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1 - 내 부하가 미친 듯이 유능하다 =========================
#1 - 내 부하가 미친 듯이 유능하다(14)
두 머저리들과 함께 불침번을 선 뒤, 피로한 몸을 앉혀둔 채 멍하니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아무나 좋으니까 빨리 좀 안와주려나.’
무념무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때우는 건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보다 못한 리나가 넌지시 말을 건넬 정도였다.
“보스. 정 심심하면 나한테 기술이라도 배울래?”
[암살자 리나가 기술전수를 희망합니다.]
[기술전수에 응할 시, 리나의 스킬 중 하나를 0레벨로 습득하여 숙련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스킬레벨이 1에 도달하면 기술전수가 완료되며,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술전수자에게서 특별한 가르침을 받지 않는 한, 기술의 성장가능성은 원본보다 크게 줄어듭니다. 독자적인 깨달음이 없다면 스킬한계를 돌파할 수 없습니다.]
기술전수 이벤트!
어지간한 호감도나 충성심이 없다면 쉽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리나가 기술전수를 희망했다.
이건 정말 기가 막히는 상황이다.
애초에 기술전수는 NPC한테 골드를 뭉텅이로 안겨주면서 이 돈 받고 마음에 들면 알려줘도 좋고, 싫으면 마시고... 하는 저자세로 사정을 해야 간신히 이루어진다.
그걸 딱히 알려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심심하니까 배울래? 라고 묻는 건 정말 말도 안 되게 운 좋은 사태였다.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환영이다.”
“의욕적이어서 좋네!”
“어떤 기술을 가르쳐줄 셈인가.”
리나는 싱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보스는 암살자한테 가장 중요한 스킬이 뭐라고 생각해?”
“암살.”
“정답! 그런 고로 보스는 암살스킬을 전수받아!”
띠링!
[리나의 암살스킬을 전수받기 시작합니다.]
나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수습했다.
고블린 하나도 못 잡는 나한테 암살이라니.
배우면 좋겠지만 저걸 배우는 과정이 문제다.
“암살의 묘리는 목표가 눈치 채지 못하게 단숨에 숨을 끊는 것! 찌르면 죽는 급소를 숙지하고 노리는 곳을 정확하게 찌르는 게 암살을 성공시키기 위한 기본수련이야.”
“그런가.”
“자. 그런 의미에서 이거, 천 번만 찔러.”
리나는 벽에 단검으로 흠집을 내고는 팡팡 두들겼다.
홧김에 리나를 찔러버릴 뻔했다.
미친... 천 번이나 검을 휘두르는 게 말이 돼?
“그런 짓을 했다간 검의 내구도가...”
“딱히 벽을 있는 힘껏 찌르라는 게 아니야. 검의 내구도가 닳지 않도록 거리를 둔 채, 있는 힘껏 찌른 검이 벽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정도를 유지하는 게 1회야.”
“실수로 벽을 찌르면?”
“암살대상의 급소를 과하게 찔렀네! 피가 분수처럼 튀면서 흔적이 남고, 무기가 특정당할 거야! 어이쿠, 보스의 몸도 피투성이가 됐어! 은신에 실패하면 틀림없이 잡혀 죽겠네!”
“…….”
그런 의미에서 벽에, 정확히는 허공에 대고 찌르기를 시작했다. 듣기만 해도 어렵다고 느꼈던 수련은 실제로 해보니 훨씬 더 힘들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검이 벽에 닿고, 조금만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하면 속도가 안 실리거나 벽과 너무 멀리 찔렀다고 횟수 누적이 되지 않았다.
결국 찌르기를 오백 번이 넘게 하고도 정타로 유효하게 판정된 횟수는 이백 번도 채 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팔이 부들부들 떨려서 찌르기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아하핫! 보스는 암살의 재능이 없는 것 같아!”
“..그만두지.”
“잘 생각했어. 솔직히 시간낭비 같았거든!”
나한테 이 짓거리를 시킨 장본인이 그딴 소리 하냐!
[기술전수가 종료되었습니다.]
[암살스킬 0레벨의 숙련도를 3% 달성했습니다.]
[스킬 습득에 실패합니다.]
엥. 그렇게 찔러댄 게 3%밖에 안 된다고?
이상하잖아.
애초에 천 번 중에 이백 번 조금 안 되게 성공했으니까 20% 조금 안 되는 숙련도는 습득해야지.
“보스. 저쪽에 뭔가..”
“입 다물고 있어라, 카이사르.”
이 새끼는 생산적인 말을 별로 안 하니까 쿨하게 씹었다.
“그보다 리나. 암살스킬은 별로 감이 안 오는데.”
“당연하지. 보스는 암살스킬을 습득하기 위한 기본기조차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탈락했으니까!”
“...천 번 찌르기 다음에는 뭐가 더 있었던 거지?”
“목표의 급소를 포착하기 위해 대상을 보자마자 신속하게 급소 열 개를 부르는 훈련. 급소를 찌르기 위해 신속하게 거리를 좁히는 훈련. 목표의 이목을 돌리는 훈련. 그리고...”
“그만. 더는 듣고 싶지 않다.”
“아하하. 듣기만으로 질려버린 거야? 그럼 좀 더 날 대단하게 여기라구. 보스를 괴롭게 만드는 암살스킬을 간단하게 사용하는 능력자니깐. 엣헴.”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종적으로는 귀엽다. 미궁에서 하루 야영하고 꾀죄죄한 몰골이 되었는데도 귀여우니, 멀쩡할 때는 얼마나 더 귀여워지는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고 할까.
‘그래. 길 찾기 좀 못해도 어때.’
리나는 성품이 고와서 암살스킬도 전수해주려고 하고, 귀엽기도 하고, 애교도 잘 부리고, 보기만 해도 즐겁고, 키울 맛도 나고 기특한 부하인데.
그에 비해 첫 부하라는 카이사르는 어떤가. 표정도 험악하고, 언제나 사고만 치고, 툭 하면 뭔가 죽이거나 박살내고 있고, 멍청한 개소리로 피곤하게 만드는 병신이다.
“카이사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지?”
“모험가들이 온 것 같습니다.”
“그걸 진즉에 말했어야지! 멍청한 녀석!”
카이사르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헉 깜짝이야.
네가 닥치라고 해서 못 말했잖아, 라고 항의하는 눈을 보니 나도 모르게 심장이 쫄깃해졌다.
[돌발 이벤트! 미궁의 모험가를 잡아라!]
[30분 이내에 제 발로 나타난 모험가들을 잡지 못할 시, 다음 모험가는 언제 나타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모험가를 붙잡을 경우, 출구로 향하는 길을 듣거나 출구까지의 안내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교섭결과는 별개의 일이지만, 놓치면 교섭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더 멀어지면 제 발로 나타난 구명줄을 놓친다.
이놈이 눈을 치켜뜨건 눈깔 빔을 쏘건 알 게 뭐야.
나는 카이사르의 살벌한 눈매를 무시하고 재촉하였다.
“지금은?”
“저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쫓아라.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
카이사르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나한테 까인 분풀이라도 하려는지 쿵쾅거리며 지면을 박살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와. 온 체중을 실어 지면을 박차며 가속력을 얻는 질주네. 저 스킬 배우면 진짜 빨라지겠다.”
“익히고 싶은가?”
“아하하, 설마. 보스도 그렇게 금방 솔깃해하지 말라구. 저건 무식하게 힘으로 속도를 올리는 거니까, 근력이 부족하면 효과도 부족하고 금방 지쳐버리는걸.”
요령과 효율을 중시하는 암살자나 기본기조차 갖춰지지 않은 내가 익힐 스킬은 아니라는 거다. 근데 도대체 얼마나 거리가 벌어졌으면 아직까지 잡지를 못하고 있지?
“보스. 그보다 여기서 계속 서 있으면 후회할 걸?”
“어째서지? 카이사르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아니, 걱정되는 건 카이사르가 아니라 우리들인데.”
리나는 아주 중대한 오류를 지적하였다.
“카이사르는 길치지?”
“그렇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지 기억하면서 달릴 리가 없겠네.”
그러네. 먹이를 쫓는 사자처럼 크와아왕와아왕 하면서 앞만 보고 뛰겠지.
…….
…….
…….
저 새끼 놓치면 모험가들과 합류한 카이사르를 찾는 이벤트가 연달아 발생한다! 일을 두 번 하려는 게 아니면 지금 쫓아가야 해! 전력으로 달린다!
“허억.. 허억..”
3분 만에 지쳤다.
“보~스! 아이 참, 여기서 퍼지면 어떡해!”
“수, 숨이...”
“앗차! 보스가 병에 걸린 걸 잊고 있었어. 미안해!”
무릎을 구부리며 헐떡이자, 리나가 안절부절 못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보스, 너무 무리해서 심장발작으로 죽는 거야?”
“...안 죽는다.”
“어쩔 수 없네. 일단은 저 바보가 모험가들을 데려와주길 기도해야겠어.”
결국 체력이 방전된 나 때문에 추격은 실패했다.
얌전히 체력을 비축하기를 얼마간.
어디까지 갔는지 가늠도 안 돼서 기다리자 시스템 알림이 나타났다.
[하수인 카이사르가 모험가 무리를 붙잡았습니다.]
오오. 역시 몸 쓰는 일은 이 녀석이 최고다.
일단 여기까지 해냈다면 뒤는 걱정없다.
합류야 모험가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해낼 거고.
교섭이야 문제없다.
돈이라면 내가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고.
리나는 귀여우니까 불쌍한 척 하면 도와주겠지.
그것도 안 통하면 카이사르가 멱살 잡으면 될 거다.
이걸로 미궁에서의 고생도 끝이다.
고블린과의 전투보다 길 잃기로 한 고생이 더 많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1 대 99 정도가 아닐까.
‘과연. 이래서 미궁인가.’
다음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안내를 해줄 사람을 구하거나, 지도를 구매하거나, 길 찾기와 지도제작 스킬을 리나에게 습득하도록 만들어야겠다.
“여기서 나가면 뭘 하고 싶냐.”
“그런 건 왜?”
“기술을 전수해주려는 마음이 기특하더군. 소소하나마 나름의 답례를 하려 한다.”
리나는 두 손을 번쩍 들며 기뻐했다.
“와아! 보스 최고!”
“내가 좀 잘나기는 했지.”
리나의 웃음이 애매해졌다.
미안하다.
이 아저씨가 분위기 좀 탔어, 인마.
“리나는 맛있는 걸 먹고 싶어!”
“좋다. 최고의 요리를 먹게 해주지.”
리나가 갑자기 불안해하며 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뭐냐.”
“내 소시지를 먹어라, 같은 소릴 하려는 건 아니지?”
“...그딴 소릴 한 녀석이 있었냐?”
“응.”
“누군지는 몰라도 변변찮은 녀석이군. 이런 어린 몸에 욕정을 하다니.”
리나는 한결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동시에 볼을 부풀리며 못마땅해 하기도 했다.
하나만 해라, 산만한 녀석아.
“넌 너무 어리다. 그런 일에 엮일 나이는 아니야.”
“그럴 나이는 몇 살인데?”
“18살.”
“18살이 되면 그런 일에 엮여야 하는 거야?”
“음... 되도록 엮이지 말았으면 한다.”
일단은 내 부하니까.
내 소시지를 먹어라, 같은 소리를 하는 녀석과 엮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헹.. 보스는 의외로 착한 사람이야?”
“...내 외견은 대체 어떤 인간으로 보이는 거냐.”
“날마다 50명씩 죽이는 사람?”
시발. 그건 흉악 연쇄살인마를 넘어서 그냥 학살자잖아.
그렇게까지 못생긴 거냐.
아니, 아니지. 짐작가는 구석이 없지는 않다.
‘보스가 되면서 스킬도 하나 생겼지.’
1레벨마다 직업관련 스킬을 하나씩 습득하거나, 기존의 스킬을 강화할 수 있다.
덤으로 지금의 내 레벨은 딱 1레벨.
‘직업 : 보스’가 제공하는 가장 기초적이면서 핵심적인 스킬이 있다.
[보스의 기백] [등급 : 일반] [분류 : 직업스킬]
[숙련도 : 기초 - 레벨 1(0.02%)]
[기본 : 보스는 절대적인 위엄을 지닌 자. 부하에게는 존경을, 적에게는 공포를 유발하는 존재입니다. 이 스킬은 보스가 지녀야 할 위엄을 자연스레 강화시켜줍니다.]
상세효과를 추정하자면 모든 행동과 발언에 자연적으로 위엄 보정이 이루어진다는 거겠지. 카리스마 능력치의 효과를 이중으로 받는다고 봐도 된다.
현재로서는 숙련도도 형편없이 낮으니 보정치는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스킬로 제공받는 추가적인 위엄량은 장난 아니게 높아질 거다.
역시 리나가 말한 날마다 50명을 죽이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말은 과장이 있겠지만, 조금은 남보다 험하게 보이겠지.
그럴 거다. 암. 그래야만 한다.
아니면 내 안면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다는 거냐.
아... 진짜 불안하네.
나중에 거울이라도 봐야지.
카이사르가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군.
뭔가 심심하고.
다른 할 거라도 찾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띠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알림창이 떴다.
[카이사르가 모험가 한 명을 죽였습니다.]
나른해져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심심하지 않게 해줘서 겁나 고맙다.
카이사르 개새끼야.
============================ 작품 후기 ============================
많은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선호작과 추천에 힘입어 집필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현재 작가는 79화(!)를 집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