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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하들이 미친듯이 유능하다-136화 (136/224)

00136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11)

해적왕 바질은 자신이 세운 해적군도에 지극히 만족했다.

해적군도는 오래도록 해적들의 중심지로 자리해왔다.

해적군도 인근의 해로는 기기묘묘하고 천변만화하여 숙련된 뱃사공들도 해적들만의 비밀스러운 지식을 전승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진입할 수 없다.

설령 커다란 군함을 끌고 오더라도 대자연의 무자비한 격랑과 소용돌이, 폭풍우에 휩쓸리거나 암반에 충돌하면 수몰은 피할 수 없다.

해군은 무수한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해적군도는 천해의 요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적군도가 있는 한, 중립해협은 해적들의 것이다!

바야흐로 남부 해적들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해협 남쪽의 알폰스 왕국과 북쪽에 인접한 에르웰 왕국. 두 국가는 진즉에 해적군도의 공략을 포기하였다.

그저 해협을 넘어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강까지 뚫리지 않도록 소극적인 감시망만을 펼쳤을 뿐이다.

그마저도 국정이 전환되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손쉽게 침투가 가능할 정도로 구멍투성이가 되었다.

“분명 그런 호구였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해적군도 인근 해로에 해적들만 피할 수 있는 함정과 몬스터까지 깔아두었는데...

각국의 최고 실력자들은 해적군도 바로 위로 공간이동을 해서 단숨에 군도 내부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침략의 날에 대비해 준비해둔 모든 것은 써보지도 못하거나 전부 허망하게 박살났다.

“어째서 실력자란 실력자는 다 튀어나오는 거야!?”

손짓 한 번에 대기의 온도를 한겨울처럼 낮추는 마법사부터 분노만으로 천벌을 내릴 수 있는 주교, 검을 휘두르면 지형지물이 갈라지는 소드마스터까지 고수란 고수는 총출동하였다.

느닷없는 기습에 나선 고수들은 각기 다른 국가 출신이었지만 그런 이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마녀를 내놔!!”

“카이사르의 애첩은 어디에 숨겼냐!!”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다는 거였다.

“시발! 마녀 몰라! 마이어 왕국의 악마계약자의 애첩은 또 왜 여기서 찾는데!”

불쌍한 부하 해적들이 악을 쓰며 반박했지만 돌아오는 건 자연재해의 위력에 못지않은 인재지변 급 공격과 차디찬 개죽음뿐이었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서는 뭐라는지도 모를 헛소리만 하고 다니는 걸 보면 다들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었다.

해적왕 바질은 비밀통로를 향해 달아나면서 이를 악물었다.

“시발. 개새끼들이 드디어 명분을 만든 거야. 그간 해먹은 게 도를 넘었다 이거겠지. 알폰스 왕국의 뒤를 이어 나타난 마이어 왕국에 이 정도의 힘이 있었을 줄이야...”

바질은 똑똑했다.

세계회의에서 일어난 참사를 듣고 마이어 왕국에서 해적질을 하면 어떤 국가도 그들을 돕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마이어 왕국의 국왕 빌헬름 마이어나 그가 거느린 흑산회에 대한 수많은 악소문을 듣고도 과감하게 내륙으로 이어지는 강을 타고 내려가 해적질을 할 수 있었다.

심각한 착각이었다.

빌헬름 마이어의 악명은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드높았다.

세계회의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각국이 협조를 한다.

대륙의 유일한 제국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

그제야 바질은 깨달았다.

‘이미 세계의 질서는 놈들에게 기울었다!’

이대로 도망치면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다.

비밀통로의 끝에 대기 중인 선박은 그가 해적군도의 지배자가 아닌 바다를 누비는 대해적 바질이던 시절부터 함께 해왔던 세상에서 가장 신속한 배 바질 호였다.

한 번 탑승해서 바다 위로 뜬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쫓을 수는 없다. 하도 값이 비싸서 해적군도에는 사용하지 못한 공간이동 왜곡 마법진도 해적선에는 설치되어져 있다.

즉, 일단 배에 타면 역습을 받을 걱정은 없다.

뒤탈이 없으면 해야 할 일은 뻔하다.

복수다.

물론 무력으로 어찌할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 모든 일의 주범은 필시 마이어 왕국임이 틀림없다.

“개자식들. 마지막 가는 길에 엿 하나 먹여주지.”

명분은 아무렇게나 둘러대고 다니는 핑계 같은 거다.

세간의 눈을 의식해서 대충 둘러대는 변명이다.

때로는 그 핑계가 제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바질은 명분을 이용하기로 했다.

지금 세계 각국을 움직이는 명분은 마녀와 카이사르의 애첩.

만일 가짜 마녀가 나타나 특정 국가에 의탁하면 어떨까.

당연히 욕심이 나겠지.

덤으로 그 마녀가 기가 막히게 이쁜 미녀라면?

더욱 더 장난 아니게 욕심이 날 거다.

마녀(미녀)는 한 명이고 노리는 자는 여럿이라면?

답은 뻔하다.

잔혹한 피바람이 불 차례다.

“라헬. 마녀를 연기해라.”

“바질! 날 버릴 셈이야!?”

“진정해. 네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니까. 해적군도에서의 생활은 즐거웠겠지만 해적선에서의 생활은 달라. 더러운 사내새끼들이 널 어떻게든 한 번 따먹으려 안달이 날 거다.”

“바질이 지켜주면 되잖아!”

“일 년 365일 24시간 너를 지켜줄 수는 없어. 언젠가는 내가 널 돕지 못하고 넌 끔찍한 일을 겪게 될 거야. 지금이라면 차라리 각국의 실력자를 유혹하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어.”

라헬은 해적왕 바질의 애첩답게 대단한 미모를 자랑했다.

정성껏 땋아 올린 머리와 어여쁜 얼굴, 나풀거리는 옷에 남심을 흔드는 매력적인 몸매와 능란한 유혹까지.

남자의 애간장을 녹이며 마음을 사로잡는 미녀였다.

“마이어 왕국만 아니면 상관없어. 널 지켜줄 수 있는 국가로 가. 가서 마녀 행세를 해. 네가 카이사르의 애첩을 납치한 마녀라고 하면 모두가 널 뒤로 빼돌리려고 할 거야.”

“바질...”

“제기랄,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 제국으로 가. 이게 우리 두 사람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야. 얼른 가버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라.”

바질은 눈물을 흘리며 비밀통로를 향해 떠났다.

울먹이던 라헬은 눈물을 슥슥 닦았다.

사슴 같던 눈망울은 거짓말처럼 표독스레 변했다.

“개자식. 왕후가 부럽지 않게 해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만 살겠다고 도망쳐? 그래, 꺼져라. 꺼져!”

씩씩 거리며 욕설을 내뱉기도 잠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며 해적마을이 뇌광에 휩싸이고는 마을 전체가 활활 불타올랐다.

다른 쪽에서는 시퍼런 검강이 번뜩이더니 반월 형태로 쭉쭉 날아가 바위산이라고 불릴 정도로 크고 높은 바위를 반으로 뚝 잘라서 무너뜨렸다.

“…….”

지금부터 개인의 실력만으로 지형지물을 바꿀 수 있는 실력자들의 틈바구니에 들어가서 실력자를 유혹해야 한다.

라헬은 고민했다.

그냥 대뜸 정면으로 찾아가서 ‘내가 마녀고 난 미녀에요. 그리고 난 당신이 마음에 들죠. 마이어 왕국으로부터 보호해주시면 성심성의껏 당신을 모실게요.’라고 할까?

아니다.

그런 사람 좋은 바보는 바질밖에 없다.

실력자들은 인간의 감정이 일정부분 사라진 인간병기다.

미모도 관심이 있을 때나 먹히는 법이다.

의도적으로 모든 감정을 죽인 전투태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상황을 만들어야 해. 난 피해자야. 실력자들이 주저 없이 공격하기를 주저하고, 나라는 사람을 적이 아닌 구해줘야 할 아군으로 볼 필요가 있어.’

라헬은 그저 예쁘게 생긴 미녀이기만 한 건 아니다.

살기 위해서 기술을 익히고 지혜를 습득했다.

다재다능이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말과도 같았다.

“에이드!”

“라헬! 바질님은 어디에 있고 너 혼자 여기에 있지?”

해적군도 도처에 존재하는 비밀은신처를 찾아가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하던 사람이 딱 숨어있었다.

한때 바질의 경쟁자로 활약했으나 해적군도를 장악한 바질에게 항복하고 적당히 타협한 끝에 해적군도 부대장의 직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평소 바질의 눈을 피해 라헬에게 추파를 보내왔었고, 한때는 그녀를 차지하고자 바질을 독살하려고 할 정도로 광적인 집착마저 지닌 인물이었다.

“바질은 도망쳤어요! 저희들을 버리고 혼자만 떠났어요!”

“젠장! 그 개자식이라면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

“저희도 얼른 도망쳐요. 어서요! 절 도와줄 사람은 이제 에이드밖에 없어요!”

불같이 화를 내던 에이드의 팔이 경련을 일으켰다.

에이드는 급히 몸을 멈췄다.

그는 생각했고, 빠르게 위화감이 든 이유를 깨달았다.

“바질이 널 두고 도망쳤다고? 그럴 리가 없어.”

“에이드?”

“그 더럽게 욕심 많은 놈이 자기 여자를 두고 떠나? 그래... 이건 거짓말이야. 도망치는 우리를 미끼로 삼아서 실력자들의 시선을 끌고 그 틈에 안전하게 탈출하기 위한 수작이겠지.”

에이드의 눈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마지막까지 넌 바질을 선택했군. 내가 아니라. 대체 그 녀석의 뭐가 그렇게 잘나서 네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냐!”

“전부 다요! 그는 당신처럼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힌 눈으로 저를 훑어보지도 않고, 강제로 범하려고 시도하지도 않고,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아요!”

에이드는 방금 전까지 치밀던 화가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보다 소름이 돋았다.

“누구야 그거?”

바질처럼 욕망의 화신 같은 남자도 없고,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라헬과 관계를 맺으려 하며, 매사에 폭력이 얽히지 않는 법이 없는 전형적인 쓰레기였다.

“욕망도 없고 성욕도 절제하고 폭력도 안 쓰면 바질이 아니잖아.”

“제 바질을 욕하지 말아요!”

“하. 요년이 머리에 칼침이라도 맞았나. 갑자기 왜 이래?”

라헬은 제 입술을 문 채 애써 표독스러운 표정을 유지했다.

바질과 에이드 모두 쓰레기인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녀는 에이드를 빡치게 해서 난폭한 해적에게 희생당하는 가엾은 미녀 연기를 해야만 한다.

“그래요. 전 거짓말을 했어요. 하지만 그건 당신이 바라던 거짓말은 아니에요. 바질은 훌륭한 사람이고 당신 따위가 그를 욕할 수는 없어요!”

“의사 불러줄까? 약 먹을래?”

“제가 한 거짓말을 밝히죠. 바질은 절 버리고 떠난 게 아니에요. 제가 여기에 남았죠! 저 자신의 의지로!”

에이드는 그녀가 뭐라고 지껄이던 이미 안중에도 없는 기색이었다.

독기로 가득하던 얼굴도 정신이 어떻게 된 여자를 딱하게 여기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라헬은 이대로 가다가는 제대로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에이드를 쓰레기답게 만들려면 그의 심기를 자극해야만 한다.

“당신 따위는 바젤에게 비교할 수 없어요!”

에이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은 영원히 2인자로 살겠죠. 당신보다 나은 사람은 바젤을 제외하면 전부 죽이며 살아갈 테니까!”

“라헬. 도가 지나치군. 한 대 얻어맞기 전에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텐데?”

“할 수 있으면 해보시죠! 당신 따위가 휘두르는 주먹도 고작해야 2인자의 주먹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라헬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소리를 쳤다. 그녀의 외침은 널리 메아리를 치며 힘껏 뻗어나갔다.

불과 1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을을 전소시킨 대마법사와 산을 박살낸 소드마스터가 있다.

그들의 청력이라면 틀림없이 그녀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 라헬은 목숨을 걸고 배짱을 부리며 힘껏 소리쳤다.

“때려봐! 카이사르의 애첩한테도 손찌검을 했잖아!”

“뭐? 이년이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에이드는 흠칫 놀랐다.

이 년의 반응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라헬. 일단 진정해. 그 따위로 소란 피우면 지금 군도를 초토화시키는 고수들이 몰려드는 거 알잖아. 응?”

“다 필요 없어! 내 아빠랑 엄마, 동생들을 죽인 살인마! 네 손에 죽은 마을 사람들은 절대 잊지 않아! 네 노리개가 될 일도 영원히 없어!”

“이 개 같은 년이! 대체 뭐가 문제야! 정말로 고수들이..”

에이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멀리 산맥 너머로부터 날아드는 소드마스터가 보인다.

우우우우웅

웅혼한 울림과 함께 격동하는 대기 중의 마나도 심상치 않다.

대마법사 급의 고수도 한 명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그제야 깨달았다.

라헬은 그를 개쓰레기로 몰고 자신만 살아남을 속셈이다.

에이드는 이를 악물고 검을 뻗었다.

‘혼자만 죽을까보냐!’

검을 휘둘러서 죽일 거라는 기대는 접었다.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 급의 고수라면 공간을 뛰어넘어서 상대를 격하는 기술이나 초장거리 마법도 있을 터.

말로 자신을 조진 라헬에게 복수하는 법은 똑같이 말로 조지는 방법뿐이다.

“카이사르의 애첩을 죽인 년 주제에! 혼자만 깨끗한 척을 하려는 거냐!!”

“거짓말 하지 마!!”

“닥쳐, 이 **아!!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네년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 애첩의 심장에 단검을 쑤셔 박는 걸!!”

이윽고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가 그들의 앞에 착지했다.

연기는 끝났다.

이제 심판의 시간이 도래하였다.

“이놈들은 뭐지? 아까부터 졸라 멀리서 지껄여대고.”

“글쎄. 일단 여자가 미녀라서 마음에 드는데.”

“…….”

그랬다.

두 사람의 열연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전혀 들리지 않았다.

고수라고 청력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명연기(안 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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