브로드 소드의 절삭력은 장난 아니다.
검기라도 두른 것처럼 뎅겅뎅겅 마구 베어낸다.
이거라면 분명 고블린도 가볍게 벨 수 있다.
“마침 고블린이 오는군요.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보스.”
“힘내, 보스!”
카이사르와 리나의 응원에 힘입어 힘차게 전진했다.
코너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타난 고블린 한 마리가 이쪽을 발견하고는 흠칫했다.
1 대 3이라는 상황에 당황한 눈치였지만, 정작 앞에 나선 건 나 혼자뿐임을 깨닫고는 사납게 손톱을 내세웠다.
“덤벼라.”
고블린이 달려들자 나는 당황했다.
‘예상보다 빨라!’
뒤늦게 검을 뽑아 휘둘렀지만 공격은 성대하게 빗나갔다.
스치지도 않으면 고블린이 베일 일도 없다.
복부로 파고든 녀석이 손톱으로 내 몸을 그었다.
촤아악! 빠각!
고블린의 손톱이 부러졌다!
상점제 가죽갑옷의 방어력은 대단했다!
“하찮은 것. 이것이 돈의 힘이다.”
나는 다시금 매서운 브로드 소드를 휘둘렀다.
녀석은 당황하며 물러섰다.
공격을 해도 자신만 피해를 입을 뿐이면 언젠가 검에 베여 죽게 된다.
“와라.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주지.”
고블린은 꾸겍 소리를 내며 울부짖더니...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아니, 잠깐!’
순순히 내 손에 잡혀 죽어줘야지.
이 타이밍에 도망가는 건 너무하잖아, 인마.
고블린 한 마리도 못 잡고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놓칠까보냐!”
매서운 브로드소드를 힘껏 집어던졌다.
터엉. 데구르르.
성대하게 빗나가 벽에 부딘힌 검이 바닥을 굴렀다.
“…….”
나는 얌전히 검을 주워들었다.
고블린은 이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안 돼, 망했어!’
나는 내심 절규했다. 형편없는 내 전투력을 본 두 부하들이 실망할 모습이 두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특유의 살벌한 눈매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뭐지.
이거 지금 비꼬는 건가.
“솔직히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웠습니다.”
“그런가.”
“보스의 실력도 어느덧 적잖이 상승하였군요.”
나와 마찬가지로 이 대화가 이해되지 않았던 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서 질문!”
“뭐냐, 계집.”
“계집이 아니야! 리나라고! 아니, 그보다.”
리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예전의 보스는 얼마나 허접했기에 이런 게 기대 이상이라고 평가받는 거야?”
이런 게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형편없이 싸웠네.
“목숨이 위태로운 치명상을 입지도 않았고,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기 직전의 중상을 입지도 않았다. 무기도 잃어버리지 않고 제대로 회수했고, 패닉을 일으키지도 않았지.”
배경설정 상의 빌헬름 마이어는 고블린 한 마리와 싸워도 패닉에 빠져 무기를 잃고, 중상 내지는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약해빠진 거냐.
장난 아니게 약하잖아 그거.
“어... 보스 무슨 병 걸렸어?”
“아직까지 아무 말씀은 없으셨지만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야? 보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자 입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신경 쓰지 마라.”
차마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병도 안 걸렸으면 그냥 허접한 걸로 인식되는 거잖아.
차라리 병자라서 약하다는 인식이 백배는 이득이다.
“보스. 몸을 써야 하는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이런 하찮은 일에 건강을 상하게 해서는 대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음. 알겠다.”
“그럼 오늘의 미궁탐사는 이쯤에서 마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초행길에 야영까지 하는 건 힘들거라고 생각합니다.”
딱히 돈 벌려고 들어온 건 아니었고, 퀘스트 완료에 필요한 고블린의 코도 꾸준히 수집해왔다. 돌아가도 상관없는 상황이기는 한데...
‘정말로 괜찮은 건가!?’
리나가 ‘보스는 몸이 안 좋구나.’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뭔가 만회할 기회같은 걸 마련하고 싶다.
그렇다고 다시 고블린과 싸우겠다고 했다간 카이사르가 정색하고 화를 낼 것 같다.
‘어쩔 수 없군.’
여기선 작전 상 후퇴다.
체면 따지다가 진짜 개망신을 당할지도 모른다.
“리나. 돌아간다.”
“응, 보스.”
“…….”
“왜 그래? 보스. 뭔가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돌아가려면 네가 앞장서야 하지 않는가.”
리나는 어리둥절해하였다.
“내가 왜?”
“암살자는 도적의 상위클래스. 길 찾기나 지형감각 따위는 당연히 익힌 거 아닌가.”
“그런 거 모르는데.”
뭔가 대화가 잘 맞물리지를 않는다.
나는 전제조건을 확인했다.
“암살자는 도적 클래스의 스킬을 배운다. 맞는가?”
“응, 맞아.”
“너는 암살자 클래스다. 맞는가?”
“그것도 맞아.”
“그럼 도적 클래스의 스킬도 배운다. 맞는가?”
“아닌데? 전혀 모르는데?”
뭐가 문제인지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설마 배우고 싶지 않아서 배우지 않았다, 이거냐?”
“당연하지. 촌티 나게 무슨 암살자가 도적 스킬을 배워?”
“참고로 묻겠다만, 습득한 직업스킬 내역은?”
리나는 당당하게 오른손으로 브이를 만들며 씩 웃었다.
“은신! 잠입! 그리고 암살!”
없다.
뭔가 그 전에 필요한 게 잔뜩 있는데 그런 게 없다.
“자물쇠 따기, 길 찾기, 매혹. 그런 기본스킬들은...”
“몰라!”
“…….”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충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일단은 암살자니까.”
그야 뭐, 도적 상위 클래스이긴 하니까.
어떻게든 찾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리나를 앞세워서 걷기 시작했다.
뭔가 나타나는 고블린의 수가 늘어난 것 같은데.
리나와 카이사르가 슥슥 해치워서 그냥 얌전히 따랐다.
죽은 시체에 꼬인 놈들일 수도 있잖아.
“귀찮은 놈들이 점점 자주 나타나는군.”
...몬스터의 출현빈도가 높아졌다.
그것도 뭐 시체에 꼬인 놈들이 많아서, 라고 납득했다.
그리고 층을 넘어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짜잔!”
“뭐가 짜잔이냐. 내려가는 계단이잖아.”
정반대로 왔다.
“믿을 수가 없군. 길치 어쌔신이라니…….”
“으으. 길치 아니거든? 그냥 좀 어둡고 답답한 곳이라서 길 찾기가 힘들 뿐이야. 애초에 여긴 죄다 흙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길 찾기가 힘들잖아.”
“그럼 네가 길을 찾기 위한 전제조건은 뭐냐.”
리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지도!”
지도가 없으면 길을 찾을 수 없는 시점에서 이미 뭔가 여러 가지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뭐, 결함이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쪼기도 좀 그러네.
리나를 대신해서 내가 길을 찾고 올라간 다음, 지도라서 한 장 구매하는 걸로 하자.
* * *
“보스.”
“뭐냐.”
“보스도 길 못 찾잖아.”
3시간 뒤, 리나의 지적에 나는 입을 꾹 닫았다.
어쩔 수 없잖아.
길은 리나가 알 거라고 생각하고 전혀 안 외웠는걸.
“이쯤에서 제 유능함을 과시할 때가 되었군요. 보스. 퇴로는 제가 확보하겠습니다.”
“역시 믿을 사람은 카이사르뿐인가. 기대하겠다.”
이 녀석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것 같다니깐.
역시 첫 부하가 최고다.
* * *
카이사르는 3시간에 걸쳐 길을 안내하였다.
그리고 선언했다.
“못 찾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B2층부터 신속하게 미아가 되었다.
“풉. 퇴로는 제가 확보하겠습니닷.”
“닥쳐라, 계집.”
쏘아붙이기는 해도 쪽팔린 건 아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카이사르가 부끄러워하다니, 이건 상당히 드문 광경이네.
드물다고 할까, 살벌한 안면으로 저딴 표정 지으니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어쩔 수 없군. 이럴 때의 탈출방법은 하나뿐이다.”
“보스. 뭔가 묘안이라도 떠오르셨습니까?”
“간단하다. 길을 아는 사람이 올 때까지 얌전히 여기서 대기한다.”
구조라도 받아야지, 뭐 어째.
“만약에 대비해서 식량은 이틀 치를 준비해왔지. 문제는 없다.”
“역시 보스는 대단해! 하지만 지도를 준비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리나. 입 닥쳐.”
돌직구를 퍽퍽 던지면 내 멘탈이 흔들리잖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지?”
카이사르와 리나는 나쁘지 않은 의견이라고 말했다.
그럼 정해졌군.
모험가가 나타날 때까지 야영이라도 하면서 있어야지.
“그럼 불을 지피고 식사라도 하지.”
“불은 어떻게 지피면 됩니까?”
카이사르의 물음에 나는 리나를 돌아보았다.
“응? 그런 거 모르는데?”
“…….”
나는 배낭을 뒤적거렸다.
다행히도 긴급용 캠프파이어 키트가 하나 있었다.
바닥에 대고 버튼을 누르자 팩이 부풀어 올랐다.
화르륵!
캠프파이어 키트는 무사히 작동했다!
찬바람을 쐬며 노숙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훌륭하십니다, 보스. 오늘 보스가 모여주신 모습 중에 가장 의지할 수 있고 든든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오, 대단해. 보스는 캠프파이어 키트를 잘 다루는 재능이 있었구나?”
기쁘지 않아. 그딴 칭찬 받아도 조금도 기쁘지 않아.
역으로 불쾌하다고.
이건 뭐냐. 신종 괴롭힘 같은 거냐?
“배나 채우고 자라. 불침번은...”
“저희가 알아서 서겠습니다. 보스는 편히 취침을.”
“맡겨달라고? 보스.”
돌아오는 즉답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딱히 서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 예의상 한 번만 더 물어볼까.
“정말로 괜찮겠나?”
카이사르가 내 물음에 멈칫하더니 질문을 던졌다.
“미궁에서는 불침번을 설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글쎄.
막상 그런 소리를 들어도 팟, 하고 떠오르는 건 없다.
“보통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보통이 아닌 경우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네가 죽을 일은 없다.”
기껏해야 B2층에서 뭐가 나온다고.
지금 이 층에서 제일 강한건 너랑 리나일 텐데.
“그럼 커다란 위험요소는 없는 겁니까? 어둠 속에서 암흑룡이 나타나거나, 지면이 푹 꺼진다거나.”
“없다. 그런 일이 있으면 진즉에 모험가 길드 차원에서 손을 쓴다고 말하지 않았냐.”
“잘 됐군요. 그럼 보스의 경험을 늘릴 기회입니다. 불침번을 서십시오. 특별히 첫 번째 차례는 보스에게 양보해드리겠습니다.”
이 새끼, 불침번 서는 게 쫄려서 물어본 게 아니라 나도 불침번 시키려고 물어본 거였네.
“리나는 아직 성장기인데. 그냥 자면 안 돼?”
나는 잠깐이나마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리나는 아직 어리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카이사르도 어리다.
“리나. 너 몇 살이냐.”
“16살.”
“카이사르보다 많군. 불침번 서라.”
리나는 진심으로 경악하였다.
“에에엑! 말도 안 돼! 저 얼굴로 나보다 어리다고? 보스, 농담하는 거지? 아무리 봐도 30살 아저씨잖아.”
“뭐야? 확 죽여 버린다, 계집!”
“헤헹. 나이도 어린 게 뭐라는 거야? 리나 누나라고 불러야지.”
“웃기는 소릴 하는군. 빈유 주제에. 12살 껌딱지도 네년보단 클 거다.”
“앙? 내 가슴에 불만 있냐 짜샤!”
노안과 성장미숙아의 조합인가.
뭐, 열 받으면 성격은 비슷해지기도 하고.
나쁘지 않은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길 찾기도 못하는 점이 서로 똑같잖아.
하하, 고놈들 참 사이좋네.
“…….”
전투상황 외에는 사이좋게 쓸모없기도 하고.
제기랄.
============================ 작품 후기 ============================
보스(길치) 학살자(길치) 암살자(길치)
그렇습니다.
파티구성원 전부 길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