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5 #5 - 내 조직이 무지막대하게 커진다 =========================
#5 - 내 조직이 무지막대하게 커진다(25)
하이그리드는 빠르게 동요한 기색을 지우며 평정을 되찾았다.
“흑산회 측 대표참가자, 빌헬름 마이어. 본 회의에서의 사담은 불허합니다.”
“과연. 한 세기 전과는 달리 나름의 연륜이 쌓였다 이건가.”
“…….”
평정은 순식간에 박살났다.
하이그리드 재상은 나를 압박하기도 전부터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를 지켜보던 열국의 대표들도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빌헬름 마이어가 하이그리드 재상을 알고 있었나?”
“한 세기 전의 인연이라니, 대체 뭐지?”
“절정고수부터는 노화가 극도로 더디다고 들었지. 어쩌면 빌헬름 마이어가 하이그리드 재상의 젊은 시절에도 살아있었던 전대의 노고수일지도 모른다.”
영상스크린 위로 열국의 대표들이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회의는 시작부터 파란을 일으켰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위대한 전사장 펜바우어. 문메이지 아샤. 시프마스터 리베이. 전대의 수많은 고수를 배출해낸 제국 제일의 보육원 출신을 몰라볼 리가 없지. 네놈, 로드리어스 보육원 출신이군.”
“빌헬름 마이어. 당신의 정체는 대체 뭐지? 로드리어스 보육원의 초대 졸업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니. 그것도 모두 미궁으로 사라진 죽은 자들을 어찌 알고 있었지?”
“로드리어스 엘드리고.”
나의 무덤덤한 선언에 하이그리드 뿐만 아니라 제국 측 인사 전원과 등 뒤의 쿠로와 모자이크녀가 패닉에 가까운 경악에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지상에 남긴 단 하나의 비밀병기다.”
당연히 여기서 내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과거의 내 행적에 지금의 나를 끼워 맞춘다.
나는 어디까지나 NPC로 머무를 필요가 있다.
“로드리어스 엘드리고는 미궁공략을 위한 최고의 인재들을 엄선해서 길러내었지만, 동시에 공략이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지. 그렇기에 3군에 불과한 애송이들은 지상에 남겨뒀다.”
“크윽...!”
“바로 네놈, 하이그리드 같은 놈들을 말이지. 그의 예상대로 너희들은 제국의 주요인사가 되어주었고, 제국을 보다 강성하게 만들어주었지.”
그렇기에 과거의 행적을, 과거의 지식을 잠시 빌려온다.
아주 조금만.
편린에 불과할 정도라고 해도 위력은 압도적이다.
“그리고 제국은 모든 가능성이 닫혀버렸다.”
“뭐... 라고!?”
“제국에 자리한 세 개의 미궁도시가 지난 백 년 동안 심층지대에 도전할 모험가 파티를 투입한 건 몇 차례였는가.”
3군 애송이들은 모두 미궁에 도전할 자격조차 없는 자들. 아래로 내려간 건 그들보다 몇 곱절은 뛰어난 2군 예비조와 1군 공략조다.
그리고 그들은 단 한 명도 지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모두 나의 다음 도전을 위한 업적만을 달성한 채, 미궁 안에서 저마다의 영웅적인, 혹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남은 자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명백했다.
두 번 다시 미궁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미궁을 돌파할 수 없다.
모든 역량은 온존시킨 채 지상에서의 삶에 충실하겠다.
그런 기조를 지닌 3군 인재들이 제국의 요석을 차지했다면?
제국의 미궁공략은 현저히 뒤처졌을 거다.
자연스레 국력은 부강해지고 다른 나라보다 앞서나가겠지.
타국은 지상에서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으니 어떻게든 미궁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었겠지만, 그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거다.
랭킹 1위의 게이머조차도 돌파해내지 못한 미궁을, 인류의 전략병기인 용사조차도 돌파해내지 못한 미궁을 몇몇 국가의 특급모험가나 군대 따위가 돌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연스레 내게서 선택받지 못한 패배자들의 선택 덕분에 제국은 부강해지고, 그들의 입지는 한층 더 튼튼해졌겠지.
“네놈들은 로드리어스 엘드리고의 의지를 이어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너희를 향한 모든 기대를 접고 그분의 뜻에 따라 제국을 떠났다.”
“!!”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그분이 자신의 제자들과 후인들이 남아있는 제국을 위해 내게 남겨둔 백 년간의 침묵이라는 제약이 마침내 끝을 맞이하였다.”
나는 내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오연한 강자의 얼굴을 드러낸 채, 버러지를 보는 눈으로 하이그리드를 멸시하였다.
“더 이상 네놈들의 하찮은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미궁공략이 퇴보하기까지 하는 상황을 좌시할 수는 없다.”
“미친 소리를!! 전대의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미궁에 집어삼켜졌다! 그 때와 같은 참사를 대체 몇 번이고 반복할 셈인가! 미궁은 지옥이다. 인간은 절대 넘을 수 없어!!”
“그런가. 그렇다면 한 가지 흥미로울 질문을 던져주지.”
알폰스 왕국의 미궁도시 브람에서도 확인된 이벤트다.
제국의 미궁도시 세 개라면 당연히 같은 이벤트가 있을 거다.
그것도 브람 시 이상의 거대한 규모로.
“마지막으로 몬스터웨이브가 일어난 건 언제였는가.”
“칠십 년 전. 미궁은 공략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상층부에서의 활동만을 유지하도록 한 뒤,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으면 미궁은 재앙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하. 크하하하하하!”
“뭐가 우습다는 거냐! 이걸로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건 증명되었다. 미궁공략 따위는 백해무익한 짓에 불과하다. 그런 재앙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돼!!”
“나는 네놈보다는 미궁에 대해 아는 바가 많다. 그런 내가 친히 제국을 향한 마지막 호의를 담아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지.”
브람베르크에게도 한 번 언급했던 사실이다.
“미궁에 휴식기는 없다.”
“그건 무슨 의미냐.”
“그저 미궁 안에서 몬스터웨이브를 일으켜야 할 몬스터들이, 이를 유발해야 할 계층보스가 보다 강한 존재에게 모조리 잡아먹히고 있을 뿐이다.”
평화 따위는 전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는 틀렸다.
지난 백 년의 시간을 근본부터 모조리 부정해준다.
“10년이면 위협적이고, 20년이면 피해가 막대하겠지. 30년이라면 군대가 동원되어야 할 수준이고, 40년부터는 전례가 없는 재앙의 시작이다.”
“!!!”
“알폰스 왕국은 고작 40년에 불과했다. 아직 재기의 여지가 남아있지. 허나 제국의 70년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대재앙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지옥이 지상에 강림할 거다.”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무서운 사실은 따로 있다.
“심지어 제국이 보유한 미궁도시는 하나가 아닌 세 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너희가 감당해야 할 지옥은 세 가지이다.”
나는 확신어린 어조로 말했다.
“로드리어스 엘드리고가 이끈 정예파티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원흉. 심층지대의 지옥 같은 무언가가 미궁에서의 만찬에 질려 지상으로 눈을 돌리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전부 네놈들의 어리석음이 자처한 결과다. 제국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맞서더라도 승산은 한없이 희박하다. 제국은 앞으로 십년을 버티지 못하고 비참하게 멸망할 것이다.”
이런 가혹한 현실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비참한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런 상황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본래의 의제를 꺼낸다.
“그럼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한 채, 본 회의에 임하도록 하지.”
나는 넋을 놓은 하이그리드 재상을 대신하여 열국의 대표들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흑산회는 배제되어야 마땅한 악의 조직인가?”
알폰스 왕국의 대표는 나와 탈론 공작으로 갈렸다.
자연히 우리는 의결권을 상실하였다.
제국과 열국 중 아홉 국가만이 의결권을 행사하는 셈이다.
보통의 방식으로는 여기서 승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제국은 3점을 기본으로 지닌다.
그들을 지지하는 불변의 지지계층이 다시 3점을 행사한다.
알폰스 왕국이 의결권을 잃고 다른 6국이 모든 표를 모으더라도 점수는 6점.
냉정하게 생각하면 ‘재투표’ 이상의 결과는 나올 수 없다.
재투표가 벌어진 뒤, 내가 어떤 이권을 제시하며 저들을 설득하려 하든, 저쪽은 제국이라는 방대한 힘을 등에 업은 채 6국동맹을 설득해서 결국 표를 가져갈 거다.
질 수밖에 없는 이벤트였다.
그러라고 있는 자리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과거의 나의 행적이 나를 구해내었다.
[의제 1. 흑산회는 배제되어야 하는가.]
[찬성 : 3점]
[반대 : 9점]
로드리어스 엘드리고의 가르침을 받은 3군 제자들이 제국의 유력자가 되어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들이 어떤 성향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왔을지도 간단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옥급 계층보스]의 출현을 예고함으로써 제국을 근본부터 뒤흔들고 부동의 3표를 모조리 빼내는 데 성공했다. 미궁공략이 더딘 건 제국만이 아닌 열국 모두 마찬가지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30년에서 50년은 축적 됐겠지.’
이제는 금은보화나 명성 따위를 위해서 미궁을 공략하는 게 아니다.
미궁세계는 확실히 전작보다 세계관이 확장되었다.
한 세기의 평화 속에서 급격히 세를 불린 미궁들이 막강한 계층보스를 필두로 보다 강력해진 몬스터들을 쏟아내며 재앙을 일으킬 것이다.
제국의 붕괴.
이는 미궁세계의 테마를 드러내는 좋은 계기가 되겠지.
게이머들의 입지는 그만큼 자연스레 높아진다.
미궁공략은 이제 각 왕국의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최우선 과제가 될 테니까.
나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닫고 각국의 대표들이 모인 세계회의에서 경고하였다. 설령 다른 게이머들이 나보다 먼저 이를 깨달았다고 해도 나만한 영향력을 미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나는 비로소 확신하였다.
내가 가장 앞서있다.
미궁세계의 모든 게이머들의 선두에 선 것이 바로 나다.
Rank 97 로드리어스 엘드리고.
나의 과거.
그 모든 걸 뛰어넘어 New Rank 1 빌헬름 마이어가 되었다.
“첫 번째 의제의 투표결과, 흑산회의 존속이 결정되었다. 그럼 곧 바로 두 번째 의제에 들어가겠다.”
급변하는 미궁정세에 맞설 모든 중요기밀은 흑산회가 움켜쥐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이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로드리어스 엘드리고의 제자들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하고, 그 제자들보다 뛰어난 자들이 모두 미궁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비화가 알려졌다.
열국의 대표들은 무조건 제국보다 내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알폰스 왕국의 정당한 지배자는 흑산회와 탈론 공작 중 누구인가. 선택이 쉽도록 간단한 힌트를 제공해주지.”
“…….”
“미궁에 무지한 하이그리드 재상과 그가 지지하는 탈론 공작을 지지할지. 아니면 미궁공략의 선구자나 다름없던 로드리어스 엘드리고의 비전을 이어받은 흑산회를 지지할지 선택하라.”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의제 2. 탈론 공작과 빌헬름 마이어 중 알폰스 왕국을 통치할 정당한 지배자를 결정하라]
[탈론 공작 : 3점]
[빌헬름 마이어 : 9점]
회의의 주도권은 일방적으로 기울었다.
“두 번째 의제의 투표결과, 바로 이 몸 빌헬름 마이어가 알폰스 왕국을 통치할 정당한 지배자로 결정되었다. 나는 정당한 지배자의 권한으로 탈론 공작의 공작 위를 박탈하겠다.”
목적?
그거야 뻔하다.
“탈론 공작은 공작위를 잃었다. 그렇기에 신언에 의해 보증된 계약은 탈론 ‘공작’이 존재하지 않기에 효력을 상실하였다. 저항한다면 네놈의 무리는 반역도당이 될 것이다. 어찌하겠는가?”
한 순간에 탈론 공작이 믿고 의지하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제국의 지지도, 신언의 보증도, 공작의 직위도.
전부 말이다.
탈론은 압도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모든 저항의사를 상실하였다.
“살려주십시오.”
나는 그의 애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마짐가 세 번째 의제에 들어가겠다. 절망의 마녀 도로시 이지스의 신변을 제국이 구속해야 하는가. 물론 이번에도 이해하기 쉽도록 힌트를 제공해주지.”
“…….”
“도로시 이지스는 미궁공략을 위해 엄선된 최고의 인재다. 그녀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놈들에게는 결코 미궁공략에 도움이 될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겠다. 그럼 의결권을 행사해보아라.”
[의제 3. 도로시 이지스의 신병을 제국이 구속해야 하는가.]
[찬성 : 0점]
[반대 : 12점]
하이그리드 재상조차도 내게 맞설 의지를 상실하였다.
이로서 확정되었다.
세계회의는 완벽하게 내 손 안에 들어왔다.
또한 알폰스 왕국은 나의 것이 되었다.
열국의 대표들과 제국은 내 도움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지상에서 내게 맞설 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작품 후기 ============================
[후기에 쓸 말이 없어서 끄적이는 잡담]
이 소설은 미궁이 나오는 소설이 맞습니다. 물론 1부에서 지상과 미궁의 등장비율은 99 대 1입니다.
[후기에 ~~ 잡담 2]
1부는 다음 챕터로 끝이 날 예정이지만 일상 챕터가 하나 더 들어가거나 외전 몇 편만 찍 쓰고 바로 2부(미궁공략)로 돌입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