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7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22)
빌헬름 마이어가 느닷없이 말에서 낙마하며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지자, 2차 증원군은 패닉에 휩싸였다.
“보스의 저주가 심해졌어! 이대로는 원정은 무리야!”
“지금 물러났다간 전선의 1차 증원군과 선발대로 돌출된 루커스 군단이 적지에 고립되고 맙니다.”
“당장 군을 뒤로 물려! 대륙 통일 따위는 보스가 목숨까지 걸지 않아도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야. 흑산회 서열 4위, 리나의 이름으로 명하겠어. 전군을 물리도록 해!”
리나가 아무리 어리고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라고 해도 그녀의 실력과 그간 이뤄온 업적마저 귀엽지는 않았다. 그녀는 적대조직의 간부부터 왕국의 3왕자까지 암살한 유능한 암살자였다.
그런 그녀의 지시에 새삼 배짱을 부리며 지시를 따를 것을 거절하는 자들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이어 왕국의 근간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빌헬름 마이어에게 있다. 그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는 지금, 대륙정복에 나서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보스... 역시 무리했던 거지?”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빌헬름 마이어의 업무량은 가히 살인적인 수준이었다.
일반인의 3000배에 달하는 회계능력을 바탕으로 내정업무를 무서운 기세로 헤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빌헬름 마이어가 수명을 깎아가며 업무를 보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 몸으로 간신히 마이어 왕국의 기틀을 다지자마자 이번에는 팔기아 연합진영에 맞서 <대 이주>와 <파괴공작>이라는 두 가지 강수로 대륙 남부 전역을 수중에 넣었다.
단숨에 여세를 몰아 중부로 진출하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마냥 철인처럼 보이던 빌헬름 마이어도 한계를 맞이했다.
실상을 모르는 자들은 그렇게 여겼다. 기껏해야 걸린 적도 없는 저주가 도져서 몸을 상하게 했다고 여기는 게 그나마 상상력이 발전된 편이었다.
“이미 점령한 중부 일대 지역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장 대륙 중부 일대를 벗어나야 합니다!”
“1차 증원군에게 전령을 파견했지만 어째서인지 증원군이 모조리 증발했다고 합니다. 그쪽은 이미 때에 맞춰서 회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수도에서 대기 중이던 모자이크님이 카이사르님의 행선지를 전달하였습니다. 500년이나 인간의 발길을 불허해왔던 마경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연달아 날아드는 급보에 리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십만 대군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다는 거야? 게다가 살인광 그 녀석은 엄청난 기세로 북진만 거듭하더니 왜 갑자기 마경 같은 불순한 곳으로 들어간 건데?”
“그, 그건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모자이크님의 말로는 가짜 모자이크가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 수상쩍은 녀석이 사라졌다니 그거 하나는 차라리 다행이네.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게 더 꺼림칙했어. 아무튼 살인광이나 멸혼객이라면 알아서 제 한 몸은 건사하겠지.”
지금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리나는 빌헬름 마이어를 대신하여 결사적으로 20만 대군의 퇴각을 지휘하였다.
물론 그녀에게 지휘능력은 없다.
수많은 피해가 속출하였고, 막강한 버프효과가 일시적으로 중지됨에 따라 2차 증원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빌헬름 마이어가 앓던 저주가 도졌다!”
“그 사악한 흑산회 보스가 쓰러진 지금이야말로 적기다!”
“진격하라! 단숨에 마이어 왕국군을 섬멸하는 거다!”
최단거리로 진격만을 거듭해왔던 마이어 왕국군은 물 밀 듯이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의 군세를 돌파하고자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나마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40만 연합군에 맞서 돌파가 가능했던 것도 팔기아 제국의 형편없는 악명에 분개한 반란군들이 흑산회 진영에 가세한 덕분이었다.
악명으로 따지자면 흑산회만큼 높은 조직도 없을 터이나, 흑산회는 아군 진영을 배신하거나 이용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반란군들은 그렇게 믿었다.
“미궁이라는 잠재적인 위협에 진심으로 맞설만한 지배자는 빌헬름 마이어밖에 없다! 그가 죽으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다. 비열한 제국진영의 쓰레기들로부터 흑산회 보스를 지켜라!”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당신들은 부디 저희의 희생을 잊지 말고 종말의 때가 되거든 저희 왕국을 구원해주십시오!”
“갈리오 해협에 치유의 교단 본부로부터 직파된 아크비숍이 대기 중입니다. 어떻게든 그곳까지 가서 마이어 국왕폐하를 회복시키십시오!”
20만 대군이 10만으로 격감할 무렵, 본대는 간신히 갈리오 해협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안 됩니다! 저주가 조금도 밀려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저로서는 이 저주의 실체가 무엇인지 감지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는 국왕폐하의 목숨이 다할지도 모릅니다!”
아크비숍은 전심전력을 다한 저주치유의 주문이 먹히지 않자 패닉에 빠졌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빌헬름 마이어가 걸린 건 저주가 아니고 고혈압이었으니 아무 효과도 없고 감지도 안 되는 게 당연한 거였다.
“크으윽...”
그래도 치유의 주문의 효과는 미세하게 존재했다. 신성력이 체내에 깃드는 행위만으로도 뇌로 향하는 혈관을 압박하던 혈종이 녹아내리고 빌헬름 마이어의 의식이 회복되었다.
간신히 그가 눈을 뜰 무렵, 빗발치듯이 시스템 알림이 우르르 나타났다.
난데없이 그가 기절한 사이에 대군이 죽고, 사방에서 적이 출몰하며, 카이사르와 멸혼객에 10만 군세가 모조리 실종되었다는 충격적인 알림들이었다.
“모, 몬스터 웨이브.. 고대 악마.. 끄르륵..!”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마경의 고위악마는 한 기가 아니었고, 미궁의 몬스터 웨이브는 1차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의 실종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기어이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는 생각에 빌헬름 마이어는 또 다시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보스! 일어나, 보스!”
“으으...”
“안 돼. 보스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 역시 본국까지 돌아가서 집중치료실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마냥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리나는 보스가 힘겹게 말한 내용을 떠올렸다.
몬스터 웨이브와 고위 악마. 실로 심상치 않은 내용이었다.
“설마...!”
“보스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거리를 두고 있어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다른 간부들과 모두가 긴장어린 물음을 던졌다.
“고대 악마가 보스의 저주를 악화시켰어. 분명 인간계를 통일하여 미궁을 공략하려는 보스의 계획을 깨닫고, 미궁 깊은 곳에서 마왕군이 보스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자를 보낸 거야!”
“그럴 수가!”
“그뿐만이 아니야. 보스가 쓰러진 때를 틈타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할 거라고 했어. 어쩌면 루커스 군단과 멸혼객 군단은 중부지역의 몬스터 웨이브를 저지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부하들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럼 남부는. 남부지역 일대의 미궁은 지금 누가 막고 있지? 모험가 전력도 전쟁에 차출되었을 텐데.”
“맙소사. 아무도 없어.”
“당했다! 제국진영이 우리에게 총력전을 거는 사이, 대륙 각지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는 거다!”
아주 글러먹은 착각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몬스터 웨이브가 한 미궁에서 발생한 지금, 대륙 각지에 자리한 미궁에서는 동시다발적인 1차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고 있다.
모두 흑산회의 예상치 못한 쾌속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게임사의 눈물겨운 특단의 대책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흑산회 진영은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리며 휴전을 맺으려고 시도했지만, 이미 복수에 눈이 먼 팔기아 연합진영은 그들의 말을 속임수라 여겼다.
“빌헬름 마이어의 사악한 귀계는 어비스까지 닿았다는 말이 있지. 여기서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다음 기회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팔기아 연합진영의 의견은 이토록 확고했기에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줄곧 굴욕적인 패배만을 거듭 겪어왔던 하이그리드 재상의 최초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또한 후방에서는 팔기아 연합진영의 본대를 이끌고 프로스트 공작이 빠르게 진군을 거듭하였다.
교전을 벌이다가 본대에 따라잡히면 남는 건 전멸이다.
“분하다! 힘이 있어도 싸울 수가 없다니!”
흑산회 진영이 남부지대로 퇴각할 무렵,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병력은 고작해야 5만 명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눈물겨운 결사의 퇴각이었다.
팔기아 연합진영은 여세를 몰아 남부지대를 향한 침략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보스! 정신이 들어?”
빌헬름 마이어가 간신히 고혈압의 쇼크에서 벗어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 * *
뒷목 잡고 쓰러졌다가 일어나니까 병력이 15만 명이나 줄어들었다. 덤으로 내 국가의 절대자 두 명과 선봉군, 1차 증원군은 모조리 행방불명이 되었다.
말이 좋아서 행방불명이지, 사실상 전부 사망된 상태라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미궁세계에 진입한 이후로는 처음으로 겪는 패배였다.
그것도 참담할 정도로 막대한 대패였다.
“루커스뿐만 아니라 카이사르에 멸혼객까지 잃어버리다니.”
“보스의 잘못이 아니야.”
“놈은 그렇게 죽어도 될 녀석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유 없이 사람을 두들겨 패고 물건을 강탈하며 죽이기까지 하고, 이를 자랑거리로 삼는 놈이라도 일단은 내 부하... 부하가 맞기는 한데...
‘실은 그냥 죽어도 싼 놈인 거 아니야?’
아, 이거 글렀네. 워낙에 쓰레기 같은 놈이라서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보스의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곤란해. 팔기아 연합진영에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고 있어. 지금 보스가 나서지 않으면 모두가 죽고 말 거야.”
“그건... 곤란하지. 카이사르가 죽더라도 아직 흑산회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
“그 멍청이의 몫까지 복수하는 거야. 우리를 이끌어줘, 보스!”
그래. 아무리 쓰레기 같은 놈이라도 일단은 내 부하다.
부하의 죽음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녀석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 * *
빌헬름 마이어는 5만의 생존자들과 각지에서 가세한 의용군, 제국 측 반란군과 연계하여 철저한 게릴라전 끝에 두 달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두 달이 경과할 무렵, 각지의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지상을 향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본토가 위기에 처하자 팔기아 연합진영 또한 더 이상 타국을 향한 전쟁을 유지할 여유가 사라졌고, 자국의 구원을 위해 급히 북방으로 퇴각하였다.
흑산회 진영을 비롯한 남부 일대는 간신히 몬스터 웨이브를 진압할 수 있었다.
대륙 남부지대는 제국의 영향력이 약하고, 그만큼 오래도록 미궁공략이 이루어졌기에 몬스터웨이브의 규모 또한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나 미궁도시 브람의 경우에는 다른 미궁도시보다 공략이 활발했기에 상층부 몬스터들의 규모도 가장 적고, 이에 맞설 모험가들의 전투력도 가장 뛰어나 적은 피해로 수비에 성공했다.
팔기아 제국령 201년 7월.
흑산회 진영은 남부일대의 몬스터 웨이브를 모두 정리했다.
반면 팔기아 연합진영은 근본부터 산산조각 났다. 북부지대는 대규모 원정으로 인해 몬스터들의 대대적인 침략을 감당하지 못하고 단숨에 모든 국가들이 멸망에 이르렀다.
중부지대에서 그 소식을 접한 연합군은 북부의 탈환을 포기하고 중부 일대에서 토벌에 나섰고, 많은 피해를 입은 끝에 간신히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낼 수 있었다.
연합군은 제국이 배제된 중부 3국의 연합으로 중앙연합국의 설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흑산회 진영과 중앙연합국 진영, 몬스터 진영이 각각 대륙 남부와 중부, 북부를 거느리게 되었다.
혼란의 시기였고, 그만큼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자연스레 모든 이들은 생각했다.
카이사르와 멸혼객, 두 절대자를 비롯한 마이어 왕국의 주력군은 몬스터 웨이브에 휩쓸려 모두 죽고 말았다고.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시발. 저 새끼들은 왜 안 죽는 거야.”
게임사 직원들만이 미궁 속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미궁을 정복할 기세로 무자비하게 날뛰고 있었다.
“저쪽은 군단이니 차라리 납득이라도 하죠. 심연의 파편을 부수고 심층지대에 들어간 저 카이사르라는 녀석을 보세요.”
“미친. 저 새끼 저거 말려. 저놈 왜 저걸 때려잡고 있어? 왜 다크나이트가 무기 던지고 도망 다니고 있는 건데!? 빨리 어떻게든 좀 해봐!”
“이번에 몬스터웨이브를 인위적으로 유발시키고 제국을 움직인 탓에 미궁세계가 엉망진창이 될 뻔했어요! 마왕과 신들이 저희들이 심어둔 통제수단을 따르지 않아요!”
게임사는 게임 내에서의 영향력을 상당부분 상실했다. 더 이상의 개입은 그들의 손으로 미궁세계를 파괴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결국 카이사르와 멸혼객, 기타등등은 누구의 통제도 방해도 받지 않는 야생의 싸이코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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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기절한 결과!
카이사르와 멸혼객, 기타등등이 야생의 싸이코(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