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1 - 내 부하가 미친 듯이 유능하다 =========================
#1 - 내 부하가 미친 듯이 유능하다(24)
성주를 암살해서 공짜로 땅과 건물을 얻는다는 발상은 상당히 미쳤지만, 땅과 건물을 공짜로 얻을 방법을 모색하는 건 나름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혹시 이런 거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거래 말씀이시죠?”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문제 있는 매물. 그런 게 있다면 이쪽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그 대가로 매물을 받는 거다.”
시청직원은 내 제안에 상당한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재밌는 제안이네요. 마침 그런 골치 아픈 매물이 아주 많기는 하거든요.”
“운이 좋군. 어느 지구의 매물이지?”
“동쪽지구에요. 이 도시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동쪽직구가 대부분을 차지하죠.”
어찌 되었든 사정은 이러했다.
“동쪽지구에는 빈민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모험가나 범죄자들도 널려있죠. 시청과 정식으로 거래한 토지를 수수료를 아끼고자 불법적으로 판매하거나 강탈하는 경우가 잦아요.”
“세금도 제대로 못 걷었겠군.”
“네. 집주인이 몇 년 전에 죽었거나 실종된 경우가 태반이고, 현재 거주자들도 간간히 강자가 있어요. 경비대를 투입하면 엄청난 사상자가 나올 테니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죠.”
뭐, 예상한 그대로의 상황이었다.
“꼭 우리가 아니더라도 전직기사나 현직기사에게 매물을 팔아치우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양지에서의 신원이 확실한 사람에게 매물을 팔면 인근의 강자들이 모조리 덤벼들거나 집단으로 횡포를 부리거든요. 다들 진저리가 나서 동쪽지구에는 얼씬도 않죠.”
“그러니 보스라고 불리는 내게 매물을 넘기겠다, 이건가.”
“그런 셈이죠.”
“수완이 좋군. 시청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시청직원은 피식 웃었다.
“영리한 시청직원께서 친히 의뢰 형태로 처리하고 싶은 강적은 누구지?”
“클레드라고 부르세요. 매물에 틀어박혀서 골치 아프게 만드는 녀석은 전직모험가에요. 이름은 토마. 한때는 B7층까지 진입했는데 동료를 잃고 미궁이 두려워 폭력배가 됐다네요.”
“잘도 거기까지 조사해주었군. 정보력을 믿고 하는 추가질문이다만. 주력 무기나 무장상태, 매물에 설치한 트랩 따위의 정보는?”
클레드는 잠시 고민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이건 무슨 의미지?”
“추가정보는 정보료를 받아요. 힘들게 모은 정보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는 좀 그래서요.”
“기가 막히게 수완이 좋군. 매물의뢰를 받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지?”
클레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뭐, 그렇게 끝나는 거죠. 돈까지 넉넉하게 들고 올 정도로 넓은 땅과 건물을 사려는 의지가 확고한 분이 이대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지만요.”
“의뢰를 무시하고 매물만 차지한다면?”
“상관없어요. 적어도 전에 살던 사람들보단 깨끗하게 쓸 것 같네요. 얼굴도 알았으니까 세금이랑 벌금 달라고 하기는 더 쉽겠고요.”
일처리를 하는 스타일이 참 마음에 들었다.
FM처럼 꽉 막히지도 않았다.
동시에 철저한 정보조사와 냉정한 판단력도 갖췄다.
어디 그뿐 만이랴.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머니도 채울 깜냥과 지혜가 있다.
‘덤으로 제 이득도 꽁꽁 숨겨두었지.’
만일 클레드의 말에 내가 반발심을 품고 매물을 독차지한 채 틀어박혀도 그녀에게 나쁠 건 없다.
세 치 혀로 전직모험가 토마를 무상으로 처리했다며 이를 상부에 공적으로 올려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 테니까.
하다못해 그녀에 대한 상부의 평가가 높아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자 남는 장사였다.
“영리한 게 아주 마음에 드는군. 언젠가 갈 곳이 없거나 이직을 희망한다면 흑산회를 찾아와라.”
“어머. 스카우트 제의인가요?”
“그렇다. 전직 시청직원을 활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니까. 혹여나 골탕 먹이고 싶은 상사가 있다면 흑산회에 의지하길 권장하지.”
클레드는 살짝 진심어린 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흑산회에 의지하면 그 상사는 어떻게 되나요?”
“물리적 살인과 사회적 살인. 원하는 쪽이 이루어지겠지.”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네요. 잊지 않고 기억해둘게요.”
마냥 장난어린 반응만은 아니다.
진심이 엿보인다.
시청에는 클레드를 꺼림칙하게 할 상사가 있는 모양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 녀석에게 정말 감사한다.
상사가 클레드를 압박할수록 그녀는 흑산회를 떠올리게 될 테니까.
관계만 적당히 유지한다면 언젠가 때가 되거든 클레드는 제 발로 흑산회를 찾아오리라.
“의뢰는 수락하겠다. 지도만 넘겨라.”
“어머. 추가정보는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별 상관없다.”
B7층이라면 전작을 기준으로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카이사르 혼자라면 좀 힘들었을 터.
허나 암살자 리나가 있으니 승산은 차고도 넘친다.
“정말로 괜찮겠어요?”
“조만간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 가만히 앉아서 실적이나 올릴 준비나 해라.”
“어휴. 거기까지 들킬 줄은 몰랐네요. 정말 방심할 수 없는 분이시네. 보스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죠?”
“빌헬름.”
“잘 가요, 빌헬름 씨.”
용건은 마쳤으니 시청에 볼 일은 없다.
우리는 시청을 나왔다.
갑자기 리나가 내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보스는 저런 여자가 좋아?”
“...뭐?”
“남자는 다 똑같아. 가슴이 큰 여자가 좋은 거지?”
뭐라는 거야, 요 작은 것이.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넌 너무 어리군.”
“성장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그것도 포함해서 여러 가지 의미로.”
조금은 기분이 풀렸는지 리나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3년만 기다려줘, 보스. 그년보다 가슴도 크고 나이도 어린 굉장한 미녀가 될 테니까!”
“그거 참 기대되는 말이군.”
솔직히 클레드보다 백배쯤 기대가 된다.
장래가 기대되는 미소녀에게 구애를 받고 있다고.
게임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행복한 일이다.
‘조금 내성이 생겨버렸지만.’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이었을까.
리나가 볼에 바람을 넣으며 불만을 표했다.
“뭐가 문제야?”
“제일 큰 건 나이로군.”
“얼마나 늙어야해?”
딱히 늙은 게 좋다는 건 아닌데.
그냥 니가 어린 거잖아.
외견으로 보면 13살인 외모는 좀 아니지 않냐.
“지금도 나쁘지 않다.”
“정말? 기뻐! 보스가 최고야!”
까치발을 들며 매달려 볼에 뽀뽀를 쪽 한다.
이런 귀여운 모습을 보면 엄한 생각은 할 수가 없다니깐.
그냥 어린 손녀의 재롱을 보는 기분만 든다.
이 나이에 갑자기 무슨 할아버지 흉내냐고?
게임에서 보낸 시간만 100년이다.
육체나이랑은 별개로 뇌 연령은 이미 할아버지란 말이지.
[E급 업적 의뢰생성자 달성!]
[당신은 시청직원 클레드와의 교섭으로 자신이 원하는 이득을 간단히 취하면서 상대의 호감도 살 수 있는 의뢰를 유도해내었습니다.]
[교섭스킬을 습득합니다.]
[교섭스킬의 레벨이 업적달성에 의해 급격히 상승합니다.]
[교섭스킬의 숙련도가 중급 숙련이 되었습니다.]
동쪽지구로 가는 길에 재미난 시스템 알림도 떴다.
[당신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단순한 통찰력을 넘어선 간파능력을 발휘해 본래 얻을 수 없는 이득을 취했습니다.]
[당신의 활약에 확장 능력치 ‘간파’가 개방되었다!]
존대인지 반말인지 하나만 해라.
어수선스럽긴.
아무튼 간파 능력치는 카리스마 못지않게 좋은 능력치다.
간파력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예상치 못한 도움을 주는 능력치다.
당장은 게이머 본연의 간파력으로 능력치를 습득했지만, 일정 수치 이상의 능력치가 쌓이면 능력치 보정으로 시스템적인 간파정보가 제공되기도 한다.
‘강적들이 그래서 무섭지.’
진정한 강적들은 확장능력치를 잔뜩 지녔다.
동급대비 실력이 엄청나다.
남보다 비상하게 맷집이 좋거나, 감각이 예민하거나 한다.
그런 게 확장능력치의 힘이다.
카리스마와 간파라는 두 개의 확장능력치를 지닌 게 얼마나 큰 힘이 될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실감할 거다.
‘거리의 분위기가 달라졌군. 벌써 도착인가.’
동쪽지구에 접어들자 대로변부터 분위기가 변했다.
이쪽은 미궁도시 브람 시에서도 버려지다시피 한 구역.
쓰레기들을 알차게 모아놓은 장소다.
치안도 나쁘고 범죄자들이 우글거린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다.
얕보이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살 수는 있다.
위험한 놈들의 영역만 넘지 않는다면 말이다.
토마는 그런 위험인물 중 한 명이다.
기사전력이 아니면 상대하기 힘든 강적 취급을 받는다.
“토마에 대한 정보를 모아라.”
카이사르와 리나, 레이브는 각각의 방식으로 토마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카이사르는 지나가던 행인의 멱살을 붙잡고 윽박질렀다.
행인은 두려움에 떨며 마구 무어라 말해댔다.
카이사르는 행인을 풀어주고는 들은 정보를 전했다.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
뭘 하러 갔다 온 거야, 이 녀석은.
다음은 리나.
리나는 카이사르보다는 쓸 만한 정보를 캐왔다.
그녀는 토마의 주거지 근처 주민에게 탐문을 했다.
“토마는 대외활동을 잘 안한다던데. 별도의 수입원도 만들지 않는 걸로 봐서 모아놓은 돈으로 살고 있나봐. 식량도 한 번에 잔뜩 구매한대.”
“미궁공포증에 제대로 걸렸군. 경계심도 많고 신중한 타입인가.”
“주민들 말로는 성격이 굉장히 거칠고 공격적이래. 주거지 안에서 마주치면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일단 칼질부터 하고 본다던가?”
확실히 유용한 정보였다.
결정적이지는 않아도 활용가치는 있다.
토마는 동료가 없는 타입이다.
그를 도와줄 이웃이나 다른 강자도 없을 거다.
전투에 돌입하면 상대는 분명 토마 한 명이 되리라.
“잘했다.”
“헤헹. 나한테 걸리면 이 정도야 껌이지!”
“그보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나는 피범벅이 된 리나의 볼을 보며 물었다.
“볼에 묻은 그건 누구 피냐?”
“응? 토마의 이웃주민.”
“…….”
도대체 어떤 형태의 대화가 오갔는지, 토마의 이웃주민은 지금쯤 살아 있는지.
궁금한 건 많지만 시간관계상 참기로 했다.
마지막은 레이브.
요 녀석은 행인을 협박하지도, 주민을 협박하지도 않았다.
대신 토마의 집에서 나온 쓰레기를 뒤졌다.
“술병이 많았어요. 토마는 언제나 술에 취해있을 거예요. 음식포장지는 마른 건빵 포장지 따위였어요. 식사의 질도 나쁘니까 몸 상태도 안 좋을 거예요.”
정말 예상치 못하게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심지어 이게 전부가 아니다.
레이브가 습득한 결정적인 정보는 따로 있었다.
“피 묻은 천도 있었어요. 양이 심상치 않았어요.”
우리는 피 묻은 천을 확인해보았다.
“출혈량은 많지 않습니다. 검게 죽은피. 몸이 병들거나 부상을 입어서 탁해진 피일 겁니다.
“살인광의 말 대로야. 사람을 죽여 생긴 피를 닦은 흔적은 아니야. 몸이 굉장히 안 좋은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의 옷가지나 흔적은 보이지 않았어요. 마당에 묻었을 가능성도 낮아요. 흔적을 감추려고 했다면 이 천도 마당에 같이 묻었지 않았을까요...?”
세 사람의 정밀한 분석결과를 보고받았다.
나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처음이군. 너희가 쓸모 있다고 생각한 건.”
레이브는 고개를 푹 숙이며 기쁨을 감췄다.
반면 카이사르와 리나는 떫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칭찬과 욕을 동시에 들어서 그렇겠지.
“상대는 오랜 기간에 걸친 폐쇄적인 생활습관과 알코올중독 수준의 음주, 심각한 영양부족으로 인해 반병신이 된 전직모험가다. 강적이라 부르기도 그렇군.”
“보스. 제게 맡겨주시면 정면에서 놈을 박살내겠습니다. 퇴물 모험가 따위는 조금도 무섭지 않습니다.”
“아하하, 이 바보는 분명 정면으로 쳐들어가서 성대하게 깽판을 치려고 할 걸? 보스. 여기는 리나에게 맡겨줘! 암살자의 실력, 보고 싶지 않아?”
카이사르와 리나는 토마 살해에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나는 반사적으로 레이브를 돌아보았다.
어떤 말로 의욕을 드러낼지 듣고 싶어서였다.
“으, 으으.”
“…….”
레이브는 제발 보내지 말아달라며 애원할 기세였다.
뭐, 나라도 이 녀석에게 시킬 생각은 없다.
카이사르와 리나를 두고 냉정하게 고민해본 결과, 강적 토마 담당은…….
“너에게 맡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