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4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19)
카이사르는 패트리 정보총장의 지시를 떠올렸다. 눈에 띄지 않고 은밀하며 티가 나지 않는 일. 그런 건 잠입임무 외에 달리 무언가가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지난 한 달간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한 채 적의 요새에 침투하였다.
카이사르 같은 눈에 띠는 녀석이 성질을 죽인 채 적진에 침투할 수 있다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에 아무도 이 사실을 간파할 수는 없었다.
“노모. 훌륭한 변장술을 지니고 있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노모는 노 모자이크의 줄임말이다. 가짜인 라헬을 지칭하는 말로 당사자는 어감이 이상해서 싫어하지만 물론 카이사르는 그딴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는 마초였다.
“패트리는 대 이주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우리를 가장 가까운 요새에 심어두었다. 가능한 한 우리의 차례가 오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만약 우리의 차례가 온다면.”
“유모님이 성동격서의 수로 네 방면의 성문 중 목표 외의 방면에서 교란을 펼치고, 카이사르님이 목표로 한 성문에 특공을 가해 문을 개방하시는 거죠.”
“잘 알고 있군.”
덤으로 유모는 모자이크 있음의 줄임말이다. 진짜인 모자이크녀를 지칭하는 말로 마찬가지로 당사자의 거부반응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별명이다.
“그럼 네가 할 역할은 대체 뭐지? 무능한 유모와 달리 노모인 너는 자신의 유능함을 진가로 내세워 내 환심을 사로잡고자 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 셈이냐.”
“성문을 개방하는 순간, 카이사르님을 향해 가해질 모든 공격을 잠시나마 중지시켜드리지요. 마법사 전력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요.”
“그거 좋군. 기대하도록 하지.”
라헬은 배신의 기회를 재보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강하다.
요새 안에서 정체가 발각되어도 덤벼드는 적을 모조리 쳐죽이고 유유히 떠날만한 실력이 있다.
‘여기서는 신용을 산다.’
그녀는 매력의 용사답게 성내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프로스트 공작>의 모습으로 변장하였다. 그리고는 카이사르가 성문을 여는 틈을 노려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뭣들 하는 것이냐! 지금 당장 공격을 중지하라!”
“예? 하지만 방금은 성문을 개방해서는 안 된다고...”
“이 또한 책략의 일환이다. 나의 책략을 부정할 셈인가?”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성문은 완전히 개방되었다. 하이그리드 재상은 무사히 성 내에 침입할 수 있었고, 그 틈을 틈타서 라헬은 종적을 감추었다.
열린 성문의 안쪽에서 카이사르가 날뛰기 시작하니 루커스 군은 결사의 돌진으로 성내에 침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프로스트 공작은 자신의 모습으로 위장한 적의 교란책에 당해 성문이 열렸다는 사실에 서늘한 위기감마저 느꼈다. 요새는 이미 틀렸다.
“빌헬름 마이어의 수읽기는 이 나의 존재마저 고려하고 있었단 말인가. 실로 두려울 정도의 악마적인 지혜다.”
“프로스트 공작님! 어떻게 합니까?”
“결사항전이다. 단 한 명도 여기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또한 나는 지금부터 제국 황실과 교신하여 대장군의 직파를 요청할 계획이다. 누구도 이 방에 발을 들지 못하도록 엄중히 감시태세를 유지하라.”
프로스트는 요새 주둔군을 버려둔 채, 자신만 홀로 공간이동 스크롤을 통해 요새에서 탈출하였다. 하이그리드 재상이 살아남은 이상, 다른 요새들의 수비도 굳건하리라 장담할 수 없다.
이제 남은 길은 달리 없다.
에르웰 왕국 남부전선이 궤멸하기 전에 원군을 이끌고 돌아오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남부의 모든 요새와 맞바꾼다면 아슬아슬하게 귀환은 가능하다.
적도 바보는 아니다.
기세를 타서 진격만 했다가는 후방에 남겨둔 요새 주둔군에 의해 언제라도 보급이 끊길 수 있다.
‘에르웰 왕국의 수도까지 뚫릴 걱정은 없다.’
프로스트 공작의 원군은 이 사실을 전제로 하고 세워졌다. 멍청한 카이사르도 다행히 폭주하는 일 없이 적당히 인근의 요새만 몇 개 점령할 작정이었다.
유모(진짜 모자이크)의 조언이 그에게 시기적절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주었기 때문이다.
노모 라헬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한달 반의 관찰기간을 통해서 카이사르가 보기보다 멍청한 사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를 위기로 몰아넣어서 제거할 수만 있다면?
마이어 왕국의 힘은 크게 반감된다.
동시에 자신 또한 무사히 카이사르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카이사르님. 유모의 조언은 잘못되었어요.”
“그건 무슨 의미냐.”
“보스의 사소한 부탁은 이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정도가 아니다?”
“생각해봐요. 보스가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한 거잖아요.”
카이사르는 생각했다.
하지만 빡대가리라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라헬은 인내심을 지니고 설득을 시도해보았다.
“보스는 원하는 건 뭐든지 명령으로 시킬 수 있는 분이죠. 그런 분이 부탁을 했다는 건 명령으로는 이행할 수 없는 중임을 맡기려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일리 있는 주장이군.”
“요새 안쪽에서 아군에 호응하여 성문을 개방하고 인근 요새들을 점령하는 정도는 명령이 내려져도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렇다.”
“그럼 카이사르님께서는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에 직면할 때까지 계속해서 북진하시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명령으로 이행할 수 없는 한계를 만날 겁니다.”
카이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나 자신의 한계를 마주칠 때까지 북진하라는 건가.”
“네.”
“그리고는?”
“그걸 넘어야 보스의 사소한 부탁을 이행한다고 할 수 있죠.”
“한계를 넘어선다. 실로 마음에 드는군.”
패트리 정보총장의 착각에 라헬이 거하게 약까지 치자, 카이사르의 착각은 더할 나위 없이 원대해졌다.
“루커스 군단은 들으라! 지금부터는 보스의 대리로서 나 카이사르가 새로운 지시를 내리겠다! 우리는 지금부터 전력으로 북진을 거듭한다!!”
“후방의 적은 어찌합니까?”
“그런 사소한 잔챙이들은 아군이 뒤에서 처리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북진이다. 단숨에 수도를 향해 진격한다!”
“!!”
“전원, 진격하라!”
루커스 군단은 카이사르의 호응이 있었기에 요새를 점령할 수 있었다. 분명 이 북진 또한 사전에 준비된 계획의 일환이겠거니 생각하며 흔쾌히 카이사르를 따라서 북진했다.
* * *
[루커스 군이 에르웰 왕국의 수도를 함락하였습니다.]
국경지대의 요새나 먹으면서 다 죽으라고 보낸 놈들이 적국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심지어 정보부에서 차나 타라고 보낸 카이사르는 아예 선봉장이 되어서 적장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다닌다.
기가 막하며 패트리 정보총장을 불러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보스의 지령대로 최대한 은밀하고 눈에 띄지 않게 적진에 침투시켜 성문을 개방하라는 사소한 지령을 내렸습니다.”
“정말로 그게 사소하다고 생각하는가?”
“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카이사르님의 능력이라면 단신으로 요새 하나를 재패하는 것도 가능한데 고작 성문을 여는 정도라면 별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요새를 점령한 뒤에는 왜 수도까지 진격을 했지?”
“보스의 사소한 부탁을 아직 이행하지 못했다는 통신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카이사르님에게는 이 정도는 사소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하찮은 잡일에 불과했나봅니다.”
술에 물탄 듯 매끄럽게 돌아오는 답변이다.
그럼 이건 어떠냐.
“그 잘난 카이사르는 왜 수도를 함락시킨 뒤에도 계속 북진하고 있는 거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패트리 정보총장이 내게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건 마이어 국왕폐하의 뜻이 아니었던 겁니까?”
“녀석의 독단이다.”
“헉!”
“너는 그 독단에 호응하고 있었지.”
“그, 그런. 즉시 연락을 취해 회군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교신을 시도했던 패트리 정보총장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교신이 불가능합니다.”
“뭐라고! 설마 적의 역습에 당한 것인가!”
“그게... 통신 사정거리를 벗어났습니다.”
“…….”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중계통신을 이용하는 겁니다. 저희의 사정거리 안에 통신이 가능한 사람을 심어두고 그곳에서부터 카이사르님과 연락을 취하면 연락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주 무능하지는 않군.
패트리는 다급하게 중계통신을 시도하였다.
“뭐라고!? 요새에서부터 교신을 시도해도 사거리 밖이라고!?”
“무능한 녀석. 뭘 당황하기만 하고 있는 것이냐. 요새에 새로운 병력을 주둔시키고 수도에 또 다른 일군을 급파해라. 요새와 수도를 징검다리 삼아 삼단 중계통신을 시도한다.”
“아, 알겠습니다.”
가볍게 국경지대만 먹을 생각이었는데 졸지에 에르웰 왕국을 반쯤 궤멸시킨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었다.
병력을 전진시키자 다른 요새에 틀어박혀있던 에르웰 왕국군이 쏟아져 나왔지만, 뜻밖의 반란군과 의용군의 등장에 피해는 경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반란군과 의용군의 합세로 인해 아군의 병력 수는 전보다 배 이상 많아졌다.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다 죽으라고 보낸 놈들이 왜 늘어난 거야?’
이유야 물론 뻔하다. 제국이 대 이주를 막고자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생존자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에르웰 왕국군이 반심을 품고 모험가들이 의용군을 일으켰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래도 에르웰 왕국까지 국토를 넓혀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갑작스레 늘어난 병력들을 새로이 배치하며 에르웰 왕국 내에서 팔기아 연합진영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도록 친 제국파와의 전면전을 벌였다.
그러는 한편, 전진배치를 내린 병력이 수도에 도착했다.
삼단 중계통신을 시도하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통신 사거리 밖입니다.]
[루커스 군이 에르웰 왕국 북부전선 요새를 함락하였습니다.]
통신은 안 되지만 시스템 알림은 들어오는 미묘한 거리를 두고 새로운 알림이 입수되었다.
이 미친놈이 기어이 왕국의 북단을 뚫고 타국까지 진격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에르엘 왕국을 간신히 수습하고 북부요새에 병력을 보내자 마치 약 올리는 것처럼 알림이 뒤따라 이어졌다.
[통신 사거리 밖입니다.]
[루커스 군이 참피 왕국 남부전선 요새를 함락하였습니다.]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거 후방을 정리하면서 따라갔다간 왕국 몇 개가 점령되어도 따라잡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실제로도 근거가 없는 예감은 아니다. 가는 곳마다 팔기아 제국의 만행이 널리 퍼지며 각국에서 반란군과 의용군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숨에 병력을 전진시켜 참피왕국의 수도와 북부요새에 동시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8단 중계통신을 시도하였다.
[통신 사거리 밖입니다.]
[루커스 군이 참피 왕국 수도와 북부 요새를 함락하였습니다.]
[팔기아 연합진영에 속한 롤리 왕국이 진영을 이탈하고 흑산회 진영에 항복하였습니다.]
아니 시발.
이 미친놈들이 왜 자꾸 카이사르를 위로 올려 보내는 거야.
항복했으면 저항도 없이 더 올라갔다는 거잖아.
단단히 빡친 나는 멸혼객을 사령관으로 삼아 본토에서 1차 증원군 10만을 위로 올려 보내고, 죽어도 상관없는 에르웰 왕국과 참피 왕국의 5만 병력을 징발하여 더욱 북부로 보냈다.
롤리 왕국은 자발적으로 5만의 병력을 보태어 10만의 연합군이 카이사르의 뒤를 쫓아 맹진격을 거듭하였다.
카이사르를 육안으로 포착할 때까지 요새와 수도마다 통신마법사, 이를 지킬 약간의 병력을 남겨두고 계속해서 진격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곤란한 일이 발생했다.
“중계통신이 가능한 통신마법사가 없습니다. 이대로는 선두로 병력을 보내도 보낸 병력과의 통신이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뒷골이 단단히 땡기는 사태지만 어쩔 수 없다.
루커스라면 모를까 카이사르는 버려도 좋은 녀석이 아니다.
나는 특단의 대책을 내세웠다.
“본국이 지닌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대군을 일으킨다.”
“예!? 그 말씀은...”
“2차 증원군은 이 빌헬름 마이어가 직접 이끌고 진격한다.”
그렇게 20만에 달하는 2차 증원군과 함께 전장에 펼쳐진 모든 병력이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질주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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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카이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