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8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18)
종말의 악신은 당황했다. 고작해야 일개 인간 따위가 자신의 권능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파훼하다니. 인세에 다시없을 대영웅이라 불리는 자들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종말의 권능이 알려졌을 가능성은 없다. 그는 심층지대에 머무르는 고대신격으로 외부에는 존재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권능을 마주한 목격자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했다. 정보가 새어나갔을 가능성은 제로다. 그렇기에 종말의 악신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종말의 권능이 진심으로 자신을 헤칠 수 없노라고 굳게 믿고 있었단 말인가.’
이런 가혹한 현실은 있을 수 없다는 분노에 기반을 둔 부정이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신감에 기반을 둔 부정이다.
심지어 그를 따르는 부하들마저 온전히 살아남았다. 종말의 악신은 그들의 생각을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격이 다르다.’
이 나른한 눈매의 인간에서는 미천한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절대강자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공포의 악신이 사도로 선정하였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실력으로 거대한 <벽>과 마주하며 그 벽을 넘나들기 위한 힘을 축적하고 있다.
전 대륙에서 십 년에 한 명도 나오기 힘들다는 절대지경의 벽이 아니다. 한 세기에 단 한 명이라도 출현하면 기적이라고 여겨지는 초월지경의 벽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자격은 갖추었다.’
‘신의 인정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인과력의 보호마저 받고 있다.’
남자는 가공할만한 신의 위세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태연스레 중얼거렸다.
“하. 변함없이 악신이라는 존재는 규격 외로군.”
그 순간, 종말의 악신은 깨달았다.
이것은 공포의 악신과의 조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 남자는 언젠가 다른 악신과 마주한 적이 있다.
그를 따르는 부하들의 사념에서 관련된 정보도 입수했다.
빌헬름 마이어는 신의 저주를 받았다.
달리 말하자면, 신의 저주를 받고도 살아남았다.
지금 그에게서 저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분명하다.
‘신의 저주를 자력으로 파훼하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만한 재주가 있었으니 종말의 권능을 부정할 수 있었겠지.
한평생 신의 저주와 싸웠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종말선언>이나 <종말의 부름>으로는 이 자를 죽일 수 없다.
격을 이룬 자는 선언과 부름에 흔들리지 않는다.
허나 <리기아의 항아리>는 심각한 피해를 입어 그의 물리력을 투사할만한 단말이 되지 못한다.
남아있는 신성력으로는 힘의 편린을 구현하는 도중에 모든 힘을 소진하고 단말이 끊길 것이다.
‘이만한 걸물은 나의 사제 중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세기? 어림도 없지.’
‘천년의 시간이 지나도 이런 놈은 나타날 수 없다.’
모든 영웅은 선신의 힘을 받아들인 체스 말에 불과하다.
대영웅은 그중 뛰어난 자를 일컬을 뿐. 모시는 신의 법칙을 바르게 준수하여 보다 큰 힘을 하사받을 수 있었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반하여 선신들의 뜻을 거절한 다크히어로들이 나타났다. 그들 역시 강하기는 하였으나, 대영웅들의 위세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지상은 엄연한 선신들의 영역이었다.
그런 선신들의 본진 한복판에서 돌연변이가 나타났다.
선신들의 세력을 가차 없이 부쉈다.
심지어는 악신의 사도가 되는 것마저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악신들의 영역인 미궁을 향한 공략의지를 끊임없이 보이고 있다. 이 절묘한 목표가 악신진영과 선신진영 양측이 섣불리 그를 적대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있다.
12선신과 12악신은 <빌헬름 마이어>라는 존재를 자신들이 다룰 수 있는 체스 말이 아니라고 인지하고 있다.
신들의 뜻에 의해 필멸자의 숙명대로 휘둘리다 죽어야 할 체스 말이 자신의 의지로 변수를 일으키고, 왕조를 세우며, 지상과 미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영웅도 파멸자도 아닌 자.’
‘신의 뜻을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격을 지닌 존재.’
‘이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전무후무하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그렇기에 결정했다.
‘죽일 수 있다면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여야만 한다.’
확고하게 세워진 격의 기둥을 힘으로 무너뜨릴 수는 없다.
안에서부터 무너지게 해야 한다.
종말의 악신은 끊임없이 빌헬름 마이어를 시험했다.
압도적인 시간으로 짓눌러도 차갑게 냉소하였다.
인간 남성이 가장 큰 절망을 느끼는 두피를 공략해도 미동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서는 일말의 불안도 없었다.
그는 강림의 지속시간을 정확히 통찰하고 있으며, 자신이 탈모에 걸릴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100%의 흔들림 없는 확신은 비집고 들어갈 수 없다. 종말권능은 1%라도 망설임이 있어야 심령을 장악한다.
악신은 방향을 달리 하였다. 빌헬름 마이어를 안심시키고 그의 사고를 읽어내는 데 전념하였다. 오만함은 언제나 방심을 초래하고, 방심한 자는 제 약점을 되새긴다.
‘너는 안전하다. 우월감을 느껴라.’
‘잘못된 공략을 조소하며 약점을 떠올려라.’
‘그 사실에 한층 더 안도하는 순간이 네놈의 최후가 된다.’
선신을 따르는 존재였다면 이런 심상공격은 불가능했다.
상극의 힘은 서로의 힘이 투사되는 걸 가로막는다.
하지만 빌헬름 마이어가 이용하는 힘은 악신의 힘이다.
공포의 권능은 공포로부터 그를 지켜줄 수는 있다.
허나 악신의 권능 그 자체를 차단시키지는 못한다.
종말의 악신은 12악신의 위에 군림하는 고대신격이니까.
모든 악신들의 신격은 그로부터 파생되었다.
힘의 원류가 되는 그의 힘을 막을 수 있는 악신은 없다.
[드디어 찾았군. 네놈의 약점을.]
“!?”
심원한 악의가 기어이 <빌헬름 마이어>의 약점을 찾았다.
바로 리나라는 계집이었다.
금발청안의 암살자 부하를 약점으로 여기는 이유는?
한 번 틈이 벌어지자 또 다른 틈이 보인다.
빌헬름 마이어는 스스로의 생각으로 제 약점을 해명했다.
바로 리나가 <얀데레>가 되는 게 두려운 것이다.
[리나라는 계집을 그 얀데레라는 걸로 만들면 되는군!]
[좋다. 제법 참고가 되었다.]
빌헬름 마이어는 극도로 동요하였다.
두려움을 모르는 공포의 사도가 공포를 느꼈다.
이 정도로 극단적인 반응이라면 두고 볼 것도 없었다.
얀데레는 빌헬름 마이어의 천적이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심지어 얀데레가 되는 방법마저도 간파했다.
호감도가 올라 애정이 높아지면 된다.
종말의 악신은 그 사실이 유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인간은 애정을 갈망하는 존재이거늘.’
‘정작 그 애정을 최대의 약점으로 여기는 인간이라.’
‘역시 빌헬름 마이어는 돌연변이다.’
인간보다는 악신에 가까운 녀석이다. 그간 벌여온 행보를 돌이켜보면 화신강림을 한 악신이라도 이렇게까지 사악할 수는 없겠다 싶었다.
그렇기에 더욱 살려둘 수는 없다. 그의 지배를 따르지 않는 위험요소가 성장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
리나라는 계집은 반드시 얀데레가 되어야만 한다.
‘방법은 간단하지.’
빌헬름 마이어가 아닌 리나를 직접 공략한다.
악신의 목표가 변경되었다.
* * *
항아리 사이로 꿈틀거리던 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불길한 검은 연기가 시야를 차단했다.
리나는 어느새 자신이 고립되었음을 깨달았다.
‘보스는 말했어. 저건 리나를 위협할 수 없다고.’
확고한 믿음을 토대로 환각을 몰아내려던 순간.
그것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인간 여자여. 너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연심을 품고 있군.]
자그마한 어깨가 흠칫 떨렸다.
차라리 욕설이라면 무시할 수라도 있지, 느닷없이 정곡을 찌르니 정신이 멍해졌다.
종말의 악신의 발언은 그녀로서도 당혹스러웠다.
[네 마음은 결코 보답 받지 못할 것이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
[알고 있을 텐데. 그는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거물이라는 걸.]
심리전은 의미 없다.
악신은 실시간으로 리나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그녀가 하는 생각, 되새겨보는 기억을 전부 훔쳐보고 있다.
리나는 빌헬름 마이어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 마음을 있는 힘껏 억누르고 있다.
그의 대업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악신은 그런 두려움을 헤집었다.
리나의 이성을 가차 없이 자극하였다.
[보아라. 이것이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의 모습이다.]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절륜한 몸매.
야시시한 미소와 유혹적인 손짓.
빼빼 마르고 사람 죽이는 법밖에 모르는 리나로서는 따라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야! 보스는 리나가 좋다고 했어!”
[그렇게 또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가? 사실은 너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널 그저 편리한 도구로 여기고 있을 뿐임을.]
“틀려! 이질이 말해줬는걸. 보스는 리나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고.”
오, 이런.
종말의 악신이 흉측한 웃음을 지으며 넌지시 물었다.
[괜찮겠는가? 그런 얄팍한 믿음에 의지해도.]
“리나와 이질의 믿음은 얄팍하지 않아!”
[그럼 그렇게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녀야말로 네게서 그를 빼앗아갈 연적이니까.]
충격적인 발언에 리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연적...? 이질이?”
악신은 여세를 몰아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렇다. 그녀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미약을 통해서 빌헬름 마이어를 유혹하라는 제안. 그걸 받아들이면 빌헬름 마이어는 틀림없이 널 미워했을 거다.]
“그건...”
[암살자는 비정한 무기. 그런 주제에 감정을 앞세우며 걸림돌이 된다면 주인에게 버려지는 건 순식간이지. 그렇게 네가 사라진다면 빈자리를 대신하는 건 누구였을까.]
리나의 두 눈에 강한 의혹이 차올랐다.
“정말로... 이질이?”
[그렇다. 네가 가장 아끼던 부하야말로 너를 그 남자의 곁에서 떨어뜨리고자 흉계를 발휘한 연적이다.]
“아닐 수도 있어.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 맞았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복수해야지. 두 번 다시 너와 보스의 관계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이질은 나보다 약해.”
[하지만 발육은 좋지. 너보다 작았던 어린 부하는 더 이상 없다. 그만 현실을 직시해라. 그녀는 너보다 키도 크고 가슴도 크고 골반도 크다. 심지어 머리도 좋지.]
“으득...!”
[게다가 너보다 더 귀엽기까지 하다. 가끔씩 느끼지 않았는가? 보스가 그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리나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건 전부 환각이야!”
[그럼 어째서 이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있지? 정말로 환각일 뿐이라면 진즉에 사라져야 마땅했을 터인데.]
“그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내 말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는가. 암살단을 향한 총애는 네 부하를 향한 총애가 아니다. 이질을 향한 연심을 감추기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는다.]
“보스는... 리나가 아니라 이질을 귀여워했던 거야?”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질투심이, 원망이 가득 차 넘쳐흘렀다.
리나의 볼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는 보스를 사랑한다. 이질을 아낀다. 하지만 그들은 너와 같은 사랑을, 동료애를 품지 않았다. 한통속이 되어서 너를 속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 리나에게 사줬던 핑크로브는? 솜사탕은? 예쁜 단검과 암기들은? 사이즈에 딱 맞는 전투복은? 그건 보스가 리나를 사랑하는 증거잖아!”
[아니. 도구가 충성심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다루는지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지 않았는가.]
보스는 비정한 인간이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한다.
멸혼객의 실종조차도 그가 의도한 게 아니었냐는 의문마저도 도는 판국이다. 그런 와중에 연심을 부정당하고 보란 듯이 농락당했다는 말을 듣고 단번에 부정할 수 있을 리 없다.
리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 어떻게 해? 리나는 몰라.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죽이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걸.”
[그럼 죽여라.]
“보스를 죽이는 건 싫어.”
[괘씸한 부하라면 죽일 수 있겠지.]
“이질. 이질은 소중한 부하지만... 만약 괘씸한 몸뚱이만 믿고 리나를 가지고 놀았을 뿐이라면 용서할 수 없어.”
[그래. 바로 그거다.]
악신은 착실하게 공을 들여 리나를 세뇌하였다.
마법에 의한 세뇌가 아니다.
암시와 착각을 이용한 직접적인 세뇌다.
이 세뇌는 신성력으로도 지울 수 없다.
물리력으로도 없앨 수 없다.
마음을 도려내더라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악신은 몰랐다.
리나가 얀데레가 되면 어디까지 독해질 수 있는지를.
============================ 작품 후기 ============================
리나가 얀데레가 되어버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