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4 - 내 조직이 이상한 유명세를 얻었다 =========================
#4 - 내 조직이 이상한 유명세를 얻었다(14)
다크히어로 멸혼객(滅魂客)과의 대면은 이걸로 두 번째. 한 번 보았다고 안심 따위는 되지 않는다.
멸혼객의 스펙은 최정상급 게이머의 최종스펙마저도 뛰어넘는다.
방심은 곧 죽음으로 직결된다.
심지어 멸혼객의 스펙은 알려진 게 전부가 아니다. 숨겨둔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직용사였다.
그가 어째서 용사의 업을 포기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달리 말하자면 인류의 결전병기나 다름없는 자가 지상에 버젓이 남아있다는 거다.
‘적으로 돌리면 반드시 파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런 괴물 같은 양반을 눈앞에 두었다.
“파란을 일으키며 고착하된 세력구도를 뒤엎는 자. 이 도시 제일의 야심가가 나를 찾아왔군.”
“알량한 악명 따위, 그대의 이름 앞에서는 한 줌의 가치조차도 지닐 수 없소. 멸혼객.”
“주제파악은 했지만 상황파악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은색 면사 너머로 거대한 실루엣이 몸을 일으켰다.
“흑조호시일낙순(黑鳥號時日落瞬). 검은 새가 우는 때야말로 태양이 저무는 순간이다. 그 의미를 알겠는가.”
변함없이 시조 짓기를 좋아하는 양반이군.
허나 그 의미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 같은 시국에 검은 새니 태양이니 운운한다는 건..
“설마 음지의 암흑조직들이 양지의 권력자들을 칠 때가 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오?”
“그렇다. 시장은 이 폭동이 외부의 요인이라 단정 짓고 미온한 대처를 보였다. 압박을 중지하고 전 부대를 물린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대면요청에 응하고 이 자리에서야 그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군.”
멸혼객은 크게 소리 높여 웃었다.
“크하하하하!”
가뜩이나 지옥의 밑바닥에서 올라온 것만 같은 섬뜩한 목소리에 음공(音功)이라 여겨도 무방할 정도의 공력이 실려 있다. 대번에 귀청이 찢어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카이사르와 리나는 이미 창백하게 질려서는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두 싸이코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확실히 멸혼객은 격이 다른 절대고수다.
나 또한 동기화 비율이 1%만 아니었어도 형편없는 안색을 드러내었으리라.
“이유를 알고 싶다 하였는가. 네가 시장 브람베르크와 독대한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색마 콰이어. 경험이 일천한 그 놈은 속았겠지만 내 눈마저 속일 수는 없지. 흑산회와 시장 브람베르크는 모종의 밀약을 맺어 상호불가침의 관계가 되었음도 알고 있다.”
맹수의 숨결처럼 거친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터져 나왔다.
“네놈은 시장과 밀약을 맺었다! 암흑가에 연을 두면서 동시에 시장에게도 손을 뻗었지. 그렇기에 네놈의 수완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이 자리에서 결정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공존은 불가능한 것이오?”
“한 도시에 두 명의 지배자가 공존할 수는 없다. 블랙마켓이 사라지고 외부로부터의 유입이 줄어들었으며 전에 없는 폭동이 일어난 지금이 절호의 기회. 더 이상의 유예는 없다.”
이미 결심은 굳었다.
멸혼객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늘 브람베르크를 죽이고 미궁도시 브람의 지배자가 될 작정이다.
“…….”
중앙정계와 왕국의 대응은 어찌할 테냐는 바보같은 물음은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전직용사가 도시를 장악하고자 나섰다.
심지어 뒤를 받치는 세력은 강대한 6강이 지배하는 암흑조직들과 이들의 질서에 순응한 흑도의 무리 전원이다.
일국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성세를 자랑하는 도시이며, 제일가는 전투력을 지닌 자들이 모여든 도시의 어둠을 지배하는 일존육강의 저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다른 도시에 나선다면 6강 개개인이 도시의 어둠을 지배하고도 남을 실력자이다.
그런 6강 전원이 한 뜻으로 멸혼객을 지지하고 따른다면 왕국이 멸망할 작정으로 모든 병력을 쏟아붓지 않고서야 위협조차도 될 수 없다.
‘한 번 저지르면 무조건 성공한다!’
국가의 위신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멸혼객이 미궁도시 브람을 차지하고 타국과 협력하겠다며 선언한다면?
그날로 알폰스 왕국의 명운은 저무는 것과 다름없다.
전직용사라고 하더라도 용사는 용사. 멸혼객 개인의 기량도 무섭다. 애초에 그가 작심하고 날뛴다면 일국의 존망이 위태로운 대위기나 다름없다.
그런 그가 세력마저 모은 상태에서 방심한 시장의 허를 찌른다면 지배는 확실해진다.
대신 내게는 이 일이 득이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시장은 미궁공략을 위해 나와의 협력을 약속했다. 멸혼객이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협력을 약속한다면 시장을 버리는 건 간단하지만...’
그는 이미 한 번 미궁공략을 포기한 전적이 있다.
용사의 사명을 저버렸다.
인류가 그에게 짊어지도록 한 책임을 외면했다.
그런 그가 뒤늦게 미궁공략에 관심을 보일까?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궁도시 브람의 외부로 진출해서 도망치면 도망쳤지, 결사항쟁을 벌일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아닐 확률도 있으니 운을 띄우며 물어볼 수도 없다.
미궁공략을 원한다는 사실을 들켜도 끝이다.
후환을 없애고자 이 자리에서 목을 칠 수도 있다.
‘한 번의 질문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오로지 내 판단만으로 미궁도시 브람의 명운이 결정지어질 수도 있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나는 어두운 기색을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흑산회의 본적은 양지가 아닌 음지. 암흑조직의 보스가 될 것을 선택한 시점에서 정면에 나설 생각은 추호도 없소.”
“호오. 제 삼의 길, 방관을 택하겠다?”
“그렇...!”
꾸구궁...!
거대한 바위가 지면과 충돌하는 굉음이 일며, 엄청난 힘의 격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장내를 휩쓸었다.
힘의 편린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까무러칠 것 같은 기세. 그것이 멸혼객의 기가 대기를 진동시키며 발생한 여파임을 깨닫기가 무섭게 제 2파가 들이닥쳤다.
콰과과과과!
지면이 함몰되며 바위가 박살나 가루가 된다. 멸혼객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인위적인 중력은 심해의 극대기압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이에 거역하는 자는 한 호흡의 숨결조차도 내쉬지 못하고 압사 당한다.
미쳤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선제압(機先制壓), 아니, 기선제살(機先制殺)이다.
“큭...!”
불과 50cm의 간격을 두고 카이사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멸혼객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중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버티고 있다.
뒤로 전해지는 힘은 본래 가해질 압력에 비하면 지극이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카이사르가 내 앞을 가로막아서 살았다. 막지 않았다면 지금 걸로 즉사를 면치 못했을 위력이다. 막아선 카이사르의 상태가 온전한 것도 아니었다.
꽈드득!
꽈드드드득!
전신 근육이 최대한도로 팽창하며 꺾이려는 무릎을, 의지를, 기백을 억지로 버텨 세우고 있다.
희귀등급 장비와 우수한 특성, 카이사르 특유의 집념이 아니었다면 서 있을 수도 없다.
그마저도 실시간으로 체력을 갈아가며 버티는지 입가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다.
“내 뜻을 거역한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말로 이해하고는 있는가?”
“물론이오.”
“아니. 너는 알지 못한다.”
멸혼객의 목소리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콰아아아앙!!!
제 3 파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밀어닥쳤다.
단순히 [아래]로만 가해지던 중압이 [전방위]로 흐르기 시작하며 죽음을 부르는 거대한 흐름이 된다.
지면은 무너지고 암반은 서로 충돌해 파괴되며, 두 발은 거대한 태풍을 앞두고 온전히 서있는 행위조차도 힘들 정도로 흔들린다.
의지만으로도 국소적인 자연재해가 일어난다.
멸혼객은 그러한 의지를 내게 겨눈다.
흐름이 생긴 거대한 의지는 카이사르라는 벽을 무시하고 우회해서 나를 덮칠 수 있다.
이건 시험이다.
동시에 멸혼객의 물음이기도 하다.
정녕 자신의 앞에서 오롯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며 버티어 설 수 있는지, 감히 예외가 되기를 자처할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일국의 저력과 정면으로 맞서고도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절대고수의 암경(巖勁)이 파멸적으로 몰아닥친다.
본신의 능력 따위는 조금도 갖추지 않는 나 따위가 당해낼 수 없는 즉결처형이다.
콰아앙─!!
스쳐지나간 암경이 지면을 미터 단위로 들어 엎었다.
“괴, 괴물 같은...!”
리나가 날린 암기를 막고자 멸혼객의 통제력이 흩어졌기에 조준이 빗나갔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만한 집중력이 없다면 당연한 반응이지만, 리나의 공격이 치명적이지 않았다면 몸으로 받아내고 암경으로 나를 깔아뭉갤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이것으로는 답이 될 수 없겠소?”
“하늘의 기둥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는커녕 알량한 부하들의 조력이 없거든 버틸 수조차도 없는 버러지가 그 흐름을 거역하겠노라 지껄이느냐!!”
“내 의지를 지지하는 힘이라면 그 또한 나의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힘으로 살아남았다면 이 또한 나의 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요동치는 심장과 달리 흔들림 없는 평온한 대답.
그 오연함이 마음에 든 것일까.
멸혼객이 기세를 거두며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네놈은 간웅(奸雄)이 될 자질이 있구나. 세 치 혀로 칼을 휘두르고 방패를 두르는 재주는 일개 버러지 따위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쏴아아아아!
쉼 없이 충돌한 끝에 모래 알갱이로 화한 암반들이 지면에 쏟아졌다. 도심 속 번듯한 건물 한 채가 사막 속 초토화된 폐허로 변화하는 데에는 불과 1분이면 충분했다.
“좋다. 빌헬름 마이어. 네놈의 고집을 받아들여주지.”
“감사하오.”
“그리 기뻐할 수도 없을 게다.”
흔적도 없이 날아간 면사 너머로 실루엣으로만 보아온 멸혼객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사자를 연상토록 하는 거친 암적색 머리칼에 암반보다 단단한 몸을 지닌 2m의 거한.
죽은피를 연상토록 하는 불길한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네놈은 반쪽짜리다. 반푼이답게 중립선언은 허락하되 폭동이 그칠 때까지 이 자리에서 움직이는 건 허가할 수 없다. 단 한 발자국조차도 말이다.”
“……!!”
“중립을 선언하고 교묘하게 브람베르크를 살리려는 속셈 따위는 진즉에 눈치 챘다. 네놈이 그토록 자신하였던 부하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보아라.”
물론 그건 자비심에서 비롯된 발언 따위가 아니다.
정반대다.
폭군의 무자비함에서 비롯된 종언(終言)과도 같다.
“그리하여 무력한 자신을 깨닫고 실감하도록 하라. 내게 따르지 않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크윽.”
“이 멸혼객의 의지를 거역하며 독존하려는 게 어찌나 어리석고도 허망한 미몽이었는지를!!”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일갈(一喝).
노도와도 같은 사자후(獅子吼)마저도 넘어서 숫제 공포를 부르는 보이스 피어(Voice Fear)나 다름없다.
드래곤도 아니고 인간이 자신의 음성에 의지를 담아서 광역상태이상을 유발하는 피어를 발생시킨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노릇인가.
‘시발. 괜히 뻗댔나.’
카이사르와 리나는 전의가 꺾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계처럼 보였다.
나 또한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건강상태, HP가 위태로웠다.
기력고갈로 기절하기 직전까지 깎인 SP를 보면 아예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카이사르와 리나는 절대로 동원할 수 없어.’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둘은 멸혼객의 위협으로부터 나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사용한 ‘묶인 수족’이나 다름없다.
기용 가능한 전력은 나와 카이사르, 리나를 제외한 흑산회의 나머지. 그마저도 사전에 행동지침을 전달한 두 개의 팀밖에 없다.
멸혼객의 뜻이 이토록 확고할 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내 실착이었다.
‘내성에 보낸 건 1팀 뿐.’
멸혼객과 암흑조직들의 위협으로부터 시장 브람베르크의 명운을 살릴 자는 사이토, 데이고르, 마크 셋밖에 없다.
“…….”
이딴 전력으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있겠냐!
난 할 만큼 했어.
명복을 빈다, 브람베르크.
============================ 작품 후기 ============================
무시무시한 절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