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5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15)
드워프가 죽었다. 덤으로 봉인문도 끝장났다.
[미궁 상층부의 봉인문 수호자를 제거하고 봉인문을 파괴했습니다. 일정기간 동안 미궁 상층부의 난이도가 종합적으로 급격히 상승합니다.]
[미궁 중층부의 몬스터들이 자유롭게 상층부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미궁 상층부 몬스터들의 성장한계선이 뚫립니다.]
[미궁 상층부의 생태환경이 급격히 변화합니다. 모든 사물 및 비생물형 몬스터들이 보다 공격적이고 치명적인 위험을 지니도록 변화합니다.]
결과는 예상한대로 요지경이다.
미궁공략을 하러 왔다가 도리어 미궁 난이도만 올렸다.
“죄, 죄송합니다. 이렇게 나약한 문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지라...”
문이 나약한 게 아니다.
인간의 몸으로 여래신장 따위를 펼칠 수 있는 네 강함이 사기적일 뿐이란다, 유모야. 인류는 아직 너라는 괴물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한 100년만 썩다가 돌아와라.
물론 100년 뒤에도 인류는 널 감당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빌헬름 마이어 플레이는 끝나있겠지.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러니 네게는 이 문을 대신하여 미궁 중층부에서 올라올 마기를 억누르고 몬스터들의 침입을 불허할 게이트 키퍼 수색명령을 내리겠다.”
“한 번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제게 그런 중임을 내려주신다니, 성은이 망극합니다.”
“…….”
한 번 더 조지겠다는 말처럼 들린 건 기분 탓이겠지?
응, 기분 탓일 거야.
절대로 기분 탓이어야만 해.
“유모도 참. 어릴 때부터 비범하다 싶더라니 또 이런 사고나 저지르고...”
“유모의 어린 시절은 어땠기에 그러지?”
“제 목숨을 노리고 왕가에서 파견한 암살자의 암기를 접시 7개로 튕겨내고 젓가락 백 개를 날려서 역으로 암살자의 목숨을 끊으셨어요.”
야외훈련 같은 거 하기 전부터 괴물이었잖아.
그게 어딜 봐서 일반인이야.
* * *
빌헬름 마이어가 충격과 공포의 여래신장 차력쇼를 관람하는 사이, B7층에서는 드디어 추적이 시작되었다. 쿠로는 나름 길 찾기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길드는 언제나 히든피스를 독점해왔고 외부인력을 가용해서 정보유출의 위험성을 감수하느니 독자적인 능력을 배양해서 정보를 지키기를 선택했다.
쿠로 또한 그런 연유로 길 찾기 스킬을 CP까지 투자하며 습득한 몸이다. 다소의 길쯤은 가뿐히 찾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변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분명 길 찾기는 가능했다.
“쿠로 형님. 정말로 이 길로 가면 B8층이 나오는 겁니까?”
“틀림없다. 내 지식에 따르면 이 근방에 서식하는 식인식물들은 강한 먹잇감을 소화할 때마다 색이 짙어진다. B8층에 가까워질수록 식인식물들의 색은 짙어지지.”
“오오. 저길 보십쇼, 형님. 식인식물의 색깔이 회색입니다. 저 계통의 색상이 나온 건 처음 아닙니까?”
쿠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로 처음이군.”
저런 색의 식인생물은 상층부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느끼자마자 이변이 시작되었다.
“어엇...! 식인생물들의 색이 전부 바뀌고 있습니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불길한 징조가 틀림없습니다. 형님, 저희 괜찮은 겁니까?”
쿠로는 영리했다.
그렇기에 이 사태가 의미하는바 또한 깨달았다.
“마기가.. 중층부의 마기가 상층부로 올라오고 있다.”
“예?”
“먹잇감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농밀한 중층부의 마기가 올라오고 있다.”
모험가킬러들은 그게 뭐 어쨌냐는 표정이었다.
쿠로는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했다.
“경계가 흐려진다. 중층부와 상층부를 가르는 기준이 무너지며 상층부의 시작점이 보다 위로 후퇴하게 되겠지.”
모험가킬러들은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했다.
쿠로는 한층 더 이해하기 쉽게 말했다.
“미궁이 위험해졌다.”
“미궁은 언제나 위험하지 않습니까?”
모험가킬러들의 이해력은 병신이었다.
쿠로는 졸라 이해하기 쉽게 말했다.
“입 닥쳐.”
“넵.”
참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문답이었다.
바보들과 하찮은 시간낭비를 했다며 아까워하던 도중, 쿠로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이런 대화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스와 부하들!’
그렇다.
흑산회 보스와 주변인들이 대화를 나누면 늘 이런 느낌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남들은 뭔 말인지 알아먹지 못하는데 보스는 혼자 답답해하고, 결국 직접 나서서 모든 일을 하나씩 조져버리는 게 딱 방금 전의 대화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보스는 나나 리나 정도의 실력자들을 저 머저리들과 똑같이 여길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서있단 말인가?’
미궁의 핵심요소는 심층지대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많이, 더욱 깊게 파헤칠 수 있다. 그는 심층지대의 첫 번째 필드조차도 넘어서지 못한 심층의 입문자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많은 정보를 얻어내었지만, 빌헬름 마이어의 정보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히 추측조차도 할 수 없다.
심층지대에 ‘그 너머’가 있다는 발언이나 고위 뱀파이어 이즈라크와의 의미심장한 대화만 보더라도 그가 자신이 계측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잠자코 따라와라.”
그렇기에 쿠로는 모험가킬러들에게 상황을 이해시키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힘도 지략도 아니다.
선두에 나서서 부하들을 휘어잡고 거침없이 이끌어나가는 카리스마였다.
하지만 길 찾기 능력은 카리스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대량의 마기가 유입됨에 따라 미궁 생태계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고, 이는 길 찾기 난이도를 상승시켰다.
쿠로는 카리스마 넘치게 모험가킬러들을 인솔하고 이동했지만 열심히 B7층을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예파티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빌헬름 마이어는 어째서 사막도적단을 모조리 포획하고 내려간 거고, 미궁은 왜 이 따위로 변화하는 거야!”
“그보다 남겨둔 저 녀석들의 의도를 모르겠어. 대체 왜 자꾸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는 거지? 설마 빌헬름 마이어의 부하가 길을 잃었을 리는 없는데.”
“그거다!”
번개주교가 날카로운 통찰력을 발휘했다.
“빌헬름 마이어가 미궁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로 인해 이곳 B7층에서 중대한 무언가가 등장하는 게 틀림없어. 놈들은 그걸 찾기 위해 수색활동을 벌이는 거다.”
“과연...! 그런 거라면 납득할 수 있겠어. 설마 미궁 그 자체를 변화시켜가며 숨겨진 요소를 찾는다니. 빌헬름 마이어의 미궁지식은 정말 두려울 정도로 앞서나가는군.”
“아무튼 간에 놈들이 그걸 발견하면 우리가 약탈하는 거다. 히든트리거만 손에 넣으면 멍청한 사막도적단을 잃은 손실쯤은 가볍게 극복하고도 남지.”
정예파티들은 확신하였다. 쿠로를 감시하다보면 반드시 히든트리거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분명 빌헬름 마이어를 죽이는 과정에서 히든트리거가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같은 지형을 빙빙 도는 쿠로를 뒤따라 무의미한 미행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그 행동은 빌헬름 마이어에게 눈곱만큼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의 내장 속에 서식하는 헬리코박터균이 주는 데미지가 이들이 하는 뻘짓 보다 유의미한 데미지를 줄 거라는 건 틀림없었다.
* * *
위에서 일어나는 바보 같은 소동은 전혀 알지 못한 채, 흑산회파티는 미궁 중층부에 발을 들였다. 7대 금기의 일원, <리기아의 항아리>는 이를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분노했다.
강한 먹잇감이 제 발로 죽음을 향해 가까워지는 것은 좋다. 허나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 먹이들을 포식할 수 없다.
변수가 필요했다. 무언가 아주 강력한 변수가.
-플로어보스. 필드의 지배자여. 나의 부름에 답하라.
리기아의 항아리는 은밀하게 층의 지배자를 유혹했다.
이들을 습격하라고.
그리하면 강력한 힘을 나누어주겠노라고 말이다.
항아리의 탄생에는 어떤 강력한 존재가 연관되었다.
그 존재는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 항아리를 주시하는 중이다.
적절한 도움을 받는다면 보답은 충분히 약속할 수 있다.
-너는 누구냐. 어째서 나의 영역에 침범했는가.
필드보스가 응답했다. 인간은 감지할 수도 없는 마기를 이용한 비밀스러운 통신방식이었다.
-나는 모든 생명체들의 최후. 생명의 종언을 고하는 그릇. 만마의 정점에 선 자조차 경배하는 자가 창조해낸 화신체다.
-그런 강대한 존재가 나를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강대한 힘을 지닌 인간들에 의해 포획되었다. 나를 인간들에게서 구해준다면 백 년간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마도의 정수를 선사해주겠다.
리기아의 항아리는 매력적인 보상을 제시하였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곧 필드보스가 웅혼한 마기를 담아 대답했다.
-인간 따위에게 잡히는 화신체라니, 마치 버러지 같구나. 널 만든 창조주도 너 따위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며 절망할 거다. 병신같이 삶을 구걸하지 말고 자살해라.
-…….
-자살할 용기조차도 없는가. 제 주인을 욕보이고도 뻔뻔하게 살아남으려 드는 겁쟁이 새끼. 내게 말 걸지 말고 꺼져라.
몬스터 중에서도 챔피언(Champion) 내지는 로드(Lord)급 저력을 지닌 존재들만이 플로어보스(Floor Boss)라는 지고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
인간으로 치면 일국의 최고실력자 내지는 최고권력자 쯤 되는 위치다.
인간을 심심할 때 먹는 별미쯤으로 여기는 플로어보스에게 리기아의 항아리는 망신스러운 녀석이다. 마치 참치한테 납치당한 어부나 천년설삼에게 생매장당한 약초꾼 같은 느낌이었다.
-건방진 놈...
분하지만 스스로도 쪽팔리다는 자각은 있다.
리기아의 항아리는 수치심에 분개하면서도 얌전히 B11층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B12층에 도달한 뒤에야 다시금 존재감을 발휘하며 이번 층의 플로어보스에게 교신을 시도하였다.
-플로어보스여. 나의 부름에 답하라.
다행히도 이번 플로어보스도 항아리의 부름에 답해주었다. 유모한테 쳐맞고 다니는 불쌍한 처지이기는 하되, 항아리를 만든 자의 격이 워낙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항아리에 베인 주인의 품격 탓에 플로어보스는 마지못해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짐을 찾는가.
-나는 위대한 존재가 점지한 먹잇감을 이끌고 지저로 내려가고 있다. 그분께서는 먹잇감의 신선함을 위해 시련을 선사하고자 하신다. 하찮은 마물들을 희생하여 성의를 표시하라.
-무례한 놈...!
플로어보스는 대뜸 역정을 부렸다.
-짐의 영역에 살아 숨 쉬는 모든 마물은 짐의 혈통을 잇는 푸른 피의 자손, 나가(Naga)들이니라. 감히 짐의 백성, 짐의 말예들을 성의로 바치라고? 이는 짐을 향한 도전이나 다름없다!
-크흐흐. 그렇다면 뭐 어쩔 텐가.
리기아의 항아리는 이 작전은 먹힌다고 자신했다.
이번에 준비한 작전은 격장지계(激將之計)였다.
성격이 급한 적을 자극하여 의도한대로 이끄는 계책이다.
제 아무리 강력한 인간들이라도 플로어보스가 상대라면 어쩔 수 없이 진지하게 임해야 할 터. 상황이 그러하면 항아리를 향한 경계에도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틈을 틈타서 단숨에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
힘을 회복할 때까지 꽁꽁 몸을 감추었다가 위대한 분의 성역에 돌아가면 인간에게 붙잡힌 굴욕도 끝이다. 그 때가 되거든 위대한 존재의 하수인들과 함께 반격의 효시를 날릴 수 있다.
하지만 플로어보스, 나가의 왕은 영악했다.
그는 단숨에 리기아의 항아리가 노리는 바를 간파했다.
-전력을 다해서 네놈들을 다음 층으로 꺼지게 해주마.
-뭐? 아니, 이런 개새끼가. 피 색깔도 시퍼런 열성개체들만 길러서 뇌도 열등하게 되었는가? 이런 처참한 모욕을 당하고도 결투에 임하지 않다니, 네놈은 마물이 될 자격조차도 없다!
-애미 애비도 없는 항아리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피도 안 흐르는 머저리가.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네놈을 만든 위대한 존재도 널 실패작으로 여기고 있을 게 틀림없겠군.
패드립과 마성모독의 연속 콤보에 항아리는 마기가 거꾸로 솟구쳤다. 격장지계를 걸다가 역으로 상대의 노림수에 넘어간 탓에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격노를 금치 못했다.
우우웅!
우우우우웅!
항아리가 발산하는 마기의 농도가 짙어지자 기묘한 울림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끈끈하고 불쾌하게 변화하였다. 당연히 그 변화는 항아리를 매고 있던 청일에게 가장 먼저 감지되었다.
“제단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제단은 항아리를 가리키는 흑산회파티의 은어다.
모험가킬러들의 착각을 이용한 용어선정이었다.
물론 유모는 그딴 건 개의치 않고 걸어왔다.
“어떻게 이상합니까?”
“지 혼자 막 울어대고 진동합니다. 이거 터지거나 넘쳐흐르는 거 아닙니까?”
“잠깐 내려놓으십시오.”
인간들의 대화를 들은 항아리는 더욱 기고만장하게 포효했다.
-개 같은 인간 새끼들! 나를 두려워해라! 최후의 날이 도래하거든 파란 피의 나가들과 붉은 피의 인간들을 한 도가니에 섞어 모조리 갈아먹어주겠다!
“음. 정말로 심하게 진동하는군요. 제가 고쳐보겠습니다.”
-괴물같이 강한 힘을 지녔다고 내 정신마저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인간! 네놈은 특별히 산 채로 영혼을 끄집어내어 찬찬히 녹여 죽이..
콰아앙! 쩌적!
유모의 핵펀치에 맞은 항아리에 실금이 갔다.
끔찍한 고통이 항아리를 닥치게 했다.
“됐군요. 다시 진동하면 바로 알려주십시오. 미개한 짐승과 제단은 일단 때려야 말을 듣는 법입니다.”
“…….”
-…….
청일과 항아리는 입 꾹 닫고 업고 업히는 관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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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멸혼객에 버금가는 미친 존재감의 유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