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8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3)
악신은 나를 향해 손을 펼쳤다.
“멈춰. 이건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두려움이 보이는군.”
“진심으로 악신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길 수 있다면 그 아가리를 열지도 않았겠지.”
“정보를 주겠다.”
틀림없다.
특성과 칭호의 효과가 없는 상태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평소 신에게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지 물어봐라.”
“왜 그렇게까지 살고 싶어 하지? 어차피 네 패배는 이미 결정되었는데. 화신체를 얻기도 전에 죽으면 중대한 타격이라도 입게 되는 건가?”
“뭐? 너 따위에게 죽는다고 타격을 입을 리가 없잖아.”
빵을 구우면 토스트가 된다는 것처럼 무척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냅다 검집으로 놈의 뺨을 후려쳤다.
“악! 뭐하는 짓이냐!”
“맞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지는 게 인간이거든.”
“오. 거참 악신처럼 고약한 놈들이군.”
아무튼 협상의 여지가 생긴 것 같다.
“그럼 나한테 죽으면 네가 손해보는 건 뭐지?”
“자존심.”
“뭐?”
“쪽팔리잖아. 악신이나 되어서 인간한테 뒤져버리고.”
“...정말 그게 다냐?”
악신은 하등한 생물을 내려다보는 눈으로 나를 멸시했다.
“생각해봐라. 네가 개미들이 꼼지락거리는 걸 지켜보며 즐기다가 개미의 몸을 빌리려고 하는 상황을. 그러던 도중에 개미가 첨단기기를 박살내고 개망신을 주면 기분이 어떻지?”
“더럽고 쪽팔리지.”
“바로 그거다.”
“그래서 개망신을 당하지 않는 대가로 내게 뭘 해주겠다고?”
“정보. 대신에 네가 찾아라.”
뭐지 요 등신은.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건가.
“잠깐, 잠깐! 정말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런다. 마음 같아선 아무 일도 없이 돌아가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편법을 고민 중인 거라고.”
“횡설수설이 심하군. 알아듣기 쉽게 말해라.”
“아아. 이걸 잊었군. 내가 망신을 안 당하려면 격의 시험에서 내가 살해당하는 일이 없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내가 죽지 않고도 네가 시험에서 이길 방법을 찾아내라는 거다.”
이해했다.
부전승이나 기권승, 그런 것들을 찾아내라는 거다.
“별로 내키지 않는군.”
이번에는 악신이 당황했다.
“거짓말. 나는 악신이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온갖 신비를 알고 있고, 수많은 신비를 일으키는 이적자이기도 하다. 공포군주의 이름을 물려받은 네놈에게는 더욱 도움이 되겠지.”
“딱히 필요 없는데.”
“하하하. 눈에 빤히 보이는 허세로군.”
“허세 아닌데.”
“튕기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군.”
“그래 보이나?”
“...진짜 필요 없나보네.”
악신은 10년은 늙은 것 같은 지친 얼굴로 주변에서 의자를 하나 끌고 와 힘겹게 앉았다.
“왜 안 궁금한데?”
“음?”
“악신도 아닌 악마 따위에게도 신비의 편린이나마 엿보겠다며 영혼을 바치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너와 그들의 차이는 대체 뭐냐.”
뭐긴 뭐야.
게이머랑 NPC 차이지.
“타고난 업의 무게가 다를 뿐이다.”
“으음. 네놈이 전대 영웅의 뜻을 이어받은 계승자라는 건 알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텐데.”
“나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말해대는군.”
“어느 정도는. 화신체로 삼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흥미로운 행동을 거듭 해왔으니까.”
“날 계속 지켜보아 왔던 건가?”
“그렇다.”
악신은 의미심장한 썩소를 지었다.
“내 얼굴로 그 따위로 쳐웃지 마라.”
“…….”
악신은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을 둘러싼 굴레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이 평민의 삶이었다. 자신들을 둘러싼 굴레를 극복하지 않았다. 그것이 범인의 삶이었다.”
“어떤 굴레를 말하는 거지?”
“폭력의 굴레. 이익의 굴레. 미궁의 굴레. 거대한 굴레들의 앞에서는 귀족이나 왕족, 최고권력자나 흑막, 킹메이커를 막론하고 모두가 시시한 애송이들에 불과했지.”
정말로 흥미 없고 따분하다던 눈에 약간의 빛이 돌아왔다.
“그러던 와중에 네놈, 빌헬름 마이어를 보게 되었지.”
아무래도 이놈은 다른 12선신이나 12악신과 달리 예전부터 나를 지켜보아왔던 모양이다.
“권능을 하사받은 공포의 사제도 아니면서 누구보다도 공포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뿐만 아니라, 현실에 만연한 모든 굴레를 정면에서 마주치는 대로 전부 박살내며 뛰쳐나왔지.”
“그런 대단한 몸은 아니다.”
“당연히 아니지. 벌레 새끼가 이쯤 칭찬해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고 욕심만 더럽게 쳐부리는 거냐.”
“…….”
“아무튼 너는 벌레 중에서는 특출한 벌레였다. 딱정벌레 사이에서 위세를 자랑하는 장수말풍뎅이 급의 존재감을 자랑했지. 이거 아는가? 장수말풍뎅이는 혼자서 벌집을 부술 수도 있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아.
그딴 토막 상식 따위 필요 없어.
“특히나 ”
“그만. 장수말풍뎅이에 대한 이야기 따위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정말인가? 그거 유감이군. 너라면 나와 같은 취미를 지녔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럼 어쩔 수 없지. 비슷하게 생긴 황소코뿔풍뎅이로 얘기하는 수밖에.”
저기요? 시발 장수말풍뎅이랑 황소코뿔풍뎅이랑 뭐가 다른 건지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이 새끼 벌레타령만 오지게 해대더니 그냥 벌레성애자였네.
빌어먹을 파블로 같은 새끼.
“닥쳐. 벌레 얘기 따윈 알고 싶지 않다.”
“…….”
“난 너처럼 같이 얘기할 사람도 없어서 신자들한테 히스테리나 부리고 다니는 심심한 악신이 아니다. 내 귀한 시간을 그딴 풍뎅이 얘기로 허비하지 마라.”
툭 까놓고 말해서 악신이라는 거 완전 민폐잖아. 골방에 처박힌 노인네가 확성기 들고 정신이 좀 모자란 젊은 것들을 말로 후리면서 이용하고 다니는 거라고.
멍청한 신도들과 함께 멍청한 짓을 하고 다니는 건 즐거울지 모르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만한 민폐가 따로 없다.
하물며 그런 놈들의 대표격인 악신과 대화를 나누는 건 백해무익하기만 하다.
‘미궁도시에서도 악신의 사제로 전직한 게이머가 있었지.’
강하기야 강했다.
쉽게 강해지고, 사제의 한계를 넘어선 권능의 위력도 보았다.
딜탱힐이 모두 다 되는 사기캐라며 모두가 부러워했지.
근데 그놈의 비참한 말로를 보고는 아무도 안 부러워했다.
그 게이머는 콩 먹고 죽었다.
정확히는 콩을 먹었다는 이유로 격분한 악신이 번개를 추락시켜 죽였다.
‘검정콩은 싫어!! 그딴 맛없는 걸 먹는 감각을 내게 느끼게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신벌 내렸다고.
“…….”
지금은 내 얼굴로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저놈도 한꺼풀만 들춰내면 그런 싸이코 같은 면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친한 척해도 가까이 해서 좋을 상대가 아니다.
갑자기 길 가다가 벌레를 밟아 죽였다고 ‘이 벌레새끼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소중한 황금쌀벌레를 밟아죽이다니!’라고 외치면서 거대한 발을 소환해 밟아 죽여도 이상할 게 없다.
‘아. 이거 뒷감당도 문제네.’
지금이야 저놈이 쪽팔림 때문에 자제하고 있지만 격의 시험이 끝나면 그딴 것도 없다.
한 번 생긴 호기심과 내게 받은 수치와 굴욕의 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다음에는 더 치밀하게 접근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치려고 하겠지.
어떤 비장의 한 수를 일으켜서 엿을 먹여야할지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벌컥!
대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어?”
악신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저 새끼 뭐야. 야, 말려봐.”
“뭐를?”
“네놈의 변견! 자격시험에 끼어들고 있잖아!”
그리 말하는 악신의 형체가 조금 흐릿해졌다.
팡─! 파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주먹질이 보였다.
“보통 인간은 접근하기도 힘든 불길한 기운을 뿌려놓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서 권압으로 내 권능을 흐트러뜨리고 있다고! 어서 말려라!”
“내가 왜?”
“그야 자격시험이 끝나면..”
“쟤가 깬다고 내가 탈락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오히려 네 입장에서는 외부인의 개입으로 진 거니까 날 상대로 1 대 1로 발린 게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어서 좋지 않은가?”
“그거라면 납득할 수 있겠지. 하지만 상대가 네놈의 싸이코 변견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는가! 너 같으면 저딴 놈 때문에 백 년만의 외유를 망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그야 물론 개빡치겠지.
나야 언제나 하고 있는 생각이라 엄청나게 공감이 된다.
카이사르가 개입해서 꼬인 일이 한두 번이어야지.
“…….”
뭔가 불쌍하네.
사과의 의미로 합장을 해주었다.
“어디의 예를 차리는 거냐! 지금 시비 거는 거냐!?”
“거참 가리는 것도 많군.”
“공포의 교단은 갓 태어난 신선한 산양의 심장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심장을 향해 칼을 겨누는 자세를 예의 있는 자세로 여긴다! 예의를 갖출 거면 제대로 갖춰라!”
그러니까 그런 토막상식 별로 알고 싶지 않다고.
배워서 어디다 써먹을 건데.
-성가시군.
바로 그때, 살기가 풀풀 넘쳐흐르는 목소리가 아득히 먼 천공으로부터 흘러넘치는 것처럼 들려왔다.
이윽고 지금까지의 주먹질과는 궤를 달리하는 폭음과 함께 악신의 육체에 큼지막한 구멍이 뻥 뚫렸다.
반쯤 걷힌 안개 너머, 악신의 복부 너머로 카이사르가 얼굴을 들이대며 무뚝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보스. 이 시커먼 안개는 뭡니까?”
“부숴도 되는 거.”
“그럼 전부 부수겠습니다.”
나찰처럼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전신에 힘을 준 카이사르가 허공에 폭풍과도 같은 27연격을 퍼부었다.
-이런 바보 같은...!
어딘지 모르게 허망하게 들리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악신의 환상과 검은 안개는 일제히 사라졌다.
[당신은 격의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현격한 난이도 상승으로 인한 공포의 악신의 개입에도 굴하지 않는 승리를 거두었기에 보상수준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30 이상의 능력치들이 각각 20씩 상승합니다.]
[30 미만의 능력치들이 각각 10씩 하락합니다.]
[공포의 악신의 사도로서의 권능이 부여됩니다. 당신은 이제 타종족과 무생물조차 공포심을 느낄 수 있도록 ‘생존본능’과 ‘종족본능’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상한수치를 돌파한 활약으로 인해 여분의 정산포인트가 500000CP로 지급됩니다.]
[공포의 교단 소속 모든 신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관련 인물들의 충성도 및 호감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확장능력치 ‘공포’를 각성합니다.]
[공포 능력치가 상승할수록 동일한 공포로 야기할 수 있는 효과가 더욱 커집니다.]
[당신은 게이머 최초로 ‘격’을 이룬 존재가 되었습니다. 절대지경에 접어든 게이머는 그 이전의 게이머와는 격을 달리하는 막강한 절대자입니다.]
[인류를 한정으로 당신의 적수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편입니다. 허나 세상에는 인간과는 태생적으로 격을 달리하는 막강한 종족들도 더러 존재합니다.]
[타인의 위에 군림하느라 다가오는 위협을 깨닫지 못한다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 모릅니다. 주의하십시오. 경계하십시오. 그리하면 보다 오래 군림할 것입니다.]
[최초달성 보너스로 공포 능력치가 25 상승합니다.]
[고유특성의 효과로 최초달성 보너스가 강화됩니다.]
[강화된 최초달성 보너스로 공포 능력치가 추가로 25 상승합니다.]
강해졌다.
그런 실감이 확실하게 들 정도로 공포를 이용하는 힘이 확실하게 늘어났다.
어쩌면 저 싸이코같은 카이사르도 공포의 힘으로 보다 원활하게 통제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마침내 이 빌어먹을 비글 같은 놈의 목에 목줄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악신의 분체를 제거했습니다.]
[카이사르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카이사르가 ‘격’의 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격’의 시험을 통과합니다.]
[카이사르가..]
아니 잠깐.
넌 왜 멋대로 무임승차 하는 건데 개새끼야.
============================ 작품 후기 ============================
형이 왜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