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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하들이 미친듯이 유능하다-162화 (162/224)

00162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12)

두 엘프남의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는 몬스터를 사냥해야 한다. 문제는 몬스터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씬거리지도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으음. B6층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B6층은 언데드들의 출몰지대.

원치 않아도 질릴 정도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생각에는 레이브가 반대했다.

“언데드가 제공하는 경험치는 그리 많지 않아요. 두 분의 레벨도 낮지는 않다고 하시니 단순사냥으로 레벨을 올리려면 한 달도 넘게 걸릴 거예요.”

시간은 내 편이 아니다.

그렇게나 긴 시간을 들일 수는 없다.

이러는 와중에도 지상 어딘가에서는 선신들의 앞잡이인 용사가 파티원을 모으고 강해지고 있을 거다.

“밑으로 내려간다.”

“어디까지요?”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을 몬스터가 나타날 때까지.”

레이브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저희 지금 심층지대 공략하러 가는 건가요?”

“...플로어보스 잡으러 가고 있다.”

“아.”

이놈이 줄초상을 치르려고 작정했나.

아무리 나라도 지금의 파티로 심층지대를 공략한다는 미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위에서 준비할 수 있는 건 전부 준비하고 만전을 기한 끝에야 이루어지는 단 한 번의 도전. 그것이야말로 심층지대 공략이라고 불리는 녀석이다.

‘뭣보다 미궁세계의 미궁은 전작의 미궁보다 난이도가 엄청나게 올랐단 말이지.’

그 사실을 가장 실감할 수 있었던 게 B10층의 마지막 관문을 지키는 계층보스의 강력함이었다.

녀석은 게이머들의 공략에 맞서 무려 1년이라는 긴 시간을 단신으로 버텨내었다. 놈의 손에 죽은 게이머들의 수를 합치면 천명도 가뿐히 넘어갈 거다.

상층부의 악몽이 그러했으니 중층부의 악몽은 얼마나 더 강력할지 모른다.

‘그런 녀석쯤은 되어야 달아나지 않겠지.’

슬슬 나도 깨닫고 있다. 플로어보스나 계층보스가 아니면 우리 파티의 존재감을 견디지 못해서 죄다 달아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아가 없는 무생물 몬스터나 생존본능이 없는 언데드 몬스터 따위가 아니면 우리에게 맞설 몬스터는 없다. 그마저도 경험치가 안 되는 녀석들뿐이다.

그러니 결국 막강한 계층보스에 준하는 강함을 지닌 플로어보스를 상대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근데 정말로 플로어보스를 잡을 수 있어요?”

“물론이다. 이 전력이면 차고도 넘친다.”

“그게 아니라요. 플로어보스는 플로어 내에서 다수의 몬스터를 제거해야만 나타나잖아요. 플로어 내 몬스터가 죄다 도망 다니는데 플로어보스는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나요?”

어... 그건 말이지.

“쫓아가면 된다.”

“쫓아가야 되는 겁니까!?”

“그럼 도망치는 놈들을 어떻게 잡을 거냐.”

애초에 몬스터가 도망치는 거 자체가 이상한 거라고.

몬스터(Monster)는 짐승(Beast)와는 다르다.

먹기 위해 사냥하는 게 아니라 마기에 찌들어서 죽이기 위해, 쾌락을 얻고자 사냥하는 놈들이다.

진화의 과정 또한 보다 효율적으로, 보다 치밀하게, 보다 끔찍하게 상대를 죽이기 위한 방식으로 치중된다.

그런 잔혹한 존재가 몬스터다.

보통은 몬스터가 도망치는 게 아니라 몬스터와 마주한 존재들이 도망치는 게 정상이란 말이지.

“그런 건 교본에는 나오지 않았는데...!”

레이브는 머리를 쥐어 싸매며 절규했다.

“이렇게 빨리 교본에 없는 내용과 마주하게 될 거라면 지난 2년간 교본만 붙잡고 공부한 전 뭐가 되는 거죠!?”

아. 이건 울겠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좀 불쌍하기는 하네.

사내놈은 강하게 키우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히 달래줘야겠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세상에는 무수한 길이 뻗어있고, 모험가들은 각자 자신만의 길을 걸어 나간다. 너는 도적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고된 만능의 길을 걷는 중이다.”

“...그래서요? 몬스터가 도망치는 이유 하나 알지 못하는 게 뭐가 만능인 건데요!”

“만능이라고는 하나 네가 갈 수 있는 길은 도적의 영역에 한정된다. 그 너머의 걸어보지 못한 길은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게 부럽거나 후회도 되겠지.”

나는 넌지시 물었다.

“지금까지 걸은 길에서 내려가 다른 길로 걷는 것도 가능하다. 그때는 몬스터가 도망치는 이유는 알 수 있겠지. 지금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고 싶은가?”

“그야 당연히!”

“대신 지금까지의 공부는 모두 헛된 것으로 돌아간다. 다른 길을 택한 이상, 너는 다시는 만능의 길로 돌아올 수 없다. 이 길은 단 한 번만 열려있으며 한 명에게만 선택된 길이다.”

나는 다시금 물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행을 무위로 돌린 채 얻어야 할 만큼, 몬스터가 도망치는 이유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정녕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어리석은 녀석. 네가 할 수 있는 수많은 일은 생각하지 않고 남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에만 집착하는군. 남들은 너만이 가능한 수많은 것들을 보며 부러워하고 있음을 어찌 모르는가.”

나는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리나를 봐라. 그녀는 최고의 암살자이지만 길찾기를 못한다. 청일을 봐라. 저놈은 절정검객이지만 길찾기를 못한다. 나를 보아라. 일국을 집어삼킨 흑산회 보스이지만 길찾기를 못한다.”

“보스. 저는 길찾기를 할 수 있..”

“닥쳐.”

“…….”

“보다시피 이렇게 모두가 길찾기를 할 줄 모르지만 만능도적인 너는 길찾기를 할 수 있지 않느냐.”

애써 훈훈하게 말해봤지만 이미 레이브의 두 눈에는 의혹이 가득 차 있었다.

“쿠로 아저씨는 길찾기 할 수 있댔잖아요!”

“그럼 시험해주지.”

“네?”

“저 새끼는 여기다 버리고 삼일 뒤에 알아서 쫓아오게 만든다. 쫓아올 수 있으면 길찾기를 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주지. 대신 삼일 안에 합류하지 못하면 이쪽에서 회수한다.”

“음...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요.”

쿠로는 괜히 한 마디 던졌다가 미궁에서 목숨 걸고 파티를 추적하게 생겼다는 사실에 절망하였다.

“그치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만능도적이라면서 제가 필요한 건 길 찾기뿐이잖아요! 보스도 실은 편리하게 미궁을 탐사하기 위해서 길 찾는 길셔틀이 필요할 뿐이잖아요!”

응. 그러려고 키웠는데 그러면 안 되냐?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러면 곤란하지.

정말로 삐지기라도 했다간 파티 내에서 유일하게 길 찾기가 가능한 패스파인더가 사라진다.

“네 가치가 정말로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네가 가르쳤던 수많은 지식은 정말로 길 찾기 하나만을 위해 존재했고, 네가 배운 건 길 찾기 하나뿐이었는가?”

“그건... 아니지만요.”

“비극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잊고 할 수 없는 일에 집착할 때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네게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있을 거다. 욕망에 잡아먹히지 마라.”

“욕망이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 편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 더 이상은 내 길을 걸으면서 괴로워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

훈훈한 느낌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내 말에 가장 소름이 끼치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한 번 정해진 길은 반드시 따라야한다니, 이건 숙명주의자도 아니고 뭔가.

귀족은 귀족으로, 노예는 노예로 살라는 말과 다를 바 없는 무자비한 발언이다.

그저 대화의 맥락과 분위기가 다르고 연기스킬과 교육스킬의 숙련도 등급이 높기에 간신히 효과가 먹혔을 뿐이다. 레이브는 겨우 납득한 기색이었지만 나 자신은 꽤나 찝찝해졌다.

“보스의 말이 옳았어요. 앞으로는 한눈팔지 않고 만능도적의 길만 걸을게요. 미천한 소매치기에 불과했던 저를 이렇게나마 다른 삶을 살게 해주신 것도 보스니까요.”

“녀석.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제법 기특한 소릴 하는군.”

레이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어째서인지 리나가 흥흥 거리며 으스대었다.

“저걸 봐. 보스는 턱을 쓰다듬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었잖아? 저건 보스의 진정한 포상이라고 할 수 없어. 역시 보스에게 가장 사랑받는 부하는 귀여운 리나야!”

“…….”

왜곡된 포상이 다시금 나를 심란하게 만드는군.

애써 못 들은 체 하고 넘겨야겠다.

하지만 이어지는 레이브의 물음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보스. 그래서 결국 몬스터는 어떻게 쫓나요?”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일단 이동한다.”

“이동은 어떻게 해요?”

걸어서 가지, 뭘 어떻게 해.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중요한 의문이었다.

지금 파티의 상황을 다시금 점검해보자.

파티원은 일곱 명이고 엘프남 두 명은 전력외다.

덤으로 전신이 결박된 여도적이 여섯 명 있다.

“보스. 저것들은 어떻게 해?”

“들어.”

“응?”

“저놈들 들고 가라고.”

“…….”

유모와 도로시, 쿠로는 도적을 드는 데 성공했다.

반면 엘프 남 둘은 도적을 드는 데 실패했다.

“한심한 녀석들! 여도적 한 명도 들 체력이 없는 거야?”

“약해빠졌네요, 정말.”

“너희들은 아예 들려는 시도도 안했잖아!”

리나와 레이브, 두 엘프남이 빽빽거리는 꼴을 보자니 절로 심란해졌다.

“보스. 귀여운 리나나 길잡이 레이브, 약골 둘이 저걸 들 수는 없잖아. 남은 세 명은 들춰 맬 수도 없고 곤란하다. 그치?”

“그렇군.”

“그렇다고 남겨두고 가면 가엾으니까 뭔가 수를 써야지? 응?”

“그렇.. 잠깐. 수를 쓴다니 무슨 수를?”

“죽이자!”

결국 유모와 도로시, 쿠로가 한 손에 한 명씩 도적들을 들고 가게 되었다. 어차피 몬스터들은 접근하지도 않으니 전투인력들의 손이 묶였다고 문제가 발생할 여지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 파티는 굉장히 기괴한 모양새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양손에 한 명씩 전신이 결박된 여도적을 들고 걷는 파티원들과 거대한 보따리를 짊어진 파티원, 그 외 기타등등이다.

‘이런 모습을 남한테 들켰다간 엄청난 오해를 받겠군…….’

재갈이 물린 여도적들은 끊임없이 악을 쓰거나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영락없이 노예상인처럼 보이는 몰골이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오오! 당신들 굉장하잖아. 미인을 여섯이나 포획하고!”

“굉장히 강해보이는 신입들이군. 지상에서 왔나?”

“웰컴! 모험가 킬러촌에 온 걸 환영해!”

모험가킬러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환영받았다.

“...레이브. 왜 이런 곳으로 우릴 인솔한거지?”

“여기로 가는 게 제일 빨라요.”

“뭐?”

“교본에서 미궁탐사는 언제나 최단경로로 가랬어요!”

“넌 바보냐! 살인마가 우글거리는 길로 파티를 인도하면 어쩌자는 거냐! 교본에는 적어두는 걸 깜빡했지만 살인마가 우글거리는 소굴을 경로로 삼지는 말라고!”

엄하게 꾸짖어주자 레이브가 머리를 쥐어 싸맸다.

“아아악! 교본에서는 최단경로로 가라고 했는데! 하지만 살인마가 우글거리는 길은 안 되는데! 그러면 최단경로에 살인마가 우글거리고 있으면 어떡해야 하지!?”

책으로 미궁탐사를 배운 도적이 논리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흔한 조기교육의 폐해였다.

“보스! 레이브가 미쳐가고 있어!”

“괜찮다. 녀석이라면 문제없다.”

놈은 2년 만에 도적에 대한 모든 걸 학습하는 데 성공한 뛰어난 영재. 뛰어난 학습능력을 지닌 녀석이라면 분명 논리충돌에서 벗어날 해답을 찾아낼 수 있겠지.

“그래! 그 방법이 있었어! 이제야 보스의 뜻을 알았어요!”

“역시 방법을 찾았는가.”

“저걸 전부 죽이면 살인마가 우글거리는 길은 없는 거죠?”

“...하?”

“길이 막히면 칼과 우산을 휘둘러 뚫는 게 흑산회의 방식이니까요!”

그런 방식 모른다.

흑화하지 마라, 빌어먹을 자식아.

============================ 작품 후기 ============================

돌발성 슬럼프의 출현에 의해 이 화를 쓰는데 3일이 걸렸습니다.

비축분이 15일 치가 남아있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 했군요.

역시 비축분은 작가에게 있어서 여분의 목숨줄이 아닌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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