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7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17)
항아리에 균열이 일었다. 균열은 쩍 벌어지다 못해 박살났다. 실금 같은 귀여운 수준이 아니라 시커먼 소화액이 콸콸 쏟아지며 바닥을 마구 뚫어댈 정도의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리기아의 항아리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종말의 악신이 남긴 신기가 요동칩니다.]
시커먼 소화액과 검은 손 따위와는 격을 달리하는 무언가가 요동친다. 지상최강의 생물체처럼 보이던 유모조차도 오른손을 격렬하게 떨며 주먹을 움켜쥐고 있다.
이깟 항아리 따위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그 너머에 도사리는, 지금 이 순간 이 항아리를 매개로 삼아 강림하고 있는 악신의 존재감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악신은 자신의 단말을 살리기 위해 강림을 택하였다.
[종말의 악신이 <리기아의 항아리>를 매개로 삼아 강림합니다.]
[도주조차도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여정은 이제 끝났습니다. 다가올 파멸로부터 도망칠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입니다.]
세상만물의 흥망성쇠를 초월하여 불멸에 도달한 영원성이 눈을 떴다. 영원의 시간동안 전력을 다해 세상만물의 종말만을 추구해왔던 존재가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 미궁의 심층지대에 도달하기도 전에 최악의 절망 중 하나가 도달했다.
이 녀석은 공포의 악신 같은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타협의 여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우주의 무자비한 심연 그 자체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는 것처럼 마땅히 찾아올 종말이다.
종말은 결코 마주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것이 도달하는 순간이 끝이다.
[절대적인 종말이 엄습해옵니다.]
[격의 체크, 실패.]
[삼라만상을 초월하지 못한 모든 존재가 파멸합니다.]
종말은 도래하는 순간 모든 것을 멸해버리니까.
폭포수처럼 일어난 어둠의 운해가 온 세상을 집어삼킨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은 멸망했다.
[당신의 영혼은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You died...]
하지만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시스템에게 부정당한, 분명히 내가 쟁취해낸 ‘격’의 존재를.
[공포군주의 칭호에 깃든 <공포의 악신>의 인정이 모든 종류의 두려움에 절대적인 저항효과를 발휘합니다.]
[상태이상 : 종말의 부름(Lv 20)에의 저항체크 성공.]
[종말의 부름에 의해 초래된 모든 상태이상 및 실체화 데미지가 무위로 돌아갑니다.]
무저갱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던 암흑이 걷혔다.
여기는 미궁이다.
나는 아직 두 발로 서있고,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다.
“하. 변함없이 악신이라는 존재는 규격 외로군.”
잠깐이지만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공포의 악신에게 사도선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으면 필멸자의 운명을 따라 죽음을 맞이할 뻔했다.
방금 전, 종말의 악신이 사용한 스킬은 심층지대에서도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죽음선언>의 몇 단계 쯤 위에 자리한 스킬이다.
거짓된 죽음을 선사하며 그 죽음을 떨쳐낼 이유를 찾아내어 자신의 의지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도록 만드는 끔찍한 스킬이다.
“허억!”
“바, 방금 그건 대체...!”
“아, 안 돼. 저런 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내 의지로 스킬 그 자체를 무위로 돌린 덕분에 부하들은 무사히 종말의 위기를 벗어났다. 반면 사막도적단이나 포획한 모험가들은 형체조차도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하였다.
기이한 점은 외부인인 톡쏘는엘프와 탕쏘는엘프 또한 버젓이 살아남았다는 점이었다.
그 덕분에 생사를 가르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은 조금이라도 <빌헬름 마이어>가 이 종말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었던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차이였다.
“악신 따위에게 주눅 들지 마라. 너희들의 앞에 선 자가 마이어 왕국을 창시한 초대 국왕이자 흑산회 보스, 빌헬름 마이어라는 사실을 잊었는가.”
단순한 믿음만으로 살아남은 게 아니다. 진정으로 그 파멸적인 감각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 흐트러지게 해서는 안 된다.
종말은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다.
한 번 저항했다고 간단히 물러설 만큼 맺고 끊는 게 깔끔한 녀석이 아니다.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들이닥칠 수 있는 것. 그것이 종말이다.
“보스! 우린 어떡하면 되는 거야!?”
리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제단에 남은 신기가 모두 소멸되면 악신의 강림은 끝난다. 그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게 대체 언제까지인데!?”
“그건...”
신기를 목격하는 건 처음이 아니다.
항아리에 일어난 균열로부터 분출된 양도 기억하고 있다.
그 크기에 그 정도의 유출이며, 이만한 권능을 사용했다면...
[정보판정 통찰체크]
[목표 값 75 > 현재 값 1]
[맥시멈 크리티컬(Maximum Critical)!! 분석정보가 가장 정확하게 제공됩니다.]
[종말의 악신의 강림 남은시각]
[8011억 4340만 1112년 223일 5시간 13분 37초]
그렇게나 오래 걸릴 리가 없잖아!!!
진짜냐? 설마 진짜인 거냐? 아니, 역시 부자연스러워!
내 감이 맞으면 남은 시각은 기껏해야 두 시간. 뭔가를 저지르려고 하면 힘의 소모로 인해 몇 초 만에 끝날 시각이다. 저렇게나 무지막대한 시간이 걸릴 리가 없다.
그야 무려 8011억 시간이라고?
행성이 탄생하고 사멸할 시각에 버금간다고? 그런 미친 단위의 시간동안 강림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제단이니 제물이니 단말이니 필요 없이 영구히 강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걸.
[어리석은 통찰력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렸습니다.]
[You died...]
그렇게 마구잡이로 죽을 리가 없잖아.
완전 엉망진창이라고.
시스템 알림이 그렇게까지 막장인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두 시간이다. 두 시간만 버티면 된다.”
저런 멍청한 시스템 알림 조작만 하면서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겠지. 종말의 악신이니 뭐니 해봤자 일단 격에 도달한 존재가 있으면 알 바 아니다 이거야.
괜히 신들이 사도선정이나 용사육성을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서 하겠어?
신의 힘을 선사하는 일이니 자칫 과한 힘을 부여해서 새로운 초월자를 탄생시키거나 지상의 패권 그 자체를 뒤바꾸지 않도록 나노미터 단위의 공정을 하듯이 힘을 잘라줘서 그런 거다.
그토록 격을 이룬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의 간극은 크다.
하물며 절대자의 격도 아니고 초월자의 격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격을 달성하려면 신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공포의 악신이 멍청한 타이밍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힘을 얻을 기회는 없었단 말이지. 종말의 악신이 스킬이 전혀 먹히지 않는 내게 당황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그야 할 줄 아는 게 종말시키는 것밖에 없는 걸. 일단 면상 들이대고 기운 좀 뿌리면 알아서 다 죽어버리는 걸.
이렇게까지 오래 살아남아서 저항하는 녀석을 종말시키는 방법 따위 알 리가 없지. 무슨 스킬을 쓰고 무슨 속임수를 써도 절대로 속지 않을 텐데 뭐 어쩌겠어?
[당신은 15년 후 말기 암에 걸려서 죽습니다.]
갑자기 기분 나쁜 예언을 해도 안 속는다.
시스템이 하는 말은 절대로 안 들어.
내 생각을 읽어내더라도 약점 따윈 절대 모를 거다.
[네 머리는 원형탈모에 걸리기 쉽게 생겼다.]
[아니, 원형탈모나 걸려버려라.]
예언이 안 통한다고 저주를 걸어대지 마라.
초등학생이냐.
완전히 악신 같은 인상마저도 사라졌잖아.
[원형탈모. 그것은 네놈에게 찾아올 필연적인 종말이다.]
비장한 어조로 내뱉어도 안 된다.
그야 언젠가는 빠질지도 모르겠지만 이거 게임이라고.
기본적으로 게이머는 탈모상태 면역이잖아.
유전자 단위의 캐릭터 설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탈모에 걸릴 확률 따위가 설계되어져 있을까보냐.
그보다 왜 이리 내 머리만 집요하게 공격하는 건데.
이 녀석, 혹시…….
반쯤 포기한 상태인 건가?
[히든퀘스트 ‘리기아의 항아리를 고쳐라’ 발동!]
[고대신격을 지닌 종말의 악신의 신물 <리기아의 항아리>가 중대한 타격을 입고 내부에 깃든 신격이 유출되고 있습니다. 시급히 악마의 뿔로 구멍을 막고 종말의 정수를 넣으십시오.]
[리기아의 항아리가 복원될 시, 악신은 당신의 두피를 종말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거참 성가실 정도로 끈질기네!
그딴 보상 내걸어도 하고 싶지 않거든!
전혀 하고 싶은 마음 안 들거든!!
“보, 보스. 항아리 안에서 커다란 눈동자 같은 게 보이는데? 저거 괜찮은 거야?”
“괜찮다.”
“정말로 단검 날려도 괜찮은 거야?”
“날리지 마라!!”
“히익!”
뭐가 히익이냐. 저런 만만한 녀석의 외양이 좀 기분 나쁘게 생겼다고 잔뜩 쫄아서 사고 칠 생각이나 해놓고는.
“미리 말해두지만 저 악신은 우리에게 어떠한 피해도 미칠 수 없다. 아무리 간교한 꾀를 부리고 속임수를 쓰더라도 그건 전부 거짓이다.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된다.”
“정말로?”
“악신이 부리는 수작은 전부 무시해라. 지금의 녀석은 완벽히 무가치하다. 악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겁박하려 할 뿐이니 두려움만 떨쳐낸다면 반드시 무사할 것이다.”
실제로 위협이 되지 않으니 마음 놓고 큰소리를 칠 수 있다.
부하들은 그런 내 모습이 어지간히도 든든했나보다.
두려움이 깃든 눈이 조금씩 본연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습격이라면 리나가 전부 막아낼게!”
“낭군님의 앞은 제가 지키겠어요.”
“악신이 남성만 아니라면 자웅을 겨룰 수 있습니다.”
총명과는 거리가 먼 똘기를 말이다.
여성진들이 무섭다.
그보다 남자들이 너무 무기력하다.
“부, 부탁해요!”
“으음. 나로서는 도저히 맞설 용기가 나지 않는군.”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역시 흑산회가 최고입니다. 믿겠습니다.”
레이브와 청일, 두 엘프남은 완전히 응원모드에 들어갔다.
남녀의 역할이 바뀌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그게 싫다는 건 아니다.
리나나 도로시 이지스, 유모는 재능만 있는 게 아니다.
부단한 노력 끝에 자신의 진가를 내세웠다.
남자들도 노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강도 자체가 달랐다.
열악한 입지를 깨닫고 더욱 열심히 노력을 한 것이다.
“힘내라, 힘!”
남자들 사이에 숨어서 같이 응원하고 있는 모자이크녀만 제외한다면.
지난 2년간 백보무투술을 익히고 백보심공을 수련한 건 마찬가지인데 유독 쟤만 성장이 더디다. 캐릭터시트지를 만들 때 습득한 체질 자체가 보통 사람과는 달라서 그런 걸까.
쟤만 무력이 강해지는 게 아니라 미모만 상승한다. 근력 1 오를 때 매력 5가 상승하는 것 같다.
‘이걸로 만에 하나 있을 물리적인 위협도 안심이고, 시스템을 이용한 착란공격에 흔들릴 걱정도 없다.’
종말의 악신은 완전한 외통수에 내몰렸다.
그렇게 확신하던 와중이었다.
[악신의 호감도가 10 하락합니다.]
츤데레냐.
네놈의 호감도가 올라봤자 조금도 두렵지 않아.
[리나의 호감도가 10 하락합니다.]
그건 오히려 환영이다.
그놈의 호감도는 조금 낮아져도 상관없다고.
과한 애정이 부담스럽기까지 했는걸.
[드디어 찾았군. 네놈의 약점을.]
“!?”
[리나라는 계집의 애정이 네놈의 종말트리거렷다!]
백번 찔러서 안 넘어갈 나무 없다더니.
기어이 종말의 악신이 내 약점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나는 자신만만하게 평정심을 유지했다.
리나의 호감도가 올라가봤자 가짜 시스템 알림이다.
진짜 리나의 호감도는 변하지 않는다.
얀데레 플래그가 설 걱정 따위는 조금도 없다.
[리나라는 계집을 그 얀데레라는 걸로 만들면 되는군!]
[좋다. 제법 참고가 되었다.]
시발.
이 비겁한 핵쟁이 새끼야.
마인드 핵 안 끄냐.
============================ 작품 후기 ============================
악신님 핵 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