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2 #5 - 내 조직이 무지막대하게 커진다 =========================
#5 - 내 조직이 무지막대하게 커진다(12)
내친김에 리나의 특성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까.
과감하게 CP를 지르려다가 멈칫했다.
게이머로서의 본능이 아슬아슬하게 충동욕구를 저지했다.
‘리나에게 올인하는 건 안 돼.’
리나의 클래스는 암살자.
영웅급 NPC의 암살을 차단할만한 특성을 익혔고, 신에 버금가는 암살재능을 익혔다고 해도 암살자라는 본질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정면으로 쳐들어와서 네 목을 베러왔다!! 하고 덤벼들면 끽해야 두 명이나 묶고 그 사이에 나는 뎅겅 목이 베이고 만다.
‘카이사르도 강화시켜야 해.’
카이사르의 클래스는 학살자.
정면에서 당당하게 쳐들어오면 ‘배짱도 좋구나!!’라고 외치며 마주 달려들어서 용사파티를 박살 낼 거다.
뒤로 도는 몇 명만 리나가 묶고 있으면 카이사르가 용사파티의 주력과 맞설 수 있다. 가뜩이나 싸이코 같은 새끼가 신급 재능까지 얻으면 어떨까.
“…….”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게 최선의 선택일까.
그런 싸이코를 용사급으로 키우는 게 맞는 걸까.
‘시발. 내가 죽을 판인데 알게 뭐야.’
그래. 전부 게임사가 나쁜 거다.
난 아무 죄도 없어.
카이사르라는 악을 이 세상에 풀어버린 죄는 게임사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NPC 카이사르의 ‘무술’ 관련 특성에 CP를 투자합니다.]
[특성 <무술의 천재>를 한 단계 승급시켜 <무술의 신재>로 만들었습니다.]
[승급비용으로 174,000CP를 소모했습니다.]
어째서인지 승급비용이 리나 때보다 훨씬 더 적었다.
35만 CP가 거의 반절가량 줄었잖아.
찬찬히 고민한 끝에 나는 무시무시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새끼가 자력으로 백보권을 개량하면서 지 혼자 재능을 강화시키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무려 천재와 신재의 중간 정도의 수준까지!
대체 무슨 계기가 있었던 걸까.
멸혼객에게 무술을 전수받기라도 한 게 아니면 납득이 안 되는데.
“…….”
생각해보니 멸혼객도 만만찮은 싸이코 자식이다. 브람 시에 남은 두 싸이코가 의기투합해서 사이좋게 스펙 업을 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휴, 끔찍해.
상상조차도 하기 싫은 상황임이 틀림없다. 아무튼 덕분에 CP가 꽤나 남아버렸다.
[남은 CP : 26만 6690CP]
뭐, 남은 걸 무조건 다 써야 될 이유는 없으니까.
일단은 저금이다.
아. 이왕이면 남은 690CP만 알뜰하게 써보자.
[NPC 리나에게 새로운 스킬을 부여합니다.]
[특성 <조련>을 부여합니다.]
[신규특성 구매비용으로 690CP를 소모했습니다.]
스킬등급도 가볍게 올려서 야생동물, 특히 야생마의 조련 성공확률을 높이도록 만들었다.
마냥 걸어가기도 그렇잖아.
대뜸 CP로 말을 구매해서 허공에서 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건 불가능하니까 차선책을 쓴 거다.
“리나. 너에게만 긴히 전해줄 말이 있다.”
“헉! 보스가 리나에게만...”
“수줍어하지 마라. 암살위협에 대한 말이다.”
물론 특성이나 스킬을 구매해도 칼같이 바로 적용되는 건 아니다.
처음 시트지를 만들 때라면 모를까, 일단 게임이 시작되었다면 성능은 점진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특정한 계기를 바탕으로 상승한 스펙이 계산되는 거다.
‘효율도 낮고 적용시점도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지.’
그렇기에 그 계기를 인위적으로 유도해야만 한다.
“수도에서 힘을 쓰면서 저주가 강화되는 것을 느꼈다.”
“뭐엇!? 큰일이잖아!!”
“강화된 저주는 신들의 분노를 초래한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신탁을 받은 용사가 날 죽이고자 찾아올지도 모른다.”
나는 리나의 위기의식을 재촉했다.
스킬과 특성을 각성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붙이는 거다.
용사라는 극단적인 위험을 대두시키는 방법으로.
“용사는 강력한 동료들을 모아 용사파티를 결성할 거다. 반 영웅 멸혼객처럼 말이다.”
“그런...! 보스는 괜찮은 거야? 어디 아프지 않아?”
“고통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영웅급 암살자의 습격은 자력으로 막아낼 수 없다.”
“그, 그건 리나가 어떻게든.. 으으..”
“알고 있겠지. 너로서는 아직 영웅급 암살자를 막아낼 수 없다는 건.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브람 시로 복귀해서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리나는 울먹거리며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럼 어떡해? 보스 어떡해?”
“수도까지의 이동속도를 상승시킬 수밖에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수를 모색해주었으면 한다.”
“알았어! 리나가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게! 힘들겠지만 저주의 고통은 조금만 더 견뎌줘, 보스!”
뭐, 이런 거다.
열심히 궁리하다보면 말을 조련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겠지.
자연스레 조련스킬을 각성하고 말을 조련할 거다.
마침 수도 마시장에서 대량의 말도 풀려났겠지.
엉터리 구매자들이 말을 몰다가 낙마도 당하고, 지친 말을 버리고 달아나기도 하고, 이래저래 자유의 몸이 된 말들이 적잖이 있기는 할 거다.
그것들을 모으면 우리 일행도 수도까지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거다. 20일의 거리가 못해도 10일까지는 줄어든다고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다.
‘리나는 유능한 녀석이니까.’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스킬 각성쯤은 금방 할 수 있다.
예상대로 세 시간 쯤 지나자 리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보스! 리나가 새로운 능력을 개발한 것 같아!”
“어떤 능력이지?”
“조류암살기술이야!!”
...뭐?
“새의 날개에 상처 하나 없이 암살할 수 있어! 이걸 이용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어떻게도 안 된다.”
“히잉...”
“다른 능력을 개발해라.”
“알았어, 보스!”
나 원 참.
조련스킬은 내버려두고 뭔 암살기술을 연마하고 온 거람.
새의 날개가 있으면 이동속도가 상승하기라도 하냐.
“보스! 다른 재능을 습득한 것 같아!”
이번에야말로 리나는 희색을 띠며 달려왔다.
[리나가 응원스킬을 습득했다!]
필요 없어. 완전 엉뚱하고 이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스킬이잖아.
예상치 못한 재능이 위기각성을 한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응원은 좀 깬다. 뭘 남 일처럼 구경하면서 응원하려고 하는 건데.
“네가 잘할 수 있는 건 따로 있다. 응원 따위가 아니다.”
“응원 따위가 아닌 리나가 잘할 수 있는 거?”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면에 내제된 재능을 탐구하며 이끌어내려는 명상을 넘어선 참선 시도였다.
암살로 단련된 고도의 인내심과 포기할 줄 모르는 집념이 리나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겠지.
만일 그것이 리나의 역량을 상승시키게 된다면...
[리나의 특성 <은밀한 발걸음>이 한 단계 승급하여 <무음의 추적>이 되었습니다.]
[리나의 특성 <검은고양이의 눈>이 <암흑시야>가 되었습니다.]
[리나의 특성 <암살중독자>가 <암살편집증>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암살 관련, 암살 보조, 암살 특화 특성들이 무더기로 상승하겠지.
조련스킬은 제일 마지막 순번쯤 되지 않을까.
싸이코 암살자 녀석을 좀 쓸만하게 만들려고 했다가 싸이코적인 성능만 강화시켰다.
‘시발. 이걸 어쩌지.’
막막함에 한숨에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리나가 신규 특성 ‘동물적인 본능’을 습득합니다.]
[특성 : 동물적인 본능]
[상세효과 : 동물적인 본능으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방책을 찾아내는 특성입니다. 복수의 능력치의 종합 체크를 진행한 뒤, 체크 결과에 따라 랜덤 이벤트를 발동시킵니다.]
오오. 건졌다.
조련스킬보다 훨씬 더 좋은 걸 자력으로 깨달았다.
[리나가 스킬 ‘조련’을 자각합니다.]
심지어 조련스킬도 얻었다.
이거라면 할 수 있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야생마를 찾아내는 거다.
“가라. 네 본능을 발휘해라.”
“이건...! 이쪽이야. 이쪽에 뭔가가 있어!”
“정말이군. 여기에는...”
리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야생지렁이(6cm)를 찾았다!
“전혀 모르겠어. 모르겠다구... 도와줘, 보스!”
“...평원 어딘가에 탑승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서 탑승물을 조련해 데려와라.”
“알았어!”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주자 이제야 한결 살았다는 표정으로 어디론가 달려 나간다.
...솔직히 이젠 전혀 기대 따윈 되지 않아.
그냥 귀여운 카이사르가 카이사르 짓을 하는 거잖아. 리나의 압도적인 카이사르함에 손발이 막 떨릴 지경이다.
“엇. 저기 모래먼지가 피어오릅니다. 뭔가 달리는 생물체를 몰고 오는 모양인데요?”
정말이다.
그것도 상당한 규모인지 모래먼지가 피어오르는 양이 적잖이 많았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그게 말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말이다!!”
“진짜 말이다!!”
“저거 뭔가 이상한데.”
친위대장 리델라프만이 미간을 구기며 말을 노려봤다.
이윽고 그가 이마에 손을 얹고는 신음을 흘렸다.
“하이고. 씨이펄. 데려와도 뭔 저딴 걸...”
“대체 뭘 데려왔는데 그러지?”
“얼룩말입니다.”
시발.
리델라프가 욕부터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룩말이라니, 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얼룩말이 사람을 태우는 탑승물이었으면 아프리카는 진즉에 기마민족의 상징이 되었을 거다.
성질은 더럽고 말은 더럽게 안 들으며 심지어 개같은 동물이기도 하다.
왜 그러냐고?
“월월! 월! 월! 월월!”
“Warrrrrrrrrr!!"
“우에에에에에!! 에에에에에에엑!!!”
짖는 소리가 졸라 개 같다.
그것도 졸라 여러 가지 의미로.
“우와앗, 저거 대체 뭡니까! 왜 개 짖는 소리가 나죠?”
“사람이 외치는 소리처럼도 들리는데!?”
“그보다 저놈들 빨라! 완전 육식동물처럼 보이잖아!!”
얼룩말은 초식동물이다.
단, 질주하는 와중에는 육식동물도 함부로 건드리려고 했다간 퍽 치여서 얼굴이 으깨져서 죽는다.
덤으로 리나도 지금 선두에서 엄청나게 쫓기고 있다.
“가만! 저거 조련조차도 안 됐잖아!?”
“이쪽으로 오지마!”
“저리가! 죽을 거면 혼자 죽어라, 암살자 꼬맹아!!”
사람들이 모여서 악을 쓰자 얼룩말들도 놀라서 악을 쓰며 소리쳤다.
“아아아아아악!!”
“와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악!!”
어지간한 몬스터들보다도 쟤네가 더 무섭다...
“보스. 이거 어떻게 합니까?”
리델라프의 물음에 나는 쿨하게 대답했다.
“뛰어.”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네.
리나의 조련(물리) 덕분에 이동속도가 대폭 상승하였다.
죽어라 달리는 와중에 친위대원 몇 명이 뒤처졌다.
육중한 갑옷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순식간에 얼룩말들의 무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짓밟혀서 죽었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겠다.
필사적으로 달리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어도 얼룩말 떼에 치여서 죽는 건 좀 아니잖아!’
질주스킬이라도 사야 하는가.
진심으로 CP를 투자해서 이동속도를 올릴지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잠깐 CP를 투자하려고 멈추는 사이에 얼룩말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일제히 방향을 꺾었다.
“멍멍! 멍멍멍!”
“낑낑낑낑...”
“끼이잉..”
갑자기 얼룩말들이 개소리를 내면서 도망쳤다.
아. 알겠다.
내 악명(업)을 알아보고 위축된 모양이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보스. 얼룩말 떼에 치여서 죽는 수치스러운 최후를 맞이하는 건가 싶어서 진심으로 두려워하던 참이었습니다.”
리델라프마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그러는 와중에 리나가 합류했다.
터무니없는 이벤트를 일으킨 당사자가 허둥지둥 거렸다.
“보스, 도망쳐야 해!!”
“얼룩말은 이미 도망쳤다. 그보다 얼룩말을 조련하지 마라, 이 멍청아.”
“얼룩말이 아니야! 리나는 더 크고 단단하고 빠른 생물체한테 조련을 걸었는걸!!”
나는 식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평선 저 너머에서 커다란 뿔을 지닌 큰뿔도마뱀(3m) 수십 마리가 무더기로 나타났다.
얼룩말들은 그냥 큰뿔도마뱀이 무서워서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큰뿔도마뱀은 앞을 가로막는 바위도 단단한 몸으로 쳐부수면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명령하는 수밖에 없었다.
“뛰어.”
충격과 공포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공식설정 : 포식관계도]
큰뿔도마뱀 > 얼룩말 >>>> 넘을 수 없는 벽 >>>> 흑산회 >>>> 통곡의 벽 >>>> 알폰스 왕국
그렇습니다.
알폰스 왕국은 챕터 보스가 있는 강적이 아니라 그냥 불쌍하게 맞고 다니는 최약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