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8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
#6 - 흑산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23)
대륙은 끝내 세 개의 진영으로 삼분되었다. 그러나 어느 진영이 주류의 자리를 차지했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주저 않고 흑산회를 손에 꼽는다.
중앙연합국이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세력 간의 무게추가 이동하는 팽팽한 형국이라면 흑산회 진영은 중심이 단단하게 잡혀있다.
카이사르가 남긴 백보무투술을 근간으로 양성된 모험가들이 적잖이 남아있으며, 그들의 무술을 다시금 전수받은 모험가들이 대거 늘어났기 때문이다.
백보무투술을 배운 모험가들은 대부분 흑산회 소속이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낸 이후에는 모두가 흑산회에 들어오기를 희망했다.
무술만을 탐내고 접근하는 이들도 적지 않게 있었으나 이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화였다.
흑산회는 거대해졌지만 그만큼 조직원들의 평균 충성도는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곁에 있을 땐 언제나 소란이나 피우는 녀석이라고 생각했건만, 막상 없으니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군.”
굳건한 충성심을 보이며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나를 지탱해주어 왔던 하수인이 사라졌다. 그 공백은 만남과 이별에 익숙한 나조차도 얼마간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보스. 그래도 귀여운 리나가 있잖아!”
“그렇지. 네가 아직 남아있지.”
“원한다면 특별히 리나의 턱을 간질여줘도 좋다고?”
그거 혹시 위로의 말이랍시고 한 거냐.
기특한 소리기는 한데 뭔가 기분이 심란해진다.
“죄송해요. 저희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카이사르님에게 중임을 맡기고 실종될 일은 없었을 텐데.”
“주인님을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제 수련이 부족했기에 마경에서 함께 싸우지 못하고 먼저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와 같은 후회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어요.”
도로시 이지스나 모자이크녀는 그의 실종 내지는 사망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슬픔이 가라앉은 이후로는 꽤나 진지하게 분노하며 수련의욕을 보이고 있다.
딱히 두 사람이 강해진다고 카이사르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알아서 강해지겠다고 노력하는 거에 초를 치고 싶지도 않았다.
뭣보다도 게이머인 모자이크녀가 이렇게까지 의욕을 불태우는 게 인상 깊게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다.
‘의외로 내게 안 보이는 곳에서는 꽤 친밀했었던 모양이군.’
하기야 3p까지 할 정도로 몸과 마음을 연 대상이었으니 각별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
“보스. 이제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어요.”
“뭐를 말이냐.”
“주인님의 죽음이요. 그러니 이제 그만 장례식을 열어요.”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부하의 장례식이라.
“그렇군. 무심코 잊을 뻔했어.”
장례식은 조촐하게 열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인덕이 그리 많은 녀석도 아니었으니 장례식을 열어봤자 불편한 관계의 녀석들이나 잔뜩 몰려올 거다.
연합기관이나 공무기관, 흑오문의 수뇌들, 영주들, 타국의 사절들을 맞이하며 정치적인 대담이나 나누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시체도 찾지 못한 장례식이니 성대하게 치러봤자 마음만 씁쓸해질 뿐이다.
“장례식은 어떻게 치를까요?”
“조촐하게 방 하나에 모여 나름의 방식으로 추모를 하지.”
“좋은 생각이네요, 보스. 그 의견을 따를게요.”
우선은 장례식에 참석하는 인원을 추릴 차례다.
녀석과 친밀한 인간만을 추려보았다.
일단 나, 리나, 모자이크녀가 친밀한 편이다.
다음으로는 마크, 사이토, 데이고르가 놈을 곧잘 따랐다.
그 외에는 마초카페 사장 설화나 도로시 이지스 정도이려나.
다 합쳐봤자 고작 8명밖에 안 되는 인원이었다.
나는 장례식에 참석할 인원을 모은 뒤에 말했다.
“각자 카이사르의 장례를 치를 때, 그를 위해서 하고 싶은 걸 말해라. 모두가 바쁜 몸이니 일괄적으로 처리하도록 하지.”
설화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카이사르 씨가 좋아하는 음식은 뭐였나요? 제사상을 차릴 겸 좋아하는 음식으로 올리려고 하는데...”
“모른다.”
“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부하가 뭘 먹고 다니는지 아무 관심도 없어서 모른다고 말한 게 아니다. 나는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아니다.”
“죄, 죄송해요.”
“그놈은 뭘 먹어도 언제나 표정에 변화가 없었지.”
설화는 고민에 빠졌다.
“그럼 자주 먹는 음식은 뭐였나요?”
“건빵.”
“그냥 알아서 차릴게요.”
잘 생각했어. 만한정식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제사상에 건빵을 올리는 건 좀 깨잖아.
“저도 주인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 궁금하지?”
“주인님은 언제나 보스의 얘기를 하셨죠. 분명 보스와 관련된 추억의 물건을 제사상에 올리면 기뻐할 거예요. 그래서 그런데.. 두 분과 관련된 추억의 물건은 뭐가 있나요?”
모자이크녀의 물음에 모두가 관심을 보였다.
카이사르는 내 첫 번째 부하다.
당연히 남들은 모르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할 거다.
실제로도 뭔가가 있기는 있었을 거다.
문제는 그게 뭔지 나도 모른다.
시스템이 자동연산으로 관계설정을 했는걸.
직접 플레이한 것도 아닌데 낸들 그걸 어떻게 알겠어?
“음. 그나마 추억의 물건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생각해보니 아주 없는 건 아니네.
놈과 만난 이후로 줄곧 가지고 다니던 물건이 있다.
상의에 훈장처럼 달아둔 추억의 물건을 꺼냈다.
“그건 뭔가요? 호패처럼 생겼는데.”
“범죄길드 은배지다.”
“두 분은 범죄길드 출신이었던 건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이 도시에 와서 제일 처음 들른 길드가 거기였었다.
돌이켜보면 참 골 때리는 노릇이었지.
“범죄길드에는 몇 시간도 있지 않았다. 그저 나와 카이사르가 리나와 만나게 된 계기였었지.”
“와아. 그럼 은배지는 그 때를 기념하는 증표인가요?”
“어떤 의미로는 그렇기도 하지. 카이사르가 고물상 주인을 죽이고 번 돈으로 구매한 배지였으니까. 고물상 주인은 카이사르가 미궁도시 브람에서 처음으로 죽인 인간이었지.”
“…….”
“딱히 내가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기억은 없다. 그런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라.”
어째 이놈들에게서 내가 카이사르를 보는 기분이 엿보인다.
기분 탓이겠지.
“큰형님이 좋아하는 무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큰형님은 가토의 의지를 이어받기 위해 권각술을 익혔다고 하셨기에 그 이전에는 어떤 무술의 어떤 무기를 즐겨 사용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놈은 검술에 일가견이 있었지. 맨주먹이 하도 쌔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만 실은 언제나 검을 차고 다녔다.”
“엑. 그거 정말입니까? 검을 차고 다녔다는 사실도 방금 처음 알았습니다.”
마크 녀석만 놀란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죄다 놀랐다.
하기야 카이사르의 가토 타령이 하루 이틀이어야지.
가토만 찾고 다니면서 권각술만 펼쳐대니 검이 티가 나겠어?
“보스! 리나도 궁금한 거 있어.”
“말해라.”
“카이사르가 보스를 따르게 된 계기는 뭐야?”
몰라.
기억에도 없는 걸 어떻게 알아.
“잘 모르겠군.”
“그치만 이상하단 말야. 카이사르의 성격에 간단히 남을 따를 리가 없다고.”
“남들에게서는 보지 못한 무언가를 내게서는 보았나보지.”
그러자 모두가 왠지 그거 알 것 같다는 표정이 되었다.
“의미는 알겠지만 그건 공물로 올릴 수가 없겠네. 리나는 아끼던 단검이나 하나 올려야겠어.”
카이사르의 빈자리를 실감하면서도 우리는 조용히 추모를 위한 준비에 나섰다. 가끔은 이런 씁쓸하면서도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사르 녀석도 분명 저승에서 우리를 보고는 기뻐하겠지. 격을 이룬 캐릭터들은 사후에 [저승세계]에서 짧은 플레이를 하는 것도 가능하고 말이다.
[천국]에 걸린다면 다행이지만 그놈이 쌓아온 업을 생각하면 100% [어비스]행이라고 장담한다. 그래도 녀석이라면 분명 어떻게든 살아가리라.
“주인님이 지옥에 가면 뭘 하고 있을까요?”
랭커 출신인 모자이크녀도 그런 메카니즘을 이해하고 있는지 선뜻 지옥을 입에 담았다.
“악마라도 만나고 있겠지.”
“그리고는요?”
“보이는 족족 전부 패죽이고 있겠지.”
“…….”
“놈은 그런 녀석이다. 어쩌면 우리가 미궁을 탐사하다가 지옥에 도달할 때까지 살아남을지도 모르겠군. 악마의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올리면서.”
“어째서일까요?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지는 건. 좀 소름 돋네요.”
나도 그래.
카이사르라면 정말로 저지를 수 있을 것 같다.
* * *
미궁 심층지대 어비스(Abyss) 계층.
여기에 지옥이 있다.
지옥의 메커니즘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죽은 자들의 혼을 끌어들여 억겁토록 고통 받게 만든 뒤, 그로부터 발생하는 부정한 에너지를 모아 지옥의 가혹한 환경을 유지하고 지옥의 지배자 [염라대왕]의 힘을 강하게 키운다.
강한 자들이 끌려 들어와서 더욱 고통 받을수록 지옥은 더욱 각박해지고, 지옥의 지배자인 염라대왕은 한층 더 강력해지는 구조였다.
끌려 들어오는 영혼들은 하나같이 미궁에서 쟁쟁한 전투력을 과시하던 자들이었고, 그런 자들이 절망에 빠져 생성되는 부정한 에너지는 실로 막대하였다.
“보스께서는 이러한 곳을 정복하고자 하셨던 것인가?”
카이사르는 빠르게 지쳐갔다. 제 아무리 절정지경에 오른 절대고수라고 할지라도 어비스의 악마들을 상대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몸을 부수기 전에 마음을 꺾는 환상과 암시를 거듭 부여하였다. 카이사르는 슬슬 깨달아가고 있었다.
‘고대악마를 잡을 때에는 어쩌면 보스의 사소한 부탁이 이보다 더 심각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스스로 사지에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보스를 모시는 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해지고 만다.
그런 미혹에 사로잡혀 서서히 검이 무뎌지고 절망이 가슴 속에 똬리를 트려던 순간이었다.
[카이사르가 보스의 신용을 받았습니다. 신용의 내용은 ‘보스와 지옥에서 재회하기 전까지 악마는 보이는 족족 전부 패 죽인다.’입니다.]
[카이사르가 전투의지를 상실하지 않는 한, 악마족을 상대로 전투력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카이사르가 보스의 신용을 어기지 않는 한, 극악한 난이도의 신용을 보인 것에 대한 보상으로 보스의 신용 스킬의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빌헬름 마이어가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내뱉은 말이 카이사르에게 미지의 힘을 선사하였다. 카이사르는 두 눈을 부릅뜨며 제 안에서 충만하게 일어나는 기운을 감지하였다.
익숙했다.
보스와 함께 할 때에나 종종 느꼈던 미지의 버프의 힘이었다. 카이사르는 살벌한 흉소를 지어보였다.
“보스께서 나를 믿고 계신다는 기분이 든다. 이건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거겠지.”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악마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보스로군. 지옥의 악마들을 몰살시키는 게 사소한 부탁이라니. 이 부탁을 들어준 뒤의 ‘사소한 보상’을 무엇으로 지불해주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악마들이 등을 돌리며 달아나자, 카이사르가 먹잇감을 덮치는 포식자처럼 뛰어들었다.
“그러니 전부 죽어라. 보스께서 네놈들의 죽음을 원하신다. 죽을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크하하하하!!”
어비스의 먹이 피라미드에 최상위 포식자가 등장하였다.
* * *
게임사 전략운영팀 직원들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저거 어떻게 막아요?”
“못 막아.”
“그럼 어떻게 해요?”
“어떻게도 못해.”
“쟤가 빌헬름 마이어랑 다시 만나면 어떡해요?”
부하들의 물음에 팀장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뭘 어째. 회사 짤리겠지.”
카이사르의 포악질은 게임 안팎을 넘나들며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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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어비스에서 광렙 중인 카이사르.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