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4 - 내 조직이 이상한 유명세를 얻었다 =========================
#4 - 내 조직이 이상한 유명세를 얻었다(8)
오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아서 풀렸다.
출근한 조직원이 날 보고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인사면 뭐라고 할지야 뻔하다.
“건강히 지내셨습니까, 보스!”
“보스?”
“엇, 손님입니까? 흑산회 아지트에 방문하는 손님이라니, 엄청난 거물이겠군요. 실례했습니다. 지금 바로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질풍같이 해서는 안 될 발언만 전부 쏟아내고는 조직원이 응접실에서 나갔다.
“…….”
“흑산회 보스라. 이거 재미있는 우연이군.”
“그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온 거냐.”
청일은 미심쩍어하면서 물었다.
“숙박업소?”
“흑산회 아지트다!”
청일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탁자에 은화를 놓았다.
“1박에 1실버면 되는가?”
“금화를 줘도 안 된다!”
“아쉽군...”
청일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1실버를 회수했다.
“역시 목적은 카이사르인가.”
“이해가 빨라서 좋군. 긴 말은 않겠다. 놈을 내놔라.”
“그리고는?”
“죽인다.”
“…….”
이 새끼 진짜 무섭네.
주인 없는 카이사르를 보는 기분이다.
굴러다니는 핵폭탄 같은 건가.
“사문의 명예를 소중히 한다. 무인으로서 좋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카이사르를 내놔라.”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지 않은가. 사제인 청학은 이러는 와중에도 미궁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카이사르를 내놔라.”
“이해하지 못했는가? 미궁에는 몬스터가 있다. 청학은 전 재산을 잃고 낙심한 상태로 미궁에 들어가 몬스터들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이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
청일은 이 이상 진지할 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카이사르를 내놔라.”
“…….”
아, 더는 무리.
진심으로 소름이 돋아서 말 섞기가 무서워.
“내놓지 않겠다면...”
“으윽.”
“이 아지트에서 무전취식을 하겠다!”
그것도 무서워!
하지만 방향이 잘못됐어!
“흥! 유감이지만 네가 이 아지트에 머무르더라도 카이사르와 마주치기는 어려울 거야!”
리나는 거들먹거리며 외쳤다.
“어째서지?”
“그 녀석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쁘니까!”
“과연. 그 아르바이트 장소는?”
“마초카..읍읍!”
“적에게 정보를 술술 털어 내다니, 무슨 생각이냐.”
리나의 머리 위로 뒤늦게 느낌표가 떠올랐다.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육안에 보인다.
시스템적 표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따금 사람 머리 위로 느낌표나 물음표 같은 게 올라오는 걸 보는 게이머 입장도 헤아려달란 말이지.
“뭐, 상관없다.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은 흑산회가 어떤 조직인지 알아보기 위한 것도 있으니까.”
“...!”
“호사가들의 소문은 그리 믿을 게 못 되지. 무인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 법. 말살대상에 흑산회를 넣을지의 유무를 오늘 결정짓겠다.”
터무니없이 오만한 발언이지만 말릴 수도 없다.
이 녀석, 초일류 검객 중에서도 ‘벽’을 넘기 직전이거나 이미 벽을 넘어선 절정고수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무자비한 검속은 나오지 않는다고.
그런 녀석이 한 번 결심을 품었다.
훼방을 놓아서 득이 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좋을 대로 보아라.”
“보스!”
“어차피 내게 꿇릴 건 아무것도 없다.”
불순한 물건을 취급하던 영업장은 대부분 손을 털었다.
돈 벌 방법이라면 그밖에도 잔뜩 있는 걸.
뭣보다 수중에 들어온 돈이 얼마나 많은데 푼돈에 연연해서 경비대한테 철퇴 맞을 짓을 해?
“그럼 견학을 부탁하지. 응접실은 충분히 본 것 같군. 장소를 옮기고 싶다만.”
“특별히 보고 싶은 곳이라도 있는가?”
“발 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보고 싶다만. 가능한가?”
켕기는 구석이 있다면 네 입으로 먼저 털어놓아라.
그런 압박을 하는 눈이다.
“가능하다.”
준비는 만전.
수상한 일과 연관된 물건 따위, 아무것도 없다.
“그럼 창고를 보고 싶군.”
“이쪽이다.”
나는 당당하게 창고를 공개했다.
“흑산회는... 왕국의 비밀창고라도 지키고 있는 건가?”
포션류는 온갖 최상급 물품들로 도배되어 있다.
무기와 방어구, 장신구는 전부 레어등급 이상이다.
기타 물품도 하나같이 진귀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이 도시의 시장과는 각별한 연을 쌓고 있지. 이 정도 물자를 지니고 있는 것쯤은 그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다.”
“으음.”
솔직하게 감탄하는 청일과 달리, 리나는 무지하게 찔려하는 얼굴을 하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기, 보스. 슬슬 후환이 두려워지는데.”
“들키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다.”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유서를 써라.”
“유서를 써야하는 거야!?”
솔직히 유서는 별 필요가 없겠지.
“읽어줄 사람도 없이 몰살당할 테니까.”
“으아앙! 리나는 죽기 싫어!”
시끄러. 낸들 저런 흉악한 살인병기 녀석에게 창고를 열고 시답잖은 변명이나 하고 싶은 줄 아냐. 시장의 권세라도 팔아먹어야 조금은 저놈을 안심시킬 수 있잖아.
“창고는 구경하고 싶은 만큼 봤는가?”
“충분하다. 다음은 아지트 내 숙소를 보고 싶군.”
“아지트 숙소는 간부 및 주요조직원의 사적인 영역이다.”
“그럼 공동공간을 확인하는 걸로 충분하다.”
“그 정도라면 야. 세탁실, 휴게실, 식당. 이거면 되겠지.”
나는 별 생각 없이 순회를 돌았다.
그리고 식당 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쾅 닫았다.
건빵을 먹고 있던 마족 그레이가 보였다.
“왜 그러지?”
“으음. 벌레 같은 게 있어서. 여긴 그만두는 게 낫겠다.”
“바퀴벌레라도 문제없다. 보이면 베어주지.”
나는 초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마족 그레이와 검객 청일.
붙으면 어느 쪽이 이길 수 있을까.
벌컥.
“어이. 기분 나쁘게 문은 왜.. 컥!”
쾅!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차 문을 닫았다.
등 뒤에서 명백히 수상하다는 시선이 꽂혔다.
“방금 목소리가 들렸는데.”
“아아. 그놈 꼴이 굉장하더군. 벌레가 잔뜩 매달려있어서.”
“벌레가 매달려있어!? 그건 좀 위험한 상황 같다만!”
네 눈에 마족이 띄는 것보다 위험한 상황은 없어.
흑산회가 마족을 조직원으로 삼는다.
이런 정보를 육안으로 목격하면 이놈이 뭐라고 생각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즉결처분!
그 자리에서 베여 죽이고도 남을 긴급 상황이다!
“거기서 비켜라.”
“으음.”
“비키지 않겠다면... 벤다!”
틀림없다.
저건 정말로 ‘저지를 때’의 눈이다!
나는 마지못해 문에서 비켰다.
이 정도로 시간을 끌며 대화가 들리도록 했다고.
분명 그레이도 알아서 눈치 채고 숨겠지.
끼이익.
청일은 식당에 발을 들였다.
다행히도 그레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제대로 숨어있는 모양이다.
청일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두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건빵봉지를 주웠다.
‘이런 멍청한...!’
건빵을 먹는 중에 숨었다면 부스러기도 남았을 터.
흔적을 쫓아가면 들킬 게 틀림없다.
심지어 착실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숨을 곳을 특정 짓는다.
이대로는 꼼짝도 못하게 들키게 생겼다.
기어이 테이블보 아래를 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정지했다.
‘봤다아아아아! 틀림없이 봤어어어어!!’
이젠 다 끝난 건가 싶을 즈음.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이만하면 충분히 둘러본 것 같군.”
“음?”
“실례가 많았다. 여태까지 흑산회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오해를 하고 있었군.”
“으으음?”
“이만 물러가겠다.”
청일은 바삐 걸음을 놀리며 아지트를 벗어났다.
창밖으로 슬쩍 보니 아예 전력으로 뛰면서 도망친다.
도대체 뭐였지?
나는 식당으로 돌아가 테이블보를 들췄다.
마족 그레이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마주쳤다.
“너 방금 뭐 했냐?”
“아무것도. 그보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거리냐. 얼굴에 멍이 들고 코피까지 터졌잖아.”
“멍청한 녀석이... 너 방금 죽다 살아난 줄이나 알아라.”
잘은 모르겠지만 청일이 흑산회를 향한 공격의사를 접은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째서인 걸까.
창고를 둘러보고 그레이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순순히 공격의사를 접다니.
위기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상쾌한 기분은 안 든다.
오히려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만 앞섰다.
* * *
청일은 창고에서 대량의 화약을 발견했다. 일전에 빌헬름 마이어가 블랙마켓 입구를 폭파시키려는 목적으로 잔뜩 구매하고 잊어버린 그 물건이다.
블랙마켓 급습전 이후에 혼란 속에서 대량의 물자가 반입되었던 탓에 화약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창고 한 구석에 묻혀버렸다.
레어 급 장비가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닐 지경인데 화약 따위에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청일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흑산회는... 왕국의 비밀창고라도 지키고 있는 건가?”
화약은 국가에서 엄격히 통제하는 물질이다.
잘만 활용하면 기사조차도 죽일 수 있다.
허나 빌헬름 마이어는 나른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도시의 시장과는 각별한 연을 쌓고 있지. 이 정도 물자를 지니고 있는 것쯤은 그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다.”
“!?”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흑산회가 시장과 손을 잡았다.
단지 거기까지라면 상관없지만 문제는 화약의 소지다.
경비대나 기사단이 아닌 흑산회가 화약을 지녔다.
화약을 공적시설에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미궁도시의 시장이 공적시설에 화약을 맡기길 기피한다면...
이유는 한 가지.
‘중앙정계에 반기를 들려고 하기 있기 때문인가!!!’
중앙정계의 뒤에 있는 건 수도의 대귀족들. 당대 알폰스의 국왕마저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다.
그들에게 반기를 든다는 건 국가를 전복시키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어찌 이런 충격적인 일이 있을 수가! 사문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국가전복의 음모라고. 쿠데타가 계획되고 있다는 걸 들었다고!’
사문의 명예를 더럽힌 악당들을 베러 왔다가 느닷없이 충격적인 국가전복의 음모를 깨달았다. 흑산회의 처분 따위는 더 이상 알 바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잘 생각하면 역으로 그 자신이 위험했다.
‘빌헬름 마이어. 이 자는 왜 순순히 창고를 보여주고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거지?’
식당 앞에 이르러서는 의문이 한층 더 커졌다.
“어이. 기분 나쁘게 문은 왜.. 컥!”
쿵!
대놓고 수상하다.
식당 안에 있는 누군가를 감추려고 필사적인 행동이라.
빌헬름 마이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는 증거다.
‘틀림없어! 이 안에는... 중앙정계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질이 잡혀있는 거다!’
식당에 돌입해 주변을 철저하게 수색했다.
수도 없이 널린 건빵 봉지들.
오래도록 인질을 감금한 흔적이 틀림없다.
그 흔적이 이어지는 건...
테이틀 아래!
“…….”
“…….”
마족이 있다. 회색이다. 인질이다.
얼굴에는 멍이 들고 코피까지 흘리고 있다.
마족이지만 납치 고문 감금까지 서슴지 않는다.
패닉에 빠진 두뇌는 필사적으로 답을 궁리했다.
마침내 그는 결론을 도출해내었다.
‘중앙정계는 마족과 결탁했었단 말인가!?’
‘게다가 그런 마족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저 남자, 흑산회 보스는 대체 어떤 실력을 지닌 괴물이란 말인가!’
‘여긴 위험하다. 진심으로 위험하다. 당장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나도 같은 꼴이 될지도 몰라!’
그의 두뇌는 더 이상 생각하는 행위를 포기했다.
착각일 가능성을 검토할 여력조차도 없다.
그저 살기 위해 흑산회 아지트로부터 전력으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