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6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16)
미궁 중층부에 진입하면 본격적인 미궁탐사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리 미궁을 돌아다녀도 몬스터들은 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몬스터들에게 고립된 모험가들을 발견하고 달려가는 사이에 그 몬스터들이 모조리 줄행랑을 치겠는가.
심지어 구출대상인 모험가들도 실시간으로 달아나고 있다.
“아니, 저놈들은 왜 도망가는 거야?”
“보스. 우리 엄청 손해 본 기분이야.”
황당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리나도 나처럼 투덜거렸다.
근데 안타깝게도 이유가 짐작된다.
모험가킬러들이 여자 도적들을 들고 다니고 있잖아.
로프로 귀갑 묶기를 하고 등 부근 매듭에 밧줄로 손잡이를 만들어놨다고. 굉장한 비주얼로 운반하고 있잖아.
한눈에 봐도 수상한 노예상인들처럼 보이는데 몬스터들마저 우리를 보며 도망치고 있으니 ‘몬스터보다 위험한 인간’이라고 인식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보스는 밧줄에 묶인 여자가 예뻐 보여?”
“그런 특수한 성벽은 없다.”
“그럼 묶이는 쪽이 좋아?”
“그쪽이 더 특수하잖아.”
“보스는 의외로 이런 쪽으로는 수수하구나.”
실제로 부하라는 녀석도 이런 느낌이거나.
“유모. 갈증이 나는데 물은 맛없어서 마시기 싫어요.”
“그럼 휴대용으로 들고 온 포도주를 드리겠습니다.”
“웩. 이거 떫어요. 너무 싸구려 아니에요? 딴 거 줘요.”
물 대신 포도주를 마시는 느낌이거나.
“아쉽군. 기껏 구매한 새로운 명검을 시험할 기회도 없다니.”
“청일아저씨는 제단 메고 다녀야 하잖아요.”
“레이브. 그 호칭은 거슬리는군. 앞으로는 형이라고 불러라.”
“청일아저씨 나잇값 못해요?”
“뭐 이 새끼야?”
그나마 정상에 가까운 놈조차도 동네 깡패 같은 느낌이다.
이건 도망치지 않는 게 무리다.
99의 능력치 값에 도달한 카리스마 이전의 문제다.
“보스. 저 앞에 새로운 모험가들이 보이는데?”
“신경 꺼라.”
“에에? 화풀이 삼아서 죽이는 거 아니었어?”
에에는 뭐가 에에냐.
청초하게 미소 지으며 단검을 만지작거려도 안 된다.
유혹하듯이 웃으며 손짓해도 안 된다.
“쳇.”
그래도 모험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내 파티가 그리 막장이기만 한 건 아니다. 일단은 말을 섞으면 대화가 성립하는 녀석들이다. 크웨엑 끼에엑 거리지는 않는다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장점이라는 건 잊어버리자.
“으아아! 이쪽으로 오지마!!”
“용서해주세요! 제발 노예로 삼지 말아주세요!”
“고, 공격할 거야! 오면 공격할 거라고!”
앞으로 좀 가다보니 모험가들이 마구 소리친다.
레이브가 주변 지형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막다른 길에 몰렸나보네요. 지형지물이 근래 들어서 급격히 변화한 흔적이 있어요. 상층부로 마기가 유출되면서 중층부의 초입의 지형에도 변화가 생겼나 봐요.”
“항마력이 담긴 봉인문이 사라지며 초입지대 부근에서 옅어지는 마기의 농도가 짙어진 게로군.”
“그런데 이동루트가 저 막다른길에 감추어져있어요. 비밀통로를 찾으려면 저 사람들하고 접촉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 좀 돌아서 다른 길을 찾을 까요?”
그럴 필요는 없다. 꺄꺄 비명을 지르는 잔챙이들 때문에 시간낭비를 하는 절대로 사양이다.
“본인의 이름은 빌헬름 마이어. 브람 시의 미궁을 탐험하는 모든 모험가들을 지지하는 최고후원자이다. 해칠 의도는 없으니 순순히 고개를 조아리고 굴복하라.”
카리스마를 마음껏 드러내며 과시하였다.
그러자 모험가들은 한층 더 겁에 질려 악을 썼다.
“아, 안 돼!! 그 흑산회 보스가 여기에 있다니. 우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려는 게 틀림없어!!”
“자살이다! 이렇게 된 이상 아직 무기를 들고 있을 때 죽음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어!”
“…….”
나는 리나에게 손짓을 했다. 모험가들은 그림자처럼 스며드는 리나의 잠행을 눈치 채지 못했고, 순식간에 급소를 가격당해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죽일 작정으로 손을 썼으면 모조리 죽어나가고도 남을 공격에 리나가 부쩍 성장했다는 실감이 났다. 지금이라면 전성기의 카이사르와 겨루더라도 6할 정도는 리나가 이길 것 같다.
“보스! 리나가 참았어!”
“음?”
“귀여운 리나가 되기 위해 암살금단증세를 참았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일단 저놈들도 묶어라. 아무래도 저런 상태로는 가만 놔둘 수 없겠군.”
“응!”
“예상치 못한 짐 덩어리가 잔뜩 늘어나는군..”
이번에 포획한 모험가는 도합 7명이었다.
갑자기 늘어난 포로에 전투직 파티원들도 짐꾼이 되었다.
노예상인에서 노예상단 쯤으로 승격된 기분이다.
“보스. 7명 아니야.”
“그럴 리가. 숫자는 틀림없을 텐데.”
“얘 죽었어. 쇼크사했는데?”
“…….”
진짜냐...
“으으읍! 읍읍!”
“읍으으읍!”
“으브븝!”
얌전히 있던 여도적들도 다시 패닉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눈망울에 눈물과 함께 공포심이 맺혀있다.
딱히 이쪽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너무 무서워하네.
“진정해라. 너희를 헤치려는 의도는 없었다. 기껏해야 중층부 따위에서 너흴 죽이려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모험가 지원정책을 유지해왔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읍읍..”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너희를 이런 곳에서 죽이는 건 내게 있어서도 크나큰 손실임을 알 수 있다. 이득을 보려면 적어도 심층지대를 함께 탐사할 실력자를 한 명이라도 늘려야만 하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리나가 머리 위에 ‘나 이거 알아!’ 하는 느낌으로 느낌표를 띄우며 감탄하였다.
“심층지대에서 죽여야 이득인 거구나!”
“아니야.”
정색하고 말했는데 이미 늦었나보다.
여도적들이 기어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좌절하고 있다.
새로 포획한 모험가들도 절망어린 눈물을 쏟아낸다.
시발.
나는 갑자기 분노를 주체하기가 힘들어졌다.
내가 이 새끼들을 살리겠다고 며칠간 무슨 고생을 했는데.
폭주하는 리나를 달래고 내키지도 않는 모험가킬러들을 짐꾼으로 고용하며, 이번에는 다시금 파티원들을 짐꾼으로 쓰는 부담마저 감수하였다.
그런데 감히 내 앞에서 눈물을 터뜨려? 인내심의 끈이 갑자기 뚝 끊겨버렸다.
“제단 열어.”
“네?”
“사망자의 이름을 적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은가.”
청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쿠로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자칫 제단이 강화되기라도 했다간 저희들도 위험해질지 모릅니다.”
“그때는 제단을 부숴버리면 된다. 네 마음속에서는 저 제단이 본인보다도 무서운 존재가 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보스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입니다. 심우주햄스터보다도 열 배 가량 무섭습니다.”
뭐야 그 기분 나쁜 비유는.
무섭다는 거냐. 무섭지 않다는 거냐.
“거기 너. 저 시체의 이름을 말해!”
“못해요! 조이의 시체를 욕보이지 말아요!”
“…….”
양심과 생존본능 사이를 절묘하게 줄타기 한 건가.
모험가의 협력에 의해 이름은 간단히 입수했다.
항아리에 이름을 적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체 어떻게 잡아먹히는 걸까.’
내심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시체는 안 먹는 거였냐!!’
나는 미궁탐사에 있어서 시간 하나만큼은 병적으로 지킨다.
휴식할 때 휴식하지 못하면 큰 위기에 처한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하면 더욱 큰 싸움이 기다린다.
투자한 시간은 어떻게든 의미를 지녀야 한다.
헛수고라는 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이왕 시간을 들인 이상, 이대로 성과를 못내는 건 안 된다.
“가장 먼저 동료의 이름을 파는 놈 한 명만 살려주지.”
“저 새끼가 조크입니다!”
눈치 빠른 모험가 한 명이 이름을 팔았다.
“좋은 순발력이군. 네 이름은?”
“유스테리아라고 합니다.”
길게 땋은 갈색머리를 지닌 매력적인 여전사다.
생존의지가 강하고 눈도 맑다.
이런 놈들은 동료를 팔아서라도 심층까지 갈 놈들이다.
“항아리에 이름을 적어라.”
“예.”
“단, 적는 이름은 유스테리아다.”
청일이 깜짝 놀랐다.
당연히 유스테리아는 더욱 놀랐다.
“어째서! 살려준다고 했잖아요!”
“미궁에서 마지막까지 믿어야 하는 게 바로 동료들이다. 그런 동료를 한 치의 주저도 없이 팔아넘겨가며 살아남는 녀석 따위,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을 리 없다.”
“비겁한 새끼!”
심층지대에서도 공포를 못 이겨 아군을 배신하거나 팔아넘기는 배신자들은 종종 나타난다. 유스테리아는 그런 비겁한 자의 본성을 지녔다.
안면이 조금 매력적으로 생겼고 몸매가 약간 더 뛰어다나고 장차 날 배신할 수도 있는 모험가를 살려둘 수는 없다.
이런 녀석이 심층지대까지 도달했다간 본인에게도 함께 하는 자들에게도 파멸이 될 뿐이다.
슥슥
청일이 손을 깨물어 피를 내고는 이름을 적었다.
그러자 항아리가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주르륵
말라붙은 항아리 안에 검은 액체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항아리에서 검은 손이 뻗어 나왔다.
스아아아아...
[경고! 경고! 한계를 넘어선 극강의 존재가 눈을 뜹니다.]
[현재 당신의 수준으로 승산은 제로입니다.]
[절대적인 위협으로부터 지금 당장 퇴각하십시오.]
내심 우습게 여기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한없이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린다.
저것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다.
한 순간에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그런 위기감이 게이머의 본능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그 본능의 깊숙한 곳으로 거친 목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제물을 인식하였다.
이것이 <리기아의 항아리>의 진면목이다.
상대의 존재를 각인하는 순간, 오직 그 존재를 파멸시키기 위해 모든 악의를 쏟아 붓는 거대한 절망의 구렁텅이다.
저것에 한 번 먹잇감으로 낙점되면 결코 살아남을 수는 없다.
“사, 살려줘어어!”
-좋다. 영구억겁 살도록 해주마.
항아리는 무자비한 광기를 담아 광소하였다.
-무자비한 파멸의 심처에서 영생을 공포에 떨며 살아라!
“꺄아아아악!!”
항아리는 단숨에 수천 개의 검은 손을 뻗어내어서 유스테리아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단숨에 유스테리아의 몸이 항아리에 집어삼켜지려던 순간이었다.
덥썩!
유모가 검은 손 한 뭉텅이를 한 손으로 꽉 붙잡았다. 손의 숫자가 무색하게도 유스테리아는 허공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스. 지금 이 녀석의 실체를 보고 확신했습니다.”
“...뭘 말이냐.”
“이 항아리, 때려서 죽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 말도 안 되는 괴물보다 더 쌘 유모가 전의를 드러내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생각해도 정말로 때려죽일 수 있어 보인다.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그녀의 행동에 기겁하며 제지하였다.
“저거 죽이면 큰일 납니다!”
“절대로 그러시면 안 됩니다.”
톡쏘는엘프와 탕쏘는엘프였다.
“살려둬서 득이 될 리 없는 위험한 제단이다. 이 기회에 부숴버리는 편이 낫다.”
“그거 진짜 제단이에요! 부수면 그거 만든 신이 엄청나게 격노할 겁니다!”
“뭐?”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게 진짜 제단이었어?
“악신이라면 한 번 겪어봤다. 그런대로 감당할 수 있겠던데.”
공포의 악신은 꽤나 무기력하게 당했었지.
악신이 아무리 강해봤자 인간들에게 관여할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제단이 사라지면 매개체가 하나 줄어드는 꼴이니 현세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더욱 줄어들겠지. 결코 손해 보는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왜, 저것을 만든 게 주류 12악신의 일원이라도 되는가?”
“그보다 더한 고대신격을 지닌 존재입니다. 종말의 악신이란 말입니다.”
“종말의 악신?”
전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악신이다.
허나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대체 어디서 들어본 걸까.
‘아.’
고민 끝에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술 먹고 기절했을 때 카이사르가 사제랍시고 데려왔던 게 종말의 사제였었다. 덤으로 그 사제는 지난 2년간 브람 시 감옥에 고이 처박아두고 잊고 있었다.
그런 컬트적인 종교의 사제가 그리 많을 리도 없으니 당연히 종말의 악신도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거다.
‘그 악신한테는 이미 찍혔잖아! 2년도 더 전부터!!’
유모가 내게 물었다.
“뭔가 짐작 가는 구석이라도 있으십니까?”
“있다. 아무래도 그 악신과는 이미 악연이 남은 것 같군.”
“알겠습니다. 이미 적이라면 살려둘 필요는 없겠군요.”
뭐? 아니, 잠깐──.
미처 말릴 새도 유모의 여래신장이 항아리를 직격했다.
============================ 작품 후기 ============================
우릴대로 우려먹었다!
항아리보쌈 먹방도 오늘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