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3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13)
모험가킬러들을 앞두고 리나의 텐션이 마구 상승했다.
“아하핳. 보스도 참. 리나가 심심해 할까봐 이렇게 선물까지 준비해준 거였어?”
“딱히 그런 건 아니다.”
“선물이 아니면 암살감을 잃지 말라고 신선한 사냥감을 준비해준 거야? 보스는 역시 상냥해! 정말 기뻐!”
야이 개객끼야. 좀 사람 말을 들어.
리나는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마이페이스로 지껄여댔다.
뭐라고 말해도 다 씹고 암살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보스의 뜻은 그런 게 아닌 걸로 보인다만.”
쓸데없는 말을 잘하는 쿠로가 넌지시 참견을 했다.
아까 허튼소리 했다가 찍힌 걸 만회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아하핳! 그런 거였어?”
리나는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단검을 벽에 쑤셔 박았다.
콱!
자루만 남기고 칼날이 모조리 벽에 박혔다.
“정말로 그런 거였어?”
웃는 얼굴이 이렇게 무서워질 수 있다는 건 처음으로 알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같이 가자고 놀자는 거지. 그거 탐나는 군. 하나만 줘라. 나도 살인감이 흐릿해져서 조금 불만이 생기던 참이었다.”
“안~돼! 저어언부 리나꺼야!”
“…….”
이런 등신 같은 새끼. 뭘 동료의식을 지닌 척 행세하면서 같이 모험가킬러를 죽이고 싶다고 어필하는 거냐. 쓸모없는 쿠로 녀석은 무조건 3일간 버려둘 거다.
“잠깐 스토오오옵!”
“저, 저희들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딱 봐도 엄청나게 강해보이는 분들과 싸울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모험가킬러는 강자존중 약자멸시를 좌우명으로 삼는 직종입니다. 강존약멸의 기치에 따라 최선을 다해 접대를 해드릴 테니 부디 저희를 공격하지 말아주십시오!”
모험가킬러들의 당당한 외침에 리나는 코웃음을 쳤다.
“뭐래. 보스는 너희 따위가 저항하던 저항하지 않던 아무래도 상관없거든? 약하고 도움도 안 되는 것들이 항복해봤자 짐만 늘어날 뿐이야!”
“그럼 저희가 짐꾼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엥?”
“그쪽의 노예들을 운반할 짐꾼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덤으로 식량과 식수를 현지에서 보급 받을 수 있으면 미궁에서 탐사기간도 늘어날 테고요!”
리나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았다.
“보스. 방금 그거 들었어?”
“들었다.”
“칫. 못 들었으면 일단 죽여놓고 볼 텐데...”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이 싸이코패스야.
“웅. 어쩌지.”
“저희만 밑고 전부 맡겨주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성심성의껏 모셔드리겠습니다!”
“우웅. 이건 정말 고민되는데...”
“부디 저희 30명의 모험가킬러들만 믿고 맡겨주십시오!”
“아니 잠깐. 그건 너무 많잖아!”
리나는 포획한 도적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섯 명이니까 짐꾼도 여섯! 식량과 식수를 운반한 인력까지 계산하더라도 여덟 명 위로는 필요 없는 걸!”
“그런...!”
“보스! 여덟 명만 남기고 리나에게 선물로 주는 거 맞지? 응? 예쁘게 썰면 된다고? 정말? 와~ 기뻐!”
나 아직 한 마디도 안했다.
우리 리나가 암살금단증세로 미쳐가고 있나보다.
“리나.”
“응응! 응응!”
“지금 네 모습은 조금도 귀엽지 않다.”
돌연 장내에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리나가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하기도 잠시. 곧 고개를 푹 숙이고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한 편에 놓여있는 물통에서 물을 한 바구니 뜨더니 제 머리 위에 촥 쏟았다.
비 맞은 개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들며 물기를 털었다. 물 좀 끼얹고 정신이 들었는지 절제되지 않고 마구 새어나오던 살기가 싹 가라앉았다.
“이제 정신이 좀 들었나?”
“미안, 보스! 암살금단증세가 심해서 잠깐 정신이 나갔나봐! 꺄~ 부끄러워. 어쩜 좋아!”
“…….”
정말로 귀엽지 않아.
그보다 상대하기 어려워졌어.
이래서 어린놈들이 성장할 때마다 속이 쓰리다니깐.
전투력과 귀여움은 반비례한단 말이지.
괜히 마법소녀 같은 히든클래스에서는 직업을 유지할 수 있는 정년을 18세 전까지로 한정짓는 게 아니다.
“뭘 잘했다고 귀여운 척이야?”
“쳇.”
“내숭 떨지 말고 내 옆에 얌전히 있어라.”
리나는 불퉁하니 볼을 부풀리며 내 옆에 섰다. 이렇게 보니 2년 사이에 부쩍 키도 크고 여자다운 매력이 피어나기는 했다. 입만 다물면 상당한 미인이니 남자들도 곧 볼을 붉히겠지.
내 눈에는 그저 귀여운 척 해도 좋을 나이는 다 지나간 딱한 나이로만 보이지만.
그래도 게임 속 시간으로는 한 세기가 넘도록 살아온 몸이니, 이제 막 성인이 된 녀석의 귀엽지 않은 애교라도 훈훈한 눈으로 바라봐줄 수 있다.
“우우. 보스의 그 눈, 절대로 바보 취급하는 게 틀림없어.”
“…….”
아.
나 동기화 비율 낮아서 감정투영이 안 돼지.
“확실히 리나의 말대로 30명을 모두 받는 건 귀찮고 성가시다. 포로가 22명이나 늘어나지 않는 한 한도를 초과한 인원은 모조리 제물로 바치는 게 가장 합리적이겠지.”
“제, 제물이라니. 설마 저희를 악신에게 바치는 산제물로 삼을 작정이십니까!?”
“어... 뭐 그런 거다.”
항아리에 대해서 설명하기는 귀찮고 성가시니까.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쿠로가 끼어들었다.
“보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또 시답잖은 소리나 하면 3일이 아니라 5일 동안 이 자리에서 대기하도록 만들겠다.”
“…….”
쿠로는 조용히 닥쳤다.
시답잖은 소리나 하려고 했었나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시답잖은 소리는 아니었던 걸까.
“보스. 그래도 이것만큼은 말해야겠습니다.”
“좋다. 말해라.”
“그것에게 제물을 바치는 건 극도로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그것에 대해서 아직 모든 걸 아는 게 아닙니다. 만약 저희가 당해낼 수 없는 존재로 진화하면 어떡합니까?”
확실히 그 항아리, 금서에 적혀있지 않은 기이한 변이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항아리에서 시커먼 손이 나온다니, 그런 건 한 줄도 적혀있지 않았단 말이지.
분명 사람을 먹어치우면서 새로 습득한 능력이거나 리기아의 일지에는 적혀있지 않은 고유특징일 거다.
그런 위험한 녀석에게 먹이를 늘려주었다가 유모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난다면 나는 내 손으로 미궁 7대 금기를 강화시키는 미친 짓을 저지르는 셈이다.
“좋은 의견이다. 그럼 모험가킬러들을 제물로 바치는 건 그만두겠다.”
“충언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남은 놈들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네?”
“3일 동안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괜히 우리들에 대한 목격담이 돌아다니거나 하는 건 귀찮아지고, 리나가 피를 보고 미쳐 날뛰는 꼴을 보기도 싫으니까. 우리가 없을 때 조용히 싹 다 처리하라는 뜻이다.
다른 놈들보다 눈치도 좋고 기본능력도 출중한 쿠로라면 내 의미를 간단히 이해했겠지.
명색이 핵과금게이머들의 조직인 [길드]에서 브람 시 지부장까지 맡았던 게이머다. TOP 랭킹 100위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실력은 지니고 있다.
“전부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네 방식대로 해라.”
특히나 쿠로는 무력과 지력, 정치력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일처리는 깔끔하고 때로는 과감하기도 하다.
브람 시 시장 브람베르크를 암살한 것도 녀석의 소행이었지.
그런 과감한 결단력마저 갖춘 녀석이 모험가킬러들을 죽이는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할 리가 없다.
역시나 녀석은 금세 내 의도를 이해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는 길드 소속이라 마음에 안 들었지만 막상 부하로 두려니 그나마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건 이 녀석 정도로군.’
세상에 길드 소속 게이머들보다 위험한 부하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싸이코만 넘쳐나는 내 인복이 절망스러울 지경이다.
그래도 별 일이야 있겠어?
식량도 잔뜩 받았으니 때 되면 알아서 찾아오거나, 레이브가 묻혀둔 향수로 우리가 찾아가면 되겠지.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믿고 녀석을 뒤로한 채 전진하도록 하자.
* * *
그렇게 쿠로는 22명의 모험가킬러들과 B7층 늪지대 어딘가에 남겨졌다. 모험가킬러들은 그나마 파티 중에서 정상인처럼 보이는 남자와 남았다는 사실에 몹시 안도하였다.
그러나 쿠로가 정상인처럼 보였던 이유는 워낙에 개성 넘치는 또라이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지, 결코 그가 정상인이기 때문인 건 아니다.
쿠로는 흑산회파티가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하자마자 검을 뽑아들었다.
“버러지 녀석들. 나는 네놈들처럼 능력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드는 하찮은 우민들이 싫다.”
“예?”
“현실이라면 이런 짓도 못하겠지만 여기는 미궁 속. 인권보호니 만민평등이니 하는 하잘 것 없는 소리나 성가신 법 따위에 시달릴 걱정도 없지.”
쿠로는 1g의 내숭도 섞여있지 않은 본연의 개 같은 성질을 드러내었다.
“죽어라, 벌레들아!”
“히이익! 잠깐, 잠깐만여!!”
세상에는 ‘잠깐만!’이라고 외칠 때 비정하게 상대를 베는 유형과 그렇지 않고 잠깐 멈춰주는 유형이 있다. 쿠로는 워낙에 돈이 많고 여유가 있어서 후자의 유형에 속했다.
생사유무가 결정되는 위급한 상황에서 인간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쿠로는 이 모험가킬러들이 어떤 신선한 반응을 보여줄지 기대했다.
“보스께서는 저희들을 두고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방식대로 하라는 말도 했었지.”
“여기서 비정하고 신속하게 저희들을 모두 해치워봤자 보스에게 점수를 얻지는 못할 겁니다! 기껏해야 평소대로의 손속을 보여주었다며 같은 평가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겠지요!”
“너희의 제안을 따르면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예상 이상으로 솔깃한 제안이다. 합리적인 이유를 대며 자신들이 살아야 할 이유를 제시한 자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이유가 자신에게도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놀랍게도 일개 NPC에 불과할 이 모험가킬러의 제안은 그에게도 합리적인 제안일 가능성이 컸다.
“저희가 흑산회 소속이 되어서 미궁 내에서의 편의를 돌봐드리겠습니다! 사람 죽이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무지한 몸이지만 그렇기에 손을 더럽히는 일은 주저하지 않습니다!”
“흐음. 제안 자체는 흥미롭군. 목숨을 구걸할 때 내뱉을 말 치고는 나쁘지도 않아. 상황과 조건만 달랐다면 살려줬을지도 모르겠어. 허나 지금은 상황도 조건도 모두 나쁘군.”
“악신에게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제단>을 들고 다니느라 몬스터들이 접근하지 않고 있고, 그것 때문에 레벨을 올리지 못해서 골치 아픈 상황이지 않으십니까?”
쿠로는 이를 드러내며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들어서는 안 될 대화까지 전부 엿듣고 있었군. 너희를 살려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줄어들었어.”
“몬스터들이 접근하지 않는 건 상대가 정도 이상으로 강한 존재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약자들이 유인하지 않으면 정말로 계층보스와 마주하기 전까지는 레벨 업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럼 네놈들이 몬스터를 유인해서 두 사제들의 레벨 업을 돕겠다는 말이더냐?”
모험가킬러들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발 믿고 맡겨주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해내보이겠습니다!”
“어차피 쿠로님도 밑져야 본전 아니십니까!”
쿠로는 이 버러지들이 마음에 들었다.
안 그래도 <길드>는 브람 시 공성전 이후로 크게 세가 줄었고, 제국쪽에 있던 길드의 원류들은 마이어 왕국과의 결전으로 제국이 멸망하며 폭삭 주저앉았다.
지금까지 길드를 이끌어나가던 주류 갑부들이 모조리 몰락한 지금, 쿠로는 자신을 주축으로 한 핵과금게이머들의 새로운 길드를 만들 작정이었다.
수족이 늘어나서 손해를 볼 일은 없다.
오히려 이런 놈들을 원했다.
말 잘 듣고 알아서 기며 더러운 일도 마다않는 놈들을.
“좋다. 네놈들이 정말로 두 사제가 계층보스를 상대하기 전에 레벨을 올릴 수 있도록 만든다면, 내 긴히 너희들을 사용해주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레벨을 올릴 작정이지?”
가장 중요한 방법이 없어서야 지금까지의 얘기는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모험가킬러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진지하게 자신들의 계획을 밝혔다.
“미궁의 중층부까지 내려가서 닥치는대로 몬스터들을 몰고 다니다보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납니다. 그걸 다 끌고 보스에게 찾아가면 보스가 다 죽이고 사제분들의 레벨도 오를 겁니다.”
“으음. 몬스터웨이브인가...”
“흑산회의 최고위 간부들이 모인 파티라면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파티가 아닙니까. 몬스터웨이브 따위는 별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쿠로는 이 작전의 허실을 간파하였다.
“몬스터를 유인하는 건 어떻게든 된다고 쳐도, 그걸 보스에게 어떻게 이끌고 갈 거냐. 몬스터들은 보스의 기백.. 아니, 제단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접근하지 않을 텐데.”
“몬스터들도 종족이 있고, 개중에서 핵심이 되는 <정점>급의 몬스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존재들을 포획하거나 납치하면 종족의 존망이 걸렸다고 여기고 덤벼들 겁니다.”
“굳이 그런 존재를 포획하겠다고?”
“그 정도의 도박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보스의 앞에 몬스터를 끌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강한 존재를 포획하는 것도 쿠로님처럼 강력한 검사가 아니면 불가능할 테고요.”
“과연. 나만이 할 수 있는 작전이라. 그거 마음에 드는군.”
쿠로는 설득되었다!
“좋다. 그 작전을 실행한다.”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앉으시는 겁니까?”
“보스의 지령을 잊었는가.”
“설마...”
“그렇다. 우리는 3일을 대기한 후에 이동한다.”
“…….”
그렇게 몬스터 납치 및 몬스터웨이브 유발 작전은 3일 뒤로 미루어졌다. 허나 이 작전에는 쿠로조차도 미처 간과한 중대한 문제점이 존재했다.
만일 쿠로가 빌헬름 마이어가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미궁 내에서 발생한 몬스터웨이브는 점점 커지고 커져서 지상으로 향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 작품 후기 ============================
[추천구걸코너]
"잠깐!"
세상에는 '잠깐!'이라고 외칠 때 비정하게 다음 화를 누르는 독자와 그렇지 않고 잠깐 멈춰서 후기를 보는 독자가 있다. 운 좋게도 이번 독자는 후자에 해당되었다.
"추천주세요!"
"귀찮아."
"추천주세요!"
"퉤."
"추천주세요! ㅠㅠ"
작가는 차갑게 거절하고 침을 뱉어도 애원했다.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추천의존도가 높아진 것 같다. 독자는 불쌍한 작가를 정신적으로 지배한다고 상상하자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는 만족스레 추천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