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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하들이 미친듯이 유능하다-95화 (9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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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내 조직이 이상한 유명세를 얻었다(20)

시장 브람베르크를 죽이고 온 도시의 공공의 적이 된 ‘길드’의 잔당들을 받아들였다. 이제 와서 난 모르는 일이라고 생까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기록은 남는다.

시스템은 이미 내가 길드의 잔당들을 받아들였다고 확실하게 각인했다. 또한 그 모습을 흑산회의 주요 조직원들과 내 충실한 두 부하인 카이사르와 리나마저 목격했다.

‘이건 무를 수도 없어!’

정말 개 같은 노릇이지만 여기서 말을 번복하고 이놈들을 내치면 ‘한때 공공의 적을 받아들였던 흑산회’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던 자’ 따위의 부정적 평판이 생긴다.

카리스마가 실추된다.

한 번이라도 그런 흠이 생겼다가는 나를 향한 시선에 금이 간다. 적과 아군 모두 나를 초인적인 무언가를 지닌 보스가 아닌 무능한 보스라고 여길 여지가 있다.

“다음 수를 결정해야겠군.”

공성전을 진행하는 양 진영에서 길드의 잔당들이 내 밑으로 왔음을 눈치 채는 즉시, 강력한 전력을 파견해서 흑산회를 송두리째 파멸시키려 할 게 틀림없다.

‘중앙정계와 손을 잡아야 하나?’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가능할 리가 없다.

끄나풀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유력자들의 인정을 받으면?’

이 또한 무르다.

시장을 죽인 시점에서 그들의 인정을 어찌 받겠는가.

온갖 유력자들에게 빚을 짊어지게 할 수단도 없다.

‘압도적인 권력을 쟁취하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공석이 된 시장의 자리 정도면 무척 탐나지.

근데 나만 탐나겠어?

멸혼객을 비롯한 실력자들이 죄다 노릴 텐데.

그들 모두 납득할 수밖에 없는 패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 게 내게 있을 리가…… 있네?

“이지스 남작가의 장녀.”

“네.. 네?”

“그녀가 지닌 문제는 뭐였는가.”

모자이크녀가 의기양양하게 괴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혈통의 저주예요. 신분의 격차가 있는 사람과 원치 않는 사랑에 빠져 불운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죠. 석 달 뒤에 알폰스 왕국의 망나니 3왕자에게 정략혼을 당할 예정이고요.”

“그런 저주에 걸리고도 정략혼을?”

“유력자들은 소중한 자식이 ‘운명의 상대’로 선정되어 덜컥 배우자가 되지 않아서 좋고, 이지스 남작가는 ‘신분격차’가 위쪽으로 이루어져서 좋고, 왕실은 망나니를 제물로 바쳐서 유력자들의 칭송이라도 받아서 좋고, 망나니는 저 여자의 몸을 취해서 좋다네요.”

기가 막힐 정도로 불운한 여자로군.

“그래서 말인데요. 이 여자를 잘만 이용하면 왕실 따위가 아니라 저희가 이득을 볼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호오. 왕실이 얻을 이득을?”

“보스. 도로시 이지스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외모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성격도 꽤 좋고요.”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너 지금...”

“이 여자랑 결혼하시는 게 어때요?”

장내가 발칵 뒤집어졌다.

“보스께서 결혼을!? 저런 정상적인 여자와!?”

“안 돼! 리나가 성장하는 걸 기다려주기로 했잖아!!”

“확실히 지금 결혼한다면 유력자들의 인정은...”

카이사르와 리나는 마냥 경악했지만 다른 부하들은 모두 진지하게 이 건을 고려하고 이득이 적지 않다고 계산을 마친 모양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내 생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결혼 하나면 상황은 놀랍도록 급진전된다.

“거기에는 세 가지 전제조건이 존재한다.”

그러나 무턱대고 결혼에 돌입할 수는 없다.

“우선 첫 번째. 왕실에서 그녀를 순순히 놓아줄 이유가 없다. 3왕자가 그녀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 결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리나는 암살 따위 하지 않을 거야! 보스의 결혼을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방관할 거라고!”

“…….”

모두의 표정이 계면쩍게 변했다.

뭐 그렇지.

내 생각에도 첫 번째는 어떻게든 해결된 것 같아.

“다음으로 두 번째. 멸혼객이 시장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직접 찾아와서 그녀를 죽이면 상황은 그대로 종결된다. 최소한 공개석상에서 결혼을 밝힐 때는 습격을 막아야 한다.”

“공성전이 한참 진행 중인 지금이라면 멸혼객의 발이 묶인 상황 아닌가요? 밑선에서 움직임이 있더라도 그 정도는 제 주인님... 카이사르님이 막을 수 있을 테고요.”

“제 펫의 말대로입니다. 보스의 결혼식을 위해서라면 6강의 일원이 쳐들어오는 정도는 어떻게든 막을 수 있습니다.”

모자이크녀와 카이사르가 뜻모를 의욕을 불태웠다.

이 미친놈들이 왜 이리 의욕적이야.

그렇게나 날 이 여자와 결혼시키고 싶은 건가.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 여자가 스스로 결혼을 납득하지 않으면 결혼은 이루어질 수 없다. ‘운명의 상대’라는 게 멋대로 정해져서 다른 배우자를 고르면 그걸로 끝이니까.”

“그 상대가 나오는 족족 보스가 다 죽이면 결국 유일한 배우자가 되는 거 아닙니까?”

“…….”

카이사르의 파격적인 주장에 모두가 말문이 막혔다.

시발.

왜 다들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거 완전 쓰레기 짓이잖아.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로 잔인한 짓은 하기 싫다고.

“이 여자가 좋아 할 리가..”

“정말... 의외로 보스는 상냥하시군요.”

“!?”

이지스 도로시는 왠지 모르게 호감어린 모습을 보였다.

“괜찮아요. 저주가 고르는 운명의 상대는 대부분 형편없는 쓰레기니까요.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노름벽이 있고, 찌질하거나 추하고, 더럽거나 불쾌한 사람이 대부분이죠.”

“나는 다르다 이거냐?”

“소문대로 속을 알 수 없고 잔인한 기질을 지니셨지만... 그래도 직접 보니 알 것 같아요. 평상시에는 차갑고 냉혈한 보스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스한 타입이신 거죠?”

“뭐?”

“흑산회 보스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제 사정 따위는 헤아리지 않고 그냥 취하셔도 될 텐데, 이렇게까지 이유를 대가며 거절하는 건.. 제 마음을 배려하셔서 그런 거잖아요?”

아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이상하잖아.

의도가 곡해되었다고.

“그만 둬라. 나 따위와 함께 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여자는 없다. 기껏해야 이런 녀석뿐이지.”

머리를 헝클여주자 리나의 뽀얀 얼굴이 귀여울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아성애자?”

“정상적인 사고감각과 거리가 있는 여자를 말한 거다.”

겨우 도로시 이지스를 납득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리나가 울먹거렸다.

“보스! 그건 리나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거야!?”

“비정상이 꼭 잘못된 건 아니다. 너는 암살을 좋아하지?”

“응!”

“그걸 이해해줄 수 있는 남자라는 거다.”

“와아! 역시 보스야! 보스 정말 좋아!”

리나를 달래놓으니 이번에는 도로시의 표정이 사근사근 풀어졌다.

“어쩜 저런 자상한 배려심까지...”

“아. 이런.”

“저도 혈통의 저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나 멸시 따위만 받아왔어요. 그런 저를 한 사람의 여자로서 존중해준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만둬. 어차피 나 따위와 함께 해도 즐거울 건 없다. 앞으로도 사람을 잔뜩 죽이고 위험한 곳만 찾아다닐 거다.”

“상관없어요. 보스와 함께 하지 않으면 이상성욕자인 3왕자의 아래에 깔려 매일같이 몸을 유린당할 뿐이에요.”

미친.

이 여자 인간적으로 너무 불쌍하잖아.

그래도 냉정히 생각해야 한다.

“나와 결혼하면 지극한 무관심과 양심을 자극하는 가혹한 나날 속에서 몸 대신 마음이 먼저 죽게 될 거다. 차라리 몸을 유린당하는 나날이 나을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있어요.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저를 괴롭게 만들 뿐이었어요. 이건 조금 나쁜 생각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혹한 일을 겪는다면 오히려 조금은 기쁠지도 몰라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진심이에요. 혹시 보스는... 제가 싫으신가요?”

싫을 리가 있나. 그냥 동정심만 가득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당사자가 되기는 싫다.

니랑 결혼하면 그 뒤가 겁나 불행해진다면서.

‘NPC라면 모를까, 게이머에게 그 정도의 금제가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다른 방식의 우회적인 페널티라면 적용될 수 있다.

레벨 업을 위한 경험치 습득량이 10배로 늘어난다거나, 스킬 숙련도 상승속도가 10배로 늘어난다거나. 두 개를 동시에 겪는다거나.

상상만 해도 불운해질 것만 같은 끔찍한 저주 아니냐. 그딴 거 걸리면 좋던 여자도 저절로 싫어지겠다.

“…….”

그래도 막상 앞에서 훌쩍거리는 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게 남자가 아닌가. 가식적인 눈물이 아니라 진심임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거기까지라면 많이 슬프고 딱하기는 해도 프로그램의 사정이니까 그냥 무시하고 쌩하니 가버리겠는데...

얘가 아니면 달리 살 길도 없다. 일단 수긍하는 척 하고 리나가 싫어하면 그걸 핑계로 까볼까.

“어쩔 수 없군.”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 흐윽!”

“나 원 참.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했군.”

부하들은 몹시 훈훈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수문장 리나를 돌아보았다.

“흥. 너 따윈 보스의 첩에 지나지 않는다고. 정실이 된다고 착각하지 마. 제일 사랑받는 건 리나니까! 리나가 소세지를 먹어도 되는 나이가 될 때까지 동침 금지야!”

마지못해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수문장은커녕 제 손으로 문을 활짝 열어준다.

뭐야 이 훈훈함은.

[당신은 저주받은 혈통을 지닌 이지스 남작가의 장녀, 도로시 이지스와의 혼약을 결심했습니다. 흑산회의 일원들은 이를 몹시 감동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아직 공식적인 혼인관계가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주례를 설 사제를 모시고 만인의 앞에서 결혼식을 선언하며 이를 관청에 신고하여 허가받을 시, 혼인이 성립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험난한 시련을 돌파하여 결혼에 도달하십시오!]

아아아아아.

시스템마저 인정해버렸다...!

[도로시 이지스의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리나의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카이사르의 충성도가 1 상승합니다.]

[잭의 충성도가 5 상승합니다.]

[청일의 충성도가 5 상승합니다.]

확인사살까지 박혔어. 영락없이 유부남이 되게 생겼다.

이걸로 대체 몇 번째 결혼이지?

게임에서만 이걸로 무려 5번이나 결혼을 하게 되다니.

초기에야 이쁜 여자 NPC랑 결혼하니 좋아 죽었지.

그 짓도 세 번째 부터는 할 게 못 된다.

정신연령은 늙었는데 상대는 새파랗게 어리잖아.

연애결혼과 정략혼을 모두 해보았지만 뒷맛이 씁쓸한 건 매번 마찬가지였고.

‘NPC는 일상을 바라지만 게이머는 모험을 바라니까.’

부부관계는 반드시 순탄할 수가 없다.

가정을 버리는 가장의 기분을 느껴버리고 만다.

판타지 모험가물이 다큐멘터리 가장물이 되어버린다고.

‘뭐 됐어. 이번에는 처음부터 선을 그어뒀으니까.’

불필요하게 정을 붙일 일도 없고, 프로그램에게 몰입해버릴 걱정도 없다. 한 때에는 30%의 수치나마 기록했던 내 동기화 비율도 이제는 고작 1%에 불과하니까.

“일단 결혼을 확정사항으로 만들려면 주례를 설 사제를 구하고 혼인신고서를 받아줄 관청 직원이 있어야하며 중앙정계의 간섭을 배제할 수단이 필요하다.”

“앗! 그러고 보니 보스는 치유의 교단의 사제들에게 인기가 상당히 많았잖아!”

“시청의 클레드라는 계집에게 온정을 베푼 건 이 날을 위한 안배였군요. 보스의 치밀한 안배에 감탄했습니다.”

그러면 뭐해.

중앙정계와 교섭해서 망나니 3왕자를 타이를 수가 없는데.

“보스! 저희가 왔습니다! 재무총장 피쟌 자작과 정보총장 패트리 자작도 함께입니다!”

바로 그때, 1팀의 세 명이 귀환했다.

덤도 둘이나 딸려있다.

아니, 쟤네는 여기서 왜 튀어나와?

“시장의 최측근이자 중앙정계의 스파이로 활동하던 재무총장 피쟌 자작과 정보총장 패트리 자작이 흑산회에 신분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이 마크의 눈은 이들이 진실을 말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보스. 저를 봐서라도 이들을 신용해주십시오.”

“이들은 자신들을 배제하려 든 중앙정계에 큰 반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디 이들을 중히 기용하여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계하기 위해 활용해주시길.”

미친. 이게 뭐야.

마지막 퍼즐조각이 제 발로 굴러 들어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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