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0 #5 - 내 조직이 무지막대하게 커진다 =========================
#5 - 내 조직이 무지막대하게 커진다(20)
탈론 공작은 중앙정계에 남은 마지막 진정한 거물이자 사실상의 이 나라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현 국왕은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헤오라츠 후작이 빌헬름 마이어 제거에 실패하여 끌려간 이상, 이제 이 나라는 온전히 그만의 것이다.
“빌헬름 마이어. 브람 시를 장악한 그 거물을 확실하게 넘어설 수 있을 때의 이야기이겠지만.”
축배를 들어야 할 때는 지금이 아니다.
탈론 공작은 국왕을 수중에 확보하여 이 나라를 대표한다는 명분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초대장을 발송하였다.
흑산회의 최정예 간부들과 브람 시에서 손꼽히는 유력자들만이 빌헬름 마이어와 함께 넘어온다. 일이 수틀린다면 회담장소를 전부 폭파시키는 걸로 자폭할 각오마저도 다졌다.
“그와의 간극은 너무나도 많이 좁혀졌지. 아니, 이제는 역으로 벌어지고 말았지. 이 나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감히 마주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정도로.”
빌헬름 마이어는 무력과 지력, 정치력을 고루 겸비한 만능형 인재였다.
신이 내린 재능을 질시한 악마가 저주라도 내렸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저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알폰스 왕국 따위는 진즉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깨달았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다.”
저주는 시시각각 절대지경에 접어든 절대고수의 목숨을 조여들고 있다. 그만한 저주에 당하고도 오래도록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
빌헬름 마이어의 수명은 시시각각 꺼져가고 있다. 아주 약간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는 생명의 시계를 붙잡을 수 있다.
망설임 따위는 없다. 가차 없이 시침을 돌려버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모두 없애버릴 것이다.
“저주를 악화시키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태양의 교단은 흑산회를 따르는 치유의 교단에 의해서 파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적어도 알폰스 왕국에서 태양의 교단이 다시금 주류로 떠오르는 일은 근 십년 내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태양교단의 생존자들이 품은 원한은 더욱 깊어졌다.
저주를 파훼하고 해주해야 할 그들이 역으로 빌헬름 마이어의 저주를 분석하고 악화시킬 의지를 품을 정도로, 종교적 신념마저도 외면한 채 악의어린 기술을 사용하려 할 정도로 말이다.
우우우우웅!
파아앗!
마법진이 번뜩이며 마침내 기다려온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빌헬름 마이어, 멸혼객.
두 절대자와 함께 온 다섯 명의 엄선된 인사들이다.
“환영인사는 생략하지. 나는 지극히 건조한 인간이다. 찰나만 주어져도 사라질 허울뿐인 군더더기 따위는 원치 않는다.”
“그거 다행이군. 단도직입적인 성격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빌헬름 마이어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꼿꼿이 선 채, 마법진에서 걸어 내려왔다.
공간이동에 의한 일시적인 균형감각의 흐트러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멸혼객조차도 첫 발을 내딛으면서 흔들리는 균형을 발을 뻗는 와중에 바로잡았음을 감안하면, 역시 빌헬름 마이어는 멸혼객보다 고절한 실력을 지닌 극강의 절대고수였다.
‘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군. 한 나라에 한 명이면 차고도 넘칠 절대자가 같은 시대에 셋이나 존재하다니.’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한 시대를 거머쥔 채 거침없이 달려야 할 절대고수인 그가 동급의 절대고수 두 명을 적으로 둔 상황이다.
분하고 원통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자유도시연맹. 미궁도시 브람을 중심으로 흑산회의 무력시위에 함락된 영지들의 가장 번화한 여덟 도시를 포함한 강력한 도시연맹체제. 상당한 수완이더군.”
“그 정도는 내게 대수로울 것도 없다.”
“물론 그렇겠지. 수도파괴와 종교전쟁, 영주전쟁이라는 일국을 발칵 뒤엎을 사건을 세 개나 연달아 일으키며 왕국의 무력제제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 정치력이 있으니.”
탈론 공작은 결코 상대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전통과 역사라는 허울이 담긴 왕관을 고스란히 얻고자 했던 나는 30년에 걸쳐서 남부 7성을 지배하였다. 당신은 스스로 왕좌를 만들려 했기에 불과 두 달 만에 북부 9성을 지배했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기라도 했는가?"
“그렇지는 않다. 비록 수중에 들어온 성의 숫자는 뒤처질지라도 내게는 국왕이 있다. 나의 의지가 곧 왕국의 의지. 출혈만 감수한다면 대륙 위의 모든 국가마저 움직일 수 있다.”
빌헬름 마이어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국제외교에서의 발언권과 영향력이 그에게 있다.
빌헬름 마이어가 가볍게 뺏을 수 있는 장난감으로만 여겼던 권력이 지금 그를 협상테이블에 오르도록 만든 유일무이한 힘이 되어주었다.
그걸 얻고자 한 노력이 헛수고였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도시연맹은 모든 왕정국가를 향한 도전이 될 것이다. 불온한 사상은 마족의 영향을 받아 모든 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재앙의 서막으로 여겨지겠지.”
“영리하군. 지금껏 들어본 협박 중에서는 한 손으로 꼽아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
“마냥 감탄하기만 하다가 맞이할 미래가 어떤 건지는 충분히 깨달았겠지. 비록 절대자 줄에 수많은 강자들이 연합했을 지라도 대륙 전역의 왕조들과 맞서 싸울 수는 없다.”
그건 대륙을 지배한 지배계층의 역사 그 자체와도 같다.
백년조차도 버거운 인간이 천년의 세월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맞붙는다면 승산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알폰스 왕국 또한 재기할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
수많은 국가를 끌어들였으니 그만한 양보를 해야 한다.
운이 따라준다면 백여 년간 소국으로 전락할 것이고, 운이 따라주지 못한다면 알폰스 왕국은 온갖 국가들의 먹잇감으로 갈가리 찢겨져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서로가 파멸할 수밖에 없는 미래.
공멸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여기서는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 탈론 공작도, 빌헬름 마이어도 이 정도 사실은 가벼이 깨닫고 이해를 일치시킬 수 있었다.
“자유도시연맹을 해체해라.”
빌헬름 마이어는 비스듬히 입매를 치켜 올렸다.
“왜. 이참에 흑산회도 해체하라고 해보지 그래.”
“마지노선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다.”
“미궁도시 브람을 제외한 나머지를 포기하라 이건가.”
탁탁.
빌헬름 마이어는 느긋하게 지팡이로 바닥을 짚었다.
“대가는?”
“3년간의 불가침 협정.”
“부족하다.”
“미궁도시 브람의 자치권을 인정해주지.”
“흑산회가 지배하는 도시는 건드리지 않는다, 인가.”
탈론 공작은 불처럼 뜨겁게 일렁거리는 눈으로 빌헬름 마이어를 노려보았다.
상호간에 대동한 실무자들은 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굵직하고도 살벌한 내용들이다.
모두가 긴장한 낯으로 두 사람을 예의주시하였다.
“선택해라. 브람 시의 확실한 안전인지, 아니면 자유도시연맹의 존속 및 전력의 건재함인지.”
탈론 공작은 분명하게 못을 박아두었다.
여기가 끝이다.
이 이상의 타협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빌헬름 마이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탈론 공작의 압박은 유효했다.
그렇기에 그는 장고 끝에 확신하였다.
전부 계획대로라고.
* * *
변경백 령에 파견한 셋은 적성세력이다. 브람 시를 둘러싼 다섯 도시 또한 흑오문이다. 도시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방패막이로 쓰다가 버려야 할 버림패다.
이들의 목숨을 모두 바치는 것으로 브람 시의 안전을 살 수 있다면?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차피 언젠가는 수고롭게 제거해야 할 정적을 또 다른 정적이 자발적으로 제거해준다고 나서는 상황이다. 싫어할 이유가 없다.
“변경백 령에 자리한 셋을 내어주지.”
“부족하다.”
“시간을 둔다. 못해도 2년은 안전권에 두어야겠어.”
“협상을 거절할 셈인가.”
“네놈이 원하는 건 시간일 텐데. 2년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크게 후회하게 될 거다. 이 이상의 과욕을 부린다면 흑산회의 저력을 그 몸으로 혹독하게 체험하도록 해줄 테니까.”
탈론 공작은 마지못해 수긍하였다.
정치적인 협상은 이루어졌다.
놈들에게 땅을 내주면 내 목적도 달성된다.
변경백령에 간 놈들을 어찌하든 나와는 관계없다.
그저 하나만 약속하면 된다.
흑산회가 지배하는 도시는 건드리지 않는다, 라고.
‘틀림없다. 탈론 공작은 반드시 공격을 가하고, 변경백 령을 차지한 셋 또한 절대로 도망치지 않는다.’
권력자들은 수중에 들어온 힘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도시는 거대한 무덤이 되고 말 것이다.
탈론 공작은 일단 변경백령부터 탈환한 뒤, 2년이 지나자마자 브람 시 인근 다섯 성을 즉각 공략, 다음 해인 3년 차에 미궁도시 브람을 공략하겠지.
똑똑해 보이는 양반이니 어떻게든 수를 낼 거다. 근데 내가 3년 동안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탈론 공작이 왕국이 입은 피해를 수습하는 게 빠른지, 내가 미궁도시 브람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게 빠른지의 승부다. 속도에서라면 절대로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 계약의 내용을 신언의 힘으로 공증하고자 한다. 태양신의 신위 아래,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따를 자신은 있겠지?”
신언. 신의 이름하에 약속을 보증하거나 계약의 정당한 이행유무를 주시할 때에 사용되는 힘이다.
태양의 교단이나 탈론 공작이나 단단히 마음먹고 나왔다는 게 느껴진다.
“바라던 바다.”
[계약이 신언에 의해 확정되었습니다. 계약을 위반할 시, 태양신의 천벌 ‘태양광선(Lv 15)’을 받게 됩니다.]
대마법사 하인즈의 도움으로 브람 시로 돌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편하기는 한데...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한 가지 발생했다.
“마법사.”
“부르셨소?”
“수도에서 돌아올 때에는 왜 복귀마법을 쓰지 않았지?”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
그래, 말 안한 내가 등신이다.
됐냐.
“생각보다 얌전히 있었군.”
사고를 치지 않아서 기특하다는 심정을 담아 카이사르와 리나, 멸혼객을 칭찬해주었다. 세 사람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냐, 그 표정은.”
카이사르가 대답했다.
“보스의 계획은 간파했습니다.”
“뭐?”
“탈론 공작을 속이려던 거 아닙니까.”
그렇기야 한데.
그거랑 너희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게 무슨 상관이냐.
뭔가 미친 짓을 할 때나 지을법한 표정이라 무섭다고.
“북부 3성을 양도하는 척, 신언을 유도하여 탈론 공작의 손발을 모조리 묶어버린 책략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이걸로 알폰스 왕국은 자유도시연맹에 손 끝 하나 대지 못할 겁니다.”
“!?”
“어떻게 그 방법을 알았냐는 기색이군요. 미궁 짐꾼도 3년이면 오크를 도축한다는 격언대로입니다. 운이 따라주기는 했지만 보스의 책략이 이제 슬슬 눈에 들어옵니다.”
그제야 나는 확신했다.
내가 쓴 책략하고 이놈이 말하는 책략은 전혀 다른 거다.
지들 멋대로 내 책략을 전혀 다른 뭔가로 만들었다.
“3년간의 불가침협정이 유지되는 동안 저들은 흑산회를 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유도시연맹의 모든 조직이 흑산회의 일원이 되면 공격을 받지 않게 되는 거 아닙니까.”
“!?”
“자연스럽게 거대조직들을 흑산회에 통합시킬 빌미를 만들어 조직을 강성하게 키울뿐만 아니라 사실상 자유도시연맹의 9성을 모두 흑산회의 지배하에 두는 고도의 계략이라 생각합니다.”
아닌데.
그냥 느긋하게 돌아가서 싸움구경이나 하려고 했는데.
뭐야 그 기가 막힐 정도로 유능한 책략은.
“...드디어 네게도 지략이라는 게 생겼군.”
“모두 보스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느닷없이 훈훈한 분위기에 리나와 멸혼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사르의 성장을 축하하는 듯한 기색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에 모종의 공포심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육체파 싸이코가 지능적으로 날뛰기까지 하게 됐잖아.’
천재지변이 지척까지 도달한 것처럼 아득한 공포심이 일었다.
비명을 내지르지 않도록 참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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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적으로 날뛰기 시작하는 육체파 싸이코 ㅎ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