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5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20)
카이사르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이유?
그야 뻔했다.
‘보스가 고작 이 정도 때문에 내게 부탁을 할 리는 없겠지.’
적들은 만만했고, 별 어려움 없이 요새와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적을 해치울수록 그의 악명은 높아졌고, 적들은 그가 접근한다는 소식만 들어도 투항하거나 칼을 고쳐 잡아서 미리 갈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자연히 적은 더 약해졌고 카이사르의 북진은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어느덧 대륙의 절반을 가로질렀다.
“저기..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라헬도 어느덧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카이사르를 진격하게 만들었다가는 대륙통일이 이루어질 기세였다. 팔기아 연합진영은 이미 박살난 지 오래였다.
온전한 세력은 제국을 비롯한 제국의 인접국가들이 전부였다. 대륙 북부 일대에 있는 나라들이다. 남부는 이미 흑산회의 수중에 완벽히 들어왔고 중앙도 절반가량이 넘어왔다.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다. 한계를 맞이할 정도의 강적과 부딪히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있어야 보스의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라헬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야 이놈도 인간이니까 언젠가 한계가 오겠지. 그렇지만 제국의 한계가 더 빨리 찾아올 가능성이 너무 컸다.
“국가를 상대하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벨기아 연합진영은 이미 반파됐잖아요. 이제부터는 카이사르님을 피해서 각지에 숨은 초고수들을 추적해서 제거할 필요가 있어요.”
“초고수의 제거?”
“당장은 패배를 받아들이고 은거에 들어갔지만 카이사르님과 마이어 왕국군이 본토로 들어가면 그때 와서 등장해서 각지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수복하려는 간악한 자들이 있을 거예요.”
라헬의 조언은 카이사르의 남심을 제대로 자극하였다.
“건방진 피라미들이군. 감히 이 몸과의 대결을 회피하고 비겁하게 수작질을 부리고 다니다니. 그딴 사악하고 졸렬한 녀석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격분한 카이사르는 두 눈에 흉흉한 살기를 띠우면서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하세요? 적을 찾으러 가시지 않고.”
“은거고수라는 건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는 거지?”
“어... 음. 인적이 드문 곳에 있지 않을까요?”
“인적이 드문 곳은 많다.”
“장소를 추려주기를 원하시는 거군요.”
라헬의 두 눈이 반짝였다.
기회다.
마침내 카이사르를 배제할 기회가 찾아왔다.
“백 년 이상 인간의 발길을 불허하는 마경에는 언제나 은거고수가 숨어있기 마련이죠.”
“마경이라. 좋은 울림이군. 마음에 들었어.”
“…….”
이 새끼는 사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가 아닐까.
라헬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마경의 위치는 어떻게 알 수 있지?”
“이 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을 찾아서 장소를 실토하라고 협박해야죠. 분명 초고수가 은거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순순히 입을 열지는 않을 거예요.”
“똑똑하기만 하면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건가?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쓸데없는 부분에서 까다롭기는.
라헬은 애써 웃는 낯을 유지하며 대충 둘러대었다.
“그럼 궁중마법사나 일국의 재상 쯤 되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물어보는 건 어떤가요?”
“괜찮군. 마침 백보무투술을 응용하여 신경계통과 골격의 변형을 유발하는 백보고문술도 개발하려던 예정이었지. 적절한 고문대상이 없어서 연기했지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군.”
“저... 궁중마법사나 재상이 그런 흉악한 고문을 당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그놈들이 죽어서 내가 곤란할 일이 뭐가 있지?”
“없네요.”
카이사르는 싸이코였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나와는 관계없다고 생짜를 부리며 발암에 걸리게 할 게 뻔하니 라헬은 빠르게 그를 설득하는 걸 단념하였다.
타국의 궁중마법사나 재상이 고문을 받던 말던 그녀와는 별반 상관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이쪽이에요!”
쿵! 쨍그랑!
궁중마법사의 은신처를 둘러싼 마법장벽이 주먹질 한 방에 와르르 깨져나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불벼락이 쏟아졌지만 카이사르는 우산을 펼쳐서 모든 공격을 받아내었다.
그리고는 손잡이를 눌러서 기관총이 탄환을 쏟아내듯이 우산에 내장된 마법인 강화 파이어볼을 난사하였다.
쾅쾅쾅
“크아악!”
궁중마법사는 생각지도 못한 역습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활활...
그의 시체는 푸른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다.
“아니, 저걸 죽이시면 어떡해요?”
“궁중마법사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예상하지 못했다. 파이어볼 쯤은 간단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설마 이 정도의 약골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군.”
“그게 파이어볼이었어요? 무슨 파이어레인 마법이라도 쓰신 것 같았는데. 엄청난 마도구를 갖고 계시네요.”
“별 거 아니다. 남는 예산으로 가볍게 만든 흑산회 간부전용 심볼이다.”
“헉……. 흑산회의 재력은 굉장하군요.”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카이사르는 생색을 냈고 라헬은 껌뻑 속았다.
“그보다 이제는 진짜 흉내를 내지 않는군.”
“딱히 아무래도 상관없잖아요? 유능하기만 하면.”
“역시 넌 마음에 드는군. 그 기세로 재상도 잡아와라.”
“제가요?”
“내가 힘을 쓰면 재상도 잿더미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라헬은 마지못해 재상을 찾아왔다. 카이사르의 악명이 워낙 거대했던 탓에 그의 이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니 정보가 쏟아지고 협력자가 속출하였다.
왕궁 안 비밀은신처에서 재상을 찾을 때, 라헬은 은밀하게 재상에게 속삭이듯이 물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어디냐.”
“미, 미궁입니다.”
“미궁보다 더 위험한 곳을 말해라.”
재상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저어, 어인 일로 그것을 알려 하시는지..”
“안되겠군. 카이사르님이 일국의 재상의 뇌를 먹으면 셈계산을 잘할 것 같으니 사로잡으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너무 불쌍해서 적당히 정보만 얻고 풀어주려고 했는데 그냥 데려가야겠어.”
“히이익! 말하겠습니다! 멀록 영지의 대협곡 깊은 곳에 절벽으로부터 폭포가 하나 흐르는데,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대 악마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원시인도 아닌데 머리가 좋아지려고 사람 뇌를 먹는다는 말로 협박이 통하다니.
카이사르의 악명이 높은 걸 대단하게 여겨야 할지, 그런 멍청한 인간으로 여겨지는 사실을 비웃어야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라헬은 그냥 그에 대해서 평가하는 걸 포기했다.
하지만 고대악마로는 뭔가 성에 차지 않았다. 카이사르라면 불타는 생지옥에 들어가더라도 악마들을 움직이는 발판으로 삼아 밟고 다니며 지옥을 재패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대 악마라는 건 그냥 악마보다 강한 건가?”
“어... 예.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무기도 신식 무기보다는 고대무기가 더 강하니까요. 미궁의 침략이 이루어질 때마다 인류의 문명이 점점 퇴화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일리 있는 주장이네. 전설 무기보다 고대 전설 무기가 더 쌔고, 고대 전설 무기보다 원시 고대 전설 무기가 더 쌘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
게임사의 비열한 상술 때문에 생겨난 기이한 체계였지만 NPC인 그들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당신.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목숨을 바칠 자신이 있는가?”
“엑.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당신이 목숨을 바치면 카이사르를 죽일 수 있어.”
“!!”
“만약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카이사르는 이 나라를 초토화시키고 매일 밤마다 처녀를 유린하고, 매일 낮마다 청년들의 피를 물처럼 마셔대겠지.”
재상은 두 눈을 질끈 감더니 결의를 마쳤다.
“좋습니다. 제 한 목숨을 바쳐서 그런 비참한 지옥도가 펼쳐지는 걸 막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럼 카이사르에게 이 나라의 모든 초고수들이 그 대협곡 폭포 너머에 숨어있다고 말해라. 혹여나 길을 잃지 않도록 길안내도 수행하고 최대한 위험에 빠뜨리는 거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카이사르의 부관인 모자이크녀가 아니십니까? 그 악마의 부관이 이런 미녀인 것도 놀라운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라헬은 자그마한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쥐었다.
“놈은 내 인생을 파멸시켰어.”
“구체적으로는요?”
라헬은 재상을 빤히 노려보았다.
“너 내가 수작질 부리지 말랬지?”
“헉! 아, 아닙니다! 수작질 부리지 않았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 정보 빼돌려서 이용하려고 했잖아.”
재상은 고개를 바짝 조아렸다. 저항하지 않을 테니 목숨만 살려달라는 행동이다.
라헬은 재상을 끌고 카이사르에게 돌아갔다.
재상을 살려두는 건 꺼림칙하지만 이 이상 카이사르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꺼림칙했다.
“카이사르님. 이 자가 장소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좋다. 안내해라.”
대협곡으로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카이사르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빨리 가는 방법은 없는가?”
“말을 징발해오겠습니다.”
라헬은 인근 마시장에서 대량의 말을 끌고 왔다. 일인당 스무 필의 말을 이끌고 전력질주 하면서 말이 지칠 때마다 바꿔타기를 거듭하자, 대략 삼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협곡은 불길한 검은 안개에 뒤덮여 있으며 딱 봐도 발을 들여서 좋을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라헬은 이딴 곳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꺼림칙했다.
“저... 여기서부터는 제 능력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길안내는 이 재상에게 맡기고 저는 후방지원에 전념하겠습니다.”
“펫 주제에 감히 단독행동을 하겠다니, 그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 잔말 말고 따라와라.”
“하, 하지만. 지금쯤이면 보스께서 저희를 뒷받침할 군대를 보내고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수도에 남아서 카이사르님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려드리고 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카이사르는 검을 들어 벽을 향해 마구 휘갈겼다.
쩌저적!
왕궁 벽면에 검기로 글귀가 새겨졌다.
[대협곡 폭포 너머]
[원군요청]
장님이 아니고서야 이런 큼직한 글씨를 알아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라헬은 졸지에 카이사르를 사지에 빠뜨리려다가 함께 사지에 빠지게 생겼다.
줄곧 그가 얼마나 미친 강함을 지녔는지 두 눈으로 보아왔기에 감히 반항할 엄두 따위는 내지 못했다.
폭포수 너머에 있는 동굴로 진입하자 이걸 넘으면 인생 제대로 조질 거라는 예감이 팍팍 드는 검은 장막이 펼쳐졌다. 장막 너머는 심연을 연상토록 하는 깊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 * *
미궁세계를 제조한 게임사 본사 전략운영팀 사무실.
“이거다!!”
전략운영팀 팀장 황철호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통제 불능으로 치달아가던 정세에 마침내 빈틈이 나타났다.
“드디어 저 오만한 카이사르 녀석이 죽을 자리로 찾아가고 있다. 용사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솔직히 미의 용사 따위는 딱히 필요 없었고. 이참에 둘 다 정리하면 되겠어!”
황철호 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호연. 그 빌어먹을 게이머가 만든 최악의 NPC 카이사르가 죽는다면 흑산회 진영이 돌발적인 행동을 일으킬 가능성도 75% 이상 격감하지. 간신히 게임 내 정세가 안정되고.”
헌데 모니터링 화면에 이상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카이사르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를 쫓아 뒤따르던 군세들이었다.
“아니, 저것들은 왜 또 저기로 들어가!?”
증원군이 거침없이 북으로 진격하다가 돌연 방향을 틀어서 미궁 안으로 우르르 진격하기 시작했다.
* * *
간신히 통신범위에 들어갔는데 곧장 통신이 끊겼다.
[통신이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통신 사거리 밖이라는 말은 줄곧 보아왔지만 통신이 불가능한 지역이라는 건 처음 봤다. 빌헬름 마이어는 문득 이런 현상을 어디선가 겪어본 적이 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건 미궁에 들어갈 때나 발생하는 현상인데.”
대륙정복할 기세로 북진을 거듭하던 놈이 갑자기 미궁으로 진입할 이유가 없다.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게 틀림없었다.
“당장 1차 증원군을 인솔하는 멸혼객에게 지시를 내려라. 미궁으로 내려간 카이사르를 찾아서 구출하라고.”
그들은 수도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빠르게 해당 국가의 미궁도시로 진군로를 바꾸었다. 미궁에 내려간 카이사르만 구출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향한 거였다.
자연스레 수도에 남긴 카이사르의 글귀가 포착되는 일은 없었고, 멸혼객이 지휘하는 10만 군세는 대협곡이 아니라 엉뚱한 미궁도시의 미궁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운영진 복장 터져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