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0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20)
나는 최선을 다해서 약을 팔았다.
“이질은 멍청하기에 내 교육이 필요했다. 재능이 없는 아둔한 녀석들은 직접 가르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넌 이 내가 가장 총애하는 부하이자 동시에 천재가 아닌가.”
“리나는 광역기를 깨닫지 못했는걸. 그럼 보스는 평소에 리나가 멍청하고 아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다르다. 오히려 기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네가 깨우칠 광역기는 그만큼 강력한 것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으니까.”
리나의 눈이 섬뜩하게 변했다.
[리나가 <심안:암살자>로 당신의 내심을 간파하려 시도합니다.]
[동기화 비율 1% 특전 발동]
[리나는 당신에게서 어떠한 감정이나 사고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완벽한 무념무상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다행히도 거짓말이 들키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이 내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보스는 언제나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리나?”
“보스는 정말로 리나를 총애하는 거야? 믿고 싶은데, 믿고 싶지만... 이제는 증거가 필요해!”
“뭐?”
“보스가 리나를 총애하는 증거를 보여줘!”
이런! 3차 호감도 락까지 풀렸으니 호감도가 높아서 이 이벤트는 절대 발동할 리 없다고 믿었건만.
기어이 [신뢰의 증거]이벤트가 발동하고 말았다.
보스를 향한 불만이 커질 때, 하수인이 불만의 크기에 따라 대량의 호감도나 충성도를 저당으로 잡고 신뢰의 증거를 보이라고 하는 이벤트다.
달성시키면 해당 부하는 안심하고 충성을 유지한다. 불충분한 증거를 보이면 의혹은 유지되며 부정적인 감정이 남는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거나 전부 부정당하면?
관계는 파탄 나고 최악의 경우에는 부하가 이탈하거나 적으로 돌변하기까지 한다.
카이사르의 빈자리를 감당할 유일한 부하를 잃으면?
난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내게는 리나밖에 없다.
그 사실을 리나도 깨닫게 해야 한다.
[돌발 이벤트 ‘신뢰의 증거’ 발동!]
[종말의 악신은 리나의 마음속에 커다란 불신의 씨앗을 심어두었습니다. 씨앗은 이제 막 싹이 튼 단계입니다. 완전히 자라나기 전에 리나를 당신의 품에 휘어잡으십시오.]
[이벤트 성공 시, 리나의 의심은 거두어집니다. 부분적인 성공 시, 의심과 부정적인 감정이 유지됩니다. 실패 시, 리나는 통제불가능한 중립 내지는 적대 NPC로 관계가 변화합니다.]
나는 최대한 상냥한 느낌이 나도록 말했다.
“리나. 너와는 카이사르 다음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하였다. 2년 전 어느 날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너는 카이사르 다음으로 소중한 나의 두 번째 부하라고.”
“그건...”
“역시 기억하는군. 그때의 말은 결코 허언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결코 부하들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내 사전에 거짓은 없다. 설마 이 나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리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때의 보스는 믿어. 그렇지만 지금의 보스는 못 믿어.”
“!”
“과거의 총애는 사실이었을지 몰라.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때는 없었고 지금은 있는 중대한 변화가 있으니까!”
리나는 대뜸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질! 보스는 그 년이 나타난 뒤로 달라졌어!”
“내가? 달라져?”
“이질이 있으면 보스는 언제나 이질을 빤히 쳐다보잖아. 예전에는 리나를 그렇게 쳐다봤었는데!”
그거야 걔가 귀여우니까 그러지.
반면에 넌 귀여운 맛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고.
아니, 이건 너무 쓰레기 같은 생각인가.
“그건 이질이 모자란 녀석이기 때문이다. 모자라고 부족한 녀석이 불안하니 지켜보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리나는 지켜볼 필요도 없을 만큼 성장했다는 거야?”
“그렇다.”
나는 확신했다.
이 정도로 돌려서 칭찬했으면 사르르 녹는 게 여심이다.
“리나는 이제 키도 가슴도 자라지 않고 키우는 맛도 없으니까 이질에게 한눈을 팔겠다는 거잖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싸이코의 사고회로는 일반여성과 다르다.
일반여성의 사고를 기준으로 리나를 대한 게 실수였다.
싸이코의 사고회로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는 평상시에 카이사르랑 리나를 대하는 방식을 떠올렸다.
“입 닥쳐. 그냥 내 명령을 이행해.”
“!!”
“넌 내가 가장 총애하는 부하다. 그 말을 믿고 잠자코 따라라.”
리나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당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역시 보스는 리나를 그저 도구로 생각한 거였어?”
아니 시발.
왜 갑자기 거기서 일반여성의 사고회로를 따르는 건데.
방금 전까진 싸이코 회로였잖아.
“다르다! 에이잇, 말로는 도저히 들어먹지를 않는군. 그 증거라는 녀석을 보여주지!”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리나의 턱을 손으로 붙잡았다.
리나는 흠칫 놀라면서도 반항하지는 않았다.
아직 내 손길을 거부할 정도로 불신이 커진 건 아닌가보다.
그렇다면 되었다.
대 리나전 전용 필살기 ‘턱 쓰다듬기’를 발동한다!
“우읏...”
리나는 눈물을 흘렸다. 예쁘게 흘리는 가식적인 눈물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볼썽사나운 눈물이 마구 흘러넘쳤다. 역시 애정의 손길을 받고 그간의 추억을 떠올렸나보다.
“이제껏, 흐끅. 보스에게 포상 받을 때마다, 흐끅. 기뻤었는데, 좋았었는데, 흐으윽.”
그래. 이제 지난날의 추억을 토대로 잠깐의 방황은 접어두고 예전처럼 순종적인 리나로 돌아가는 거다.
말만 잘 들으면 얼마나 좋아?
좋은 무기도 사주고, 이렇게 턱도 간질여주고. 가끔 기분이 좋으면 공개적으로 암살을 허가해주기도 하잖아.
“이제는 알아. 보스가 턱을 쓰다듬는 행위의 의미를...”
“뭐?”
“기르던 개에게 먹이를 주듯이, 리나가 원하는 애정을 툭 던져주었을 뿐이었어... 이런 건 진짜 애정이 아니야...”
“다르다! 나는!”
“보스는 그저, 그저... 리나를 이용하려고 했을 뿐이었어!”
꽈과광...!
[경고. 경고. 리나의 충성도가 마이너스 성향에 의해 급격히 돌변하려는 징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리나와의 관계가 파탄나기 직전입니다.]
[시급히 리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 경우, 리나가 흑산회에서 이탈할지도 모릅니다.]
리나는 싸이코다.
그렇지만 동시에 일반여성이기도 하다.
그녀에게도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 정도는 있었다.
동기화 비율 1%.
지금까지는 편리한 도구로 사용해왔지만 그것이 처음으로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졌다.
모든 감정과 사고가 배제되고 만다.
진심을 꺼내도 알아주지 못한다.
비정한 흑산회 보스니까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게 당연한 몸이 되었다.
이대로는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진심으로 여겨질 수 없다.
‘이 나를 여기까지 몰아붙이다니.’
멸혼객을 상대할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두 악신을 상대할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오직 리나만이 내 최강의 무기를 최악의 약점으로 만들었다.
역시 내가 인정한 부하다운 녀석이다.
녀석이 갈망하는 것은 나의 진심.
거기에 답하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동기화 비율의 억제를 포기한다.’
허나 한 번 억제를 풀어버리면 두 번 다시 같은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에는 방어기제(防禦機制)라는 게 있다.
스트레스 및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적인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속이면서 대체하는 양식이다.
나는 이 방어기제를 이용해서 동기화 비율을 강제적으로, 인위적으로 억제해왔다. 진심이 되어봤자 어설프기만 한 몸을 포기하고, 거추장스러운 감정을 죽였다.
마치 진짜배기 암살자처럼.
게임을 향한 재미 하나를 제외한 모든 감정을 인위적으로 말살했다. 고통도 슬픔도 외면하며 싸이코처럼 활동했다. 그러면 부하들의 죽음에도 이입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뼈저린 실패를 겪어도 다음 모험을 떠날 수 있으니까.
시트지가 찢기면 새 시트지를 만들 수 있으니까.
“그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군.”
“보스...?”
“나는 비겁한 녀석이었다. 내 안의 모든 약점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슬리는 모든 감정을 죽였다. 죽일 수 없는 감정은 남에게 떠넘겼다.”
카이사르와 리나를 싸이코 같은 새끼들이라고 여겼던 것.
그건 <방어기제 : 투사>일 뿐이다.
자신이 지녔으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타인의 특성으로 돌려버리는 거다. 내 안의 양심이 거슬리지 않도록 싸이코스러운 면모는 전부 부하들에게만 떠넘겼다.
“쓰레기 같은 명령을 내리며 부려먹고는 돈 몇 푼과 수고스럽지도 않은 간질임 따위로 대체하는 것. 그것 또한 알량한 속죄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간간히 보여주었던 부하들을 향한 애정 아닌 애정.
그것도 <방어기제:철회>에 불과하다.
내 명령을 수행하며 손을 더럽힌 부하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이를 속죄하기 위해 행한 정신적인 방어활동일 뿐이다. 리나를 향한 애정의 근본에는 그런 비틀린 마음이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음을 허락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미궁을 공략한다. 그것만은 사실이지. 그렇기에 더욱 편리하게 그 사실을 이용해왔다.”
미궁공략을 위해 부하들에게 진심이 되지 않고, 예전처럼 깊은 관계를 쌓지 않는다.
그마저도 <방어기제:합리화>의 일환이다.
진심으로 대한 부하들을 잃는다는 쓰라린 경험을 반복하지 않고자 택한 자기기만적인 정신방어다.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 약한 마음에서 비롯된 결과다.
“미궁공략. 진지하게 임한다면 전멸은 피할 수 없다. 거의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 사지에 부하들을 끌고 들어간다.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보, 보스...?”
“이게 네가 알고자 했던 진심이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내 감정이며, 사고이고, 내 모든 것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동기화 비율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2%... 5%... 10%...]
방어기제는 원한다면 언제나 부활시킬 수 있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나약하고, 한 번 무너진 벽을 다시 쌓는 건 불가능하다.
벽이 없는 정신은 모든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그것이 무너지면 틀림없이 망가진다.
다음은 없다. 아마도 이번 회차의 플레이는 내 게이머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도전이 될 것이 틀림없다. 성공하던 실패하던 이번이 마지막이다.
[10%... 20%... 30%...]
리나의 눈에 경악어린 감정이 차올랐다.
“보스가, 점점 약해지고 있어...?”
“비정무비한 자만이 진정한 강함을 얻을 수 있지. 감정을 추구한 이상, 나는 이제 강함을 상실하였다.”
“아, 안 돼! 리나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히끅!”
나는 두 눈에 단단히 힘을 주어 리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슬며시 지어지는 미소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너는 내가 두 번째로 총애하는 부하다. 그런 부하의 충심을 지키기 위해 힘을 포기하는 게 무어가 나쁘다는 거냐.”
“!!”
“이질. 그 녀석이 조금 귀여워봤자 부하의 부하에 지나지 않는다. 더러운 뒷골목을 돌아다니던 시절부터 함께 해왔던 너보다 가치 있다고 여길 것 같은가.”
나는 다시금 리나의 턱을 붙잡았다.
지금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던 부드러운 감각이 와 닿았다.
온기가, 체향이, 떨리는 진심이 느껴진다.
[50%... 75%... 90%...]
본능에 의해 억제되어왔던 감정과 행동이 낱낱이 풀려난다.
혹독한 겨울처럼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린다.
본능에 동기화되는 행동이 억제 없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투박하고, 형편없고, 미숙한.
그런 내 진심으로 리나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너는 이 정도로 내게 총애 받는 부하다. 이 증거를 받아들이겠는가?”
리나는 고개를 숙이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발 이벤트 ‘신뢰의 증거’ 완료!]
[리나는 당신이 제시한 증거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당신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얀데레의 폭주는 동기화 비율이라는 제물을 통해 간신히 가라앉았습니다.]
[종말의 악신의 함정에서 벗어난 결과, 리나가 당신에게 품은 충성 및 호감이 초 대폭 상승합니다.]
앞으로의 플레이는 보다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내가 선택한 길이다.
“두 번 다시 널 울게 하지 않겠다. 그러니 너 또한 맹세해라. 절대로 날 배신하지 않겠노라고.”
“당연하지! 리나는, 리나는... 이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반드시 보스를 지켜 보이겠어!!”
남자라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는 법.
진정한 플레이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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