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9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19)
시커먼 어둠이 잠시 리나를 뒤덮다가 걷혔다.
그 잠깐 사이에 리나의 눈빛이 변했다.
시커먼 무저갱처럼 죽은 눈을 보니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악신은 그 잠깐 사이에 리나를 얀데레로 만들었다.
CP를 투자하면 그런 집착과 정신병적 기질을 고칠 순 있다.
허나 그런 짓을 해버렸다간 그 뒤를 장담할 수 없다.
CP로 인한 투자에는 인위적인 인과가 부여된다. 얀데레적 기질이 사라지는 인과로서 정신이 붕괴되었다, 라는 시스템적 인과가 책정되면 리나는 그대로 백치가 된다.
그런 건 나로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얀데레가 싫다고 멀쩡한 부하 하나를 폐인으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쓰라린 경험은 한 번으로도 족하다. 머나먼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다시금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까짓것 얀데레면 어떤가. 다른 여자에 한눈만 안 팔면 되는 거다.
[인과에 개입하여 장난감을 망가뜨린 경험이라. 그거 참 값진 경험이로군.]
“닥쳐.”
[내게는 들린다. 요동치는 네 심장소리가.]
종말의 악신은 리나에게 수작을 부리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뭔가를 더 저지를 셈인가.
[신위라는 건 그저 힘으로 무식하게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비틀어 타락시킬 수도 있고, 피할 수 없는 시련과 숙명을 부여할 수도 있지.]
“내게 시련과 숙명이 통할 거라고 믿는가?”
[물론 네놈 자신은 당하지 않겠지. 그래서 기억의 편린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발견했지. 미궁 상층부에 잔류중일 네놈의 또 다른 부하를.]
상층부에 남겨두고 온 부하는 한 명밖에 없다.
“쿠로! 놈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거냐.”
[종말이 네놈을 멸할 수 없다면 네놈을 제외한 모든 것을 멸하면 된다. 지금부터 이 미궁의 중층부와 상층부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을 폭주시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되는가.]
“몬스터 웨이브!!”
[정답이다. 네놈의 부하들은 강하니 다소는 견딜 수 있겠지만, 고작해야 일개 파티로서는 미궁이 토해내는 무수한 몬스터를 모두 감당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단말에 깃든 신력뿐만이 아닌 본체의 신력과 인과율마저 소모될 텐데?”
종말의 악신은 냉엄한 어조로 단언하였다.
[네 수족을 꺾는 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악신은 이미 작정했다.
본체에서 다소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도 감수하고 있다.
이렇게 나온다면 설득도 교섭도 불가능하다.
[허나 종말을 앞두고도 한줄기 희망은 있는 법.]
[모두가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놈은 자비를 베푸는 것 마냥 당당하게 지껄였다.
당연히 호의에서 나오는 조언은 아니다.
[파티를 쪼개 전력의 일부를 위로 보내 탈출을 시키고, 올려보낸 파티원이 다시 밑으로 내려와 합류한 뒤에 전력의 일부를 위로 보내 탈출시키기를 반복한다.]
[최적의 균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전원생존도 가능하지.]
[물론 한 끝이라도 계산이 어긋났다간 전력이 약한 쪽은 단숨에 몰살당하겠지만.]
마치 강 건너기 게임과도 같다.
목표지점은 지상.
그곳까지 파티원들을 무사히 전부 옮기면 된다.
단, 위험요소인 몬스터는 옮길 수 없다.
순수한 실력으로 남겨진 자들이 막아내야만 한다.
강자를 올려 보내면 쿠로는 빠르게 안전해질 수 있다.
대신 중층부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고 약자를 올려 보내면 쿠로와 함께 죽을지도 모른다.
“터무니없는 판단력을 요구하는군.”
[그 정도 판단력조차 없다면 어떤 희생도 없이 종말로부터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지.]
“그 도전을 받아주지 않고 부하 한 명을 버린다면? 네놈은 막대한 신력을 잃을 뿐이니 나로서는 오히려 이득이라고 할 수 있겠군.”
나의 비정하기까지 한 선언에 종말의 악신이 멈칫했다.
놈은 알 수 있다.
지금 내뱉은 나의 발언은 명백한 진실이라는 걸.
필요하다면 부하 한 명쯤은 포기할 수도 있다.
카이사르와 리나라면 모를까.
쿠로는 유능하기는 해도 정까지 붙은 부하는 아니다.
종말의 악신은 나름 머리를 굴렸다.
[돌발퀘스트 ‘악신의 시험’ 발동!]
[종말의 악신은 인위적인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 당신을 종말의 시련에 빠뜨리고자 합니다. 반드시 모든 부하들을 살려서 미궁 밖으로 도주하십시오.]
[당신의 부하들 중에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로 전원이 미궁을 벗어날 시, 종말의 악신이 당신을 인정합니다.]
함정이다.
놈은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걸 먹음직스러운 미끼로 걸었을 뿐이다.
보기에야 좋지. 저건 먹을 수 없는 먹이다.
무는 순간 낚인다.
바늘에 꿰인 생선처럼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 거다.
그렇기에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였다.
다른 악신의 인정이었다면 무시했겠지. 그러나 종말의 악신은 특수하다.
고대신격을 자처하는 이 자는 기존 주류 12악신보다도 상위서열에 존재하는 게 틀림없다. 사실상의 서열 0위, 12악신의 정점에 군림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의 인정을 받는 건 엄청난 힘이 될 게 틀림없다.
“조건의 정정을 요청한다.”
[네놈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대로 뺏기지 않을 미끼라고 생각한다면 최고의 미끼를 걸어야지.”
[예를 들자면?]
“목표를 달성할 시 영구적으로 ‘사도’의 권능을 부여하며, 사도로서의 의무수행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이를 철회할 수 없음을 신격을 걸고 보증해라.”
항아리 위로 피어난 어둠에 열매처럼 붉은 입이 맺혔다.
놈의 입 꼬리가 찢어질 듯이 치켜 올라갔다.
[정정을 받아들이겠다.]
[목표달성의 보상은 영구적인 사도직위 부여. 의무는 없으며, 이 모든 사항을 신격을 걸고 보증한다.]
단말의 힘을 모두 소모하고 몬스터들의 광폭화를 마친 종말의 악신이 홀연히 사라졌다.
쨍그랑!
악신이 떠나자 리기아의 항아리는 곧장 박살났다.
“무시무시하군..”
“주인님과 재회하기도 전에 죽는 줄 알았어요.”
“낭군님은 저런 존재와 마주한 적이 있던 건가요...”
안도하기에는 턱없이 이르다.
“모두들 잘 들어라. 종말의 악신이 권능을 발현해서 미궁 상층부와 중층부 내에 초대형 몬스터웨이브를 일으켰다.”
“네에에!?”
“허나 중층부의 웨이브는 간단히 막아낼 방법이 있다. 반드시 지날 수밖에 없는 외길이 한 곳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자이크녀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봉인문이 있던 자리!”
“그렇다. 일단 두 명이 해당위치까지 직행해서 통로를 막고, 다른 한 명은 보다 위로 올라가서 쿠로와 합류해 상황을 알리도록 한다.”
“이동에 나설 인선 두 명은 어떻게 되나요?”
“청일과 도로시. 문을 지키는 건 도로시다.”
“앗! 도로시님은 적의 공격에 절대로 죽지 않으니까 봉인문을 틀어막고 있으면...”
그렇다.
절대회피가 가능해진다.
아무리 악신이라도 이런 경우는 예상할 수 없었겠지.
이건 오직 흑산회 파티만이 가능한 전략이다.
도로시는 마침내 2년간의 수련의 성과를 보일 때가 왔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자, 그럼 먼저 이동해라!”
“네!”
앞으로 한 시간 가량, 후미에서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떨쳐내며 대열을 갖추어 후퇴하면 본대에 해당되는 우리들도 무사히 봉인문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계획은 완벽하다. 내 계산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낭군니이임!”
“보스! 다시 마주칠 수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입니다.”
근데 진즉에 올라가야 했을 놈들이 같은 층에 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따졌다.
“뭐냐. 왜 아직도 이런 곳에서 꾸물거리는 거냐.”
“도와주세요!”
“길을 모르겠습니다!”
너희들도 길치였었냐!!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아서 엘프남들을 돌아보았다.
멍청한 두 게이머 새끼들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에이잇!”
우산으로 바닥을 퍽퍽 내려치려다 겨우 분을 가라앉혔다. 끓어오르는 속을 표현해봤자 보스가 화가 난 건지 재롱을 부리는 건지 분간도 못할 만큼 강한 녀석들이 파티원이다.
“레이브를 데리고 함께 이동해라. 이렇게 된 이상 쿠로와 합류하여 녀석도 봉인문 쪽에 오도록 해라. 그 뒤에 도로시만을 봉인문에 남겨두고 이쪽으로 합류하는 거다!”
레이브가 두 명을 봉인문까지 인솔하고, 쿠로를 찾아내고, 봉인문으로 돌아오고, 도로시를 남기고 이쪽에 합류하고, 그 뒤에 우리들을 봉인문까지 인솔하고, 마지막으로 지상으로 인솔한다.
좋아.
이걸로 대안이 완성되었다.
“잠깐만요! 제 비중이 너무 막대하지 않아요!?”
“너무 부담 갖지 마라. 실패하면 가볍게 전멸할 뿐이니까.”
“가볍게라도 하셔도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은데요!?”
레이브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이동을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는 소리만 내봤자 달라지는 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레이브 일행은 빠르게 멀어졌다.
이쪽은 버티기만 하면 된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데챠아아앗!”
“구아악!”
“갸아아악!”
빗발처럼 쏟아지는 몬스터들의 군세.
이조차도 중층부 전역의 몬스터들의 선봉에 불과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보스. 우선은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도로시를 위한 자기희생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
“저런 잔챙이들에게 죽을 정도로 가벼운 목숨은 아닙니다.”
유모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저는 도로시 아가씨가 아이를 낳고, 미궁의 끝까지 보스와 함께 탐사를 마치고, 일족의 저주를 해결한 뒤에 행복하게 수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그런가.”
“목표 달성기간으로 백년 정도는 여유롭게 잡았습니다.”
길어.
그거 너무 길다고.
“드래곤 슬레이어의 위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유모는 자리를 잡은 채,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흉곽을 부풀렸다.
사자후라도 내지르면서 적진을 뒤흔들려는 걸까.
“크롸롸롸롸롸!!”
아니었다.
유모의 입에서 냉기 브레스가 튀어나왔다.
전방의 통로와 함께 몬스터들이 대거 얼어붙었다.
드래곤슬레이어가 드래곤의 고유기술을 사용해도 되는 건가!?
심란한 내 속내를 알기나 할까.
유모는 당당하게 돌아와서는 승전을 보고하였다.
“적의 선봉을 전멸시켰습니다.”
“장하다 김유모. 세상을 네 손으로 멸망시켜버리렴.”
“네?”
“말이 잘못 나왔다. 악신을 상대하며 잔류마력이 쌓였나보다.”
“잔류마력은 주먹으로 때려서 없앨 수 있습니까?”
아니.
내 목숨은 주먹으로 때려서 없앨 수 있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다. 몬스터들에 의해 얼어붙은 통로가 깨질 때까지 전력을 비축한다. 나 또한 명상으로 잔류마력을 몰아내겠다.”
최대한 농성만 하면서 버티려는데 갑자기 리나의 인상이 무섭게 구겨졌다.
“보스는 리나의 것이야. 아무한테도 뺏길 수 없어. 보스는 리나의 것이야. 아무한테도 뺏길 수 없어. 보스는 리나의..”
“...리나?”
“보스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 리나가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깨끗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줄게. 리나 믿지?”
물이 피로 변했을 뿐인데 굉장히 무서운 멘트가 됐다.
감동적이기 이전에 소름 끼쳐.
게다가 저 눈, 완전히 얀데레 눈이 되어버렸잖아.
“진정해라, 리나. 너에게는 광역공격기가 없다. 여기는 유모에게 맡겨라. 네가 필요한 때는 손 많이 가는 강적이 출현하면 암살해야 하는 때이다.”
“거짓말.”
갑자기 리나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이질도 광역기는 안 배웠잖아.”
“걔 이름이 여기서 왜..”
아. 질투 플래그가 섰구나. 이제야 악신의 속셈을 눈치 챘다.
이대로 미궁을 탈출했다간 귀여운 부단주가 죽는다.
“잠깐. 어째서 이질이 광역기를 배우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어...? 이질이... 정말로 광역기를 배웠어?”
“그렇다. 그 녀석이 광역기를 모른다는 건 네 착각이다.”
여기선 적당히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고, 지상에 돌아가거든 잽싸게 하급 광역기 비급서 하나라도 건네줘야겠다. 이렇게 하면 리나도 납득할 수 있겠지.
“이질이 어떻게 광역기를 알아? 리나는 가르친 적 없는데.”
“내가 가르쳤다.”
“어째서 귀여운 리나는 가르치지 않고 이질에게만 가르쳤어?”
시발.
지뢰 밟았다.
============================ 작품 후기 ============================
오빤 멀 잘못했는지 정말로 알기나 해??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잖아! 빼액!
됐어. 아무말도 하지 마.
3단 콤보 넣으려다가 앞이 깜깜해져서 절제했습니다.
넘나 현명한 절제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