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9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9)
항아리는 밑도 끝도 없이 통로를 틀어막았다.
이건 넓은 곳에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잠시 저 앞에 물러가있어라.”
나는 모험가들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놈들의 불안해하는 시선을 받으며 파티원들에게만 조용히 말했다.
“함께 미궁에 진입한 이상, 중대한 선택에는 파티원들의 선택을 일정부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묻도록 하겠다. 저들을 제물로 바칠지, 좀 더 지켜볼지 말이다.”
파티원들은 조용히 손바닥과 손등으로 투표를 진행하였다.
조사결과 5 대 8로 제물로 바치기가 결정됐다.
그런 결과를 말하려던 나는 엄청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5 대 8이라니. 내 파티는 날 포함해서 여덟 명일 텐데?’
낯선 손은 전부 청일의 뒤에 달려있었다.
정확히는 보자기 아래에서 나왔다.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모두가 소리없이 경악했다.
“저, 저거 어쩌죠?”
“들켰을까?”
“아직 들키지는 않았어요.”
통로가 좁으니 우리들의 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나보다.
“저 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죠?”
“보자기 안이잖아.”
“그러니까 그 안에는 그거밖에 없잖아요!”
항아리의 어디에서 손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멘붕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기괴한 일은 정말로 흔치 않은 일이다.
이런 건 모험가 경력이나 경험과도 무관하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꺼림칙한 현상이다.
그래도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대응책을 추려낼 수는 있었다.
“잘라버려.”
“예!?”
“그거 잘라도 되는 겁니까!?”
모자이크녀와 청일이 기겁하며 놀랐다.
“녀석이 발버둥치기라도 하면 저는 죽는 거 아닙니까?”
“고통 없이 단숨에 자르면 된다.”
“고통 없이 라니.. 대체 어떤 구조로 손이 자라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잘리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유모가 넌지시 손을 들었다.
“얼려버리죠.”
“얼려!?”
“본체까지 모조리 얼어붙으면 꿈쩍도 하지 못할 겁니다.”
청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가 흠칫했다.
“그럼 저는 그걸 어떻게 들춰 맵니까?”
“음?”
“그게 얼 정도면 엄청나게 차갑지 않습니까.”
리나가 짜증스레 말했다.
“그냥 뒤집어서 탈탈 털면 안 돼? 다 뱉게 하면 되잖아.”
“미궁 한 복판에 구멍을 뚫으라는 거냐?”
“애초에 저런 걸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부터가 무리였어. 경사로가 나오면 그때는 또 어떡할 건데?”
리나의 합리적인 지적에 청일이 크게 놀랐다.
“경사면이 나오면 정말 곤란합니다. 이것 때문에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군.
일단 한 번 털어야겠다.
덤으로 상태도 확인하고 손도 어떻게 해결해야지.
“도로시. 쿠로. 너희 둘이 천을 들고 시야를 가리고 있어라.”
“낭군님의 명을 따르겠어요.”
“분부대로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두껍고 기다란 천을 들고 시야를 차단하는 사이, 청일은 항아리를 내려놓고 보자기를 거두었다.
“으아악!”
항아리는 단지 안에서 다섯 개의 기다란 팔을 뻗고 있었다.
안쪽은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심지어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끔찍한 알림도 떴다.
[7대 금기 중 하나인 <리기아의 항아리>가 허기짐에 지쳐 탐식의 손을 뻗어냅니다.]
[굶주린 항아리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청일은 일단 내용물부터 뒤집어서 쏟아내려는데 항아리에 달린 손들이 마구 손을 뻗으며 방해했다.
“히이익! 우, 움직여요!”
“무, 무리. 리나도 저런 거에 접근하고 싶지 않아.”
모자이크녀와 리나는 빠르게도 사색이 되었다.
레이브는 당연히 정신없이 고개만 저었다.
저걸 처리할 사람은 유모와 청일밖에 없었다.
“청일 도련님의 쾌검이라면 잠시나마 고통조차 느낄 수 없는 속도로 저걸 벨 수 있습니까?”
“그런 걸 할 수 있으면 진즉에 절대고수가 됐을 겁니다.”
“쯧. 무능한 샌님 같으니.”
“뭐야!?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유모가 하면 되잖아!”
“제가 저걸 제압하고 내용물을 쏟고 얼리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도련님은 괜찮겠습니까?”
유모는 청일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맹점을 지적했다.
그건 정말로 치명적인 맹점이었다.
“보스가 청일 도련님을 쓸모없다고 생각해도 괜찮은 겁니까?”
“!!”
“적어도 손 정도는 어떻게 하지 않으면 파티 내에서 도련님의 입지가 나빠질 겁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 유모는 상상조차 할 수 없군요.”
청일이 나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쓸모없다고 여기고 뭔가를 저지를 거냐는 시선이었다.
딱히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청일은 고개를 숙이며 몹시 낙담해하였다.
아니, 어째서!? 별 생각 없다고 부정했잖아!
“…….”
전부터 생각했지만 내 몸짓을 제대로 이해하는 놈은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카이사르뿐만 아니라 모두가 내 몸짓은 될 수 있는 한 부정적이고 끔찍한 방향으로만 해석하는 모양이다.
“그럼... 제가 한 번 베어보겠습니다.”
청일은 쾌검식을 펼치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유모가 넌지시 조언했다.
“절대로 빗나가거나 끝까지 베지 못하면 안 됩니다. 저게 발광하기 시작하면 내용물을 밖으로 흩뿌릴지도 모릅니다.”
“허억...!”
“심지어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마구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손을 베인 원한이 있으니 언젠가 당신이 잠든 틈을 노려 기습을 가해 즉사할지도 모릅니다.”
유모는 청일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니 부담갖지 말고 전력을 다해서 베면 됩니다.”
방금 걸로 없던 부담도 생겼다는 데 내 전 재산을 걸겠다.
청일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심호흡으로 진정시켰다. 간신히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그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번뇌를 부르는 모든 상념을 하나씩 베어내며 일념만을 남기고 있다. 일격필살의 검로를 펼쳐내고자 몸과 마음에 깃든 군더더기를 모조리 배제하는 집중과정이었다.
‘폼으로 절정고수의 반열에 든 건 아니군.’
마음먹기에 따라서 두려움마저 베어내고 신속하게 임전태세를 취할 수 있다는 건, 쾌검수에게 있어서 대단한 강점이다.
명정 스킬이 조금만 더 오르면 검을 쥐자마자 임전태세에 들어가며 신속한 공격과 반격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칼날을 벼리듯 전의를 날카롭게 벼려낸 청일이 검격을 펼쳐내려는 순간이었다.
휙─ 퍽!
다섯 개의 손이 바닥을 훑어 모래를 뿌렸다.
모래뿌리기의 위력은 굉장했다.
청일의 공격은(는) 허망하게 빗나갔다!
“으아악! 내 눈, 내 눈...!”
“이래서 샌님들이란... 그만 포기하시겠습니까?”
“안 돼!!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일격필살 따윈 필요 없어! 그걸 퍼다 나르기 전에 모조리 베기만 하면 그만이다!”
청일은 주저하지 않고 검격을 펼쳤다.
덥썩!
청일의 검은 두 개의 손에 의해 붙잡혔다.
“뭐, 뭐라고!? 내 쾌검을 붙잡다니, 그런 게..”
덥썩.
경악하는 청일의 발목을 또 다른 손이 붙잡았다.
퍽. 퍽. 퍽.
청일은 미처 반항할 새도 없이 연달아 지면에 내리꽂혔다.
간신히 손으로부터 풀려낸 청일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만 포기하는 게 어떠신지?”
유모의 물음에 청일은 개 빡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딴 것보다 내가 못하다니, 인정할 수 없다. 방금 건 조금 방심했을 뿐이다. 전력을 다해서 베어버리겠다!!”
청일은 여분의 검을 뽑아들었다.
이번에는 검이 붙잡힐 걸 염려해서 아예 쌍검을 들었다.
쌍검은 한손 검보다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한다.
‘저 녀석, 의외로 검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던 건가.’
청일은 매섭게 쌍수로 검격을 펼쳤다.
마치 풍차처럼 회전하는 매서운 검격이 잡을 테면 잡아보라며 회전력에 절삭력을 더해 휘둘러졌다. 저 검격이 나를 향해서 펼쳐진다면 단숨에 몸이 수어 토막으로 절단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 정도로 위력적인 공격이 항아리에서 나온 다섯 손을 향해 날아들었다.
덥썩.
그리고 잡혔다.
“말도 안 돼!”
청일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네 개의 손이 각각 두 개가 한 자루의 검을 붙잡았다.
마지막 남은 손이 위협적으로 손가락 마디를 좁혔다.
“하, 한 번만 봐주면 안 되겠는가?”
마지막 손은 청일의 머리를 붙잡아 쿨하게 집어던졌다.
청일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돌가루를 후두둑 떨어뜨리더니 이내 바닥으로 자빠졌다.
‘미친.’
저거 뒤진 건가.
시스템 알림이 안 뜬 거 보면 일단은 살아있는 모양이다.
백보심공의 공력으로 충격을 완화했나보다.
손들은 의기양양하게 흔들거리며 검지로 천 너머를 가리켰다.
순순히 모험가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 같다.
유모는 저벅저벅 걸어가서 손들을 붙잡아 하나씩 꺾었다.
“!?”
손들은 미처 반항하지도 못하고 괴롭게 펄떡거렸다.
유모는 펄떡거리는 손들을 한 손으로 모아서 꽉 움켜쥐었다.
손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귀찮게 굴기는.”
유모는 항아리를 뒤집어 내용물을 쏟았다.
녹아내리는 소리와 함께 땅이 수직으로 뚫렸다.
그리고는 항아리를 마저 얼린 뒤, 얼어붙은 손을 쑥 뽑았다.
무슨 산에서 산삼을 뽑는 것처럼 시원스러운 동작이었다.
유모는 손 뭉치를 들어보이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기겁하며 바닥을 가리켰다.
“버려.”
유모는 구멍에 손 뭉치를 집어던졌다.
그러자 항아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얼음이 녹았다.
유모는 항아리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보스. 이건 생물체입니까?”
“그렇다.”
“때리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습니까?”
미궁 7대 금기를 때려서 말을 듣게 하겠다니.
이만한 미친 소리도 없다.
나는 기가 막혀서 할 테면 해보라고 방관했다.
콰앙 콰앙
유모가 항아리를 두들겨 패자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인간의 파괴력이 아니었다.
“빼애액!”
항아리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기괴한 소리를 냈다.
유모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았다.
“작아져라. 모험가들이 지나가지 못해서 보스가 불편해한다.”
“빼애액...”
항아리는 복종하는 동물 같은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급격히 크기가 줄어들었다.
[7대 금기 중 하나인 <리기아의 항아리>가 유모의 폭력에 의해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리기아의 항아리>가 일시적으로 유모에게 굴복합니다.]
유모는 항아리에 보자기를 뒤집어 씌웠다.
정말로 7대 금기를 두들겨 패고 복종시킨 것이다.
의문의 괴력을 선보인 유모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역시 보스가 내린 야외훈련을 마치니 강해졌다는 실감이 듭니다. 저런 끔찍한 존재를 제 손으로 제압하고 얼렸다는 사실에 만족감이 느껴집니다.”
“...그거 잘됐군.”
“도로시 아가씨도 언젠가 저처럼 야외훈련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대륙을 종단하는 일은 제가 했으니 아가씨는 대륙을 횡단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미친 여정을 떠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너랑 카이사르밖에 없다.
세상에 어떤 미친년이 야외수련을 나섰다가 드래곤하트를 먹고, 겸사겸사 습득한 빙결마법을 펼쳐서 미궁 7대 금기를 산 채로 얼리고 제압한단 말인가.
저기 바닥에 피 흘리며 엎어져있는 청일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되었다. 너희는 이제 지나가라.”
“아, 알겠습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함구하도록.”
모험가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허겁지겁 달아났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리나가 홀린 듯이 말했다.
“유모. 너무 쩌는 것 같아요.”
어찌나 놀랐는지 나한테도 안 쓰던 존댓말을 쓴다.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절정고수의 쾌검술을 맞고도 멀쩡했던 7대 금기 <리기아의 항아리>가 주먹질 몇 번 맞고 비명을 지르며 고분고분한 애완동물처럼 말을 들었잖아.
유모의 통상공격 주먹질은 청일의 전력을 다한 필살검격보다도 강하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우리 중에서 유모 보다 쌘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보다 이젠 항아리보다 쟤가 더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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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테이밍(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