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2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22)
리나와 유모가 중층부 깊숙이 진출하는 사이, 우리는 어떠한 습격도 받지 않고 얌전히 제 자리에서 대기했다.
“보스! 지금 막 쿠로와 합류하고 돌아왔습니다.”
“적은 어디입니까?”
“없다.”
“네?”
“없다고.”
벙찐 쿠로랑 청일을 데리고 그대로 봉인문에 올라갔다.
도로시도 얼빠진 표정을 짓는 건 마찬가지였다.
“낭군님. 몬스터가 안 오는데 어째서죠?”
“리나가 전부 쫓아냈다.”
“네?”
“덤으로 현재는 추격 중이다. 유모는 리나를 지키고자 함께 미궁 깊숙이 내려가고 있다.”
“그럼 저희는 뭘 해야 하죠?”
뭘 하긴 뭘 해.
“미궁 밖으로 나가라. 상층부에 있던 몬스터들 중 상당수가 미궁도시로 빠져나가서 상당한 소요사태가 발생했을 거다. 몬스터웨이브의 본대는 이쪽에서 저지했음을 알려라.”
“인원은요?”
“레이브와 도로시, 청일. 셋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돌아간다. 악신의 신전을 찾는 일도 더 이상은 필요 없으니 쓸모없는 두 사제도 같이 데리고 나가라. 그쪽은 모자이크에게 맡긴다.”
이걸로 귀찮은 짐덩이는 전부 올려 보냈다.
“우리는 리나와 유모와 합류하여 탈출한다.”
“엑.. 그렇게 간단하게 나가도 괜찮은 건가요? 뭔가 악신과 연관된 항아리도 깨지고 이런 저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낭군님이 뭔가 달라진 것 같아요.”
“별건 아니고 힘을 조금 잃었다.”
“네에에!?”
“설명하기는 귀찮으니까 잠자코 따라와라.”
지리멸절하게 보내던 시간은 끝났다. 신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이제부터는 최단시간 내에 남은 부하들과 합류하고 미궁에서 탈출한다.
* * *
브람 시는 발칵 뒤집어졌다.
갑작스레 미궁의 난이도가 급상승하더니 상층부에서 중층부 몬스터들이 출현했다. 심지어 몬스터웨이브마저 잇달아 터졌다. 그러는 와중에 흑산회 파티는 미궁에 진입한 상황이다.
멸혼객과 카이사르에 이어서 빌헬름 마이어마저 죽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며 지상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빌헬름 마이어가 죽었다는 소문이 만연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정권교체를 노리고 모험가들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킬 적시가 아닙니까?”
“하인즈 대마법사의 파벌은 극심한 내정에 시달리느라 정보입수가 한 발 늦었습니다. 저쪽이 동요하는 지금만이 기습에 나설 유일한 기회입니다.”
“길드장님. 서둘러 결단을!”
모험가길드 길드장 테켈리.
그는 극도로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직 미궁에 내려간 정예파티의 보고가 없다.”
“그걸 기다려서는 늦습니다!”
“반역을 일으킨 뒤에 빌헬름 마이어가 살아있음이 밝혀진다면. 그때는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는가?”
부추기는 말을 내뱉던 파벌 구성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책임을 묻겠다는 시선 앞에서 모두가 안색이 핼쑥해졌다.
테켈리는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차고는 팔짱을 꼈다.
“보고가 올 때까지 대기한다.”
상층부 몬스터의 전력이 막강해진 탓에 이번 몬스터웨이브는 유난히 거셌다. 상층부의 계층보스 파라오를 토벌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게 살아있었다면 수천 명은 죽고도 남았다.
분하지만 빌헬름 마이어의 미궁공략 정책이 브람 시의 안위에 큰 보탬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몬스터웨이브가 간신히 멎을 무렵, 미궁에서 두 무리의 생존자들이 등장했다. 한 무리는 정면으로 몬스터웨이브에 휩쓸려서 파티가 궤멸하다시피 박살 난 정예파티였다.
“길드장!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은 없었지 않았는가!”
“부하들이 잔뜩 죽었다고. 이 일을 어떻게 보상할 셈이지?”
“입 닦고 모르는 체 했다간 재미없을 줄 알아.”
수석사냥꾼과 번개주교, 거대골렘술사가 으름장을 놓았다.
테켈리 길드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빌헬름 마이어는. 암살은 성공했나?”
“될 리가 없잖아! 쿠로라는 녀석이 모험가킬러들을 동원해서 길목을 틀어막고 감시하다가 밑으로 내려가고, 지형지물이 바뀌고 별 소란이 다 일어나다가 대량의 몬스터가 들이닥쳤다고.”
“결국 빌헬름 마이어가 숨긴 비장의 무기도 찾지 못한 채 달아나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단 말이다.”
비장의 무기. 예상치 못한 한 마디에 테켈리 길드장의 관심이 급격히 쏠렸다.
“비장의 무기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상층부에 남겨진 놈들이 인위적으로 변화한 미궁 상층부에서 일정지역 내부를 샅샅이 수색하는 행동을 보였다.”
“역시 미궁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숨어있다는 건가... 빌헬름 마이어. 한 걸음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면 몇 걸음씩 앞서나가는군.”
침음을 흘리며 괴로워하기도 잠시.
길드장은 핵심을 깨달았다.
“결국 너희들은 밑에 내려가서 아무것도 못하고 온 거로군.”
“아무것도 못하지는 않았다!”
“쿠로라는 녀석이 내려갈 때, 흑산회의 다른 파티원이 와서 분명 이런 말을 했던 걸 들었다. 악신의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서 당장 지원이 필요하다고.”
벌떡!
길드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왜 그 말을 먼저 하지 않았는가!”
“안 물어봤잖아.”
“이런 무능한 새끼들을 봤나. 썩 꺼져!”
“보수부터 내놔!”
“패배자들에게 지급할 보수는 없다. 의뢰내용은 분명 빌헬름 마이어의 사살과 악신의 교단들의 세를 줄이는 것. 전자는 실패했고 후자에서는 무슨 성과를 거두었지?”
파티장들은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그 악몽 같은 몬스터웨이브를 뚫고 왔다고.”
“귀중한 정보를 전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식으로 홀대했다간 크게 후회하게 될 거야.”
테켈리는 멸시어린 시선으로 파티장들을 내려 보았다.
무능한 사냥개들에게 줄 먹이는 없다.
“꺼져라. 오늘 이후로 이 도시에서 너희들이 발견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길드 전체에 수배령을 내려주지.”
테켈리 길드장의 권력은 확고하다.
무력으로 맞서봤자 휘하의 강자들이 상대할 뿐이다.
파티장들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모험가 길드에서 나왔다.
“이제 어쩌지? 죽은 부하들의 유족들에게 지급할 피해보상비조차도 없어.”
“여기서 쫓겨나면 다른 미궁도시까지 이동해야 하고.”
“치료비를 생각하면 다른 도시로 갈 여비조차도 없어. 쓰던 무기도 팔아서 돈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이지.”
국왕 암살이라는 중대한 의뢰를 받은 게 무색하게도 그들은 완전히 망해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암살을 속행해봤자 유모와 만나 좌절할 게 뻔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인 결과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입장이기에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복수해야겠어. 테켈리 녀석에게 한 방 먹이자.”
“어떻게?”
“빌헬름 마이어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반대파벌과 공무기관에 알리자. 덤으로 모험가길드에서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 시도했다는 제보도 하는 거지.”
“그거 좋군!”
“이왕이면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으니 치료비와 무기 수리비를 달라고 요구하고, 내친김에 테켈리에 대한 거짓진술을 하는 대가로 사례금도 두둑하게 챙겨야겠어.”
세 파티장들은 곧바로 하인즈 대마법사 파벌을 찾아갔다.
소식을 들은 자들은 당연히 발칵 뒤집어졌다.
“뭣이!? 그 공포군주가 미궁에서 위기에 처해? 확실히 이 정도의 몬스터웨이브라면 미궁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할 게 없지만... 정말로? 그 공포군주가?”
“테켈리 녀석은 예전부터 꺼림칙했었지. 설마 의도적으로 국왕폐하의 위기를 감추고 정보를 통제하려 들다니.”
“당장 테켈리를 구금하고 국왕폐하를 구출하기 위한 원군을 파병해야 한다!”
하인즈는 파벌 구성원들의 구원요청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전의 빌헬름 마이어라면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의 그는 권력을 양도하기도 했다.
빌헬름 마이어의 숙원은 미궁정복.
이 사실에 변함이 없다면 그가 죽도록 외면할 수는 없다.
미궁은 시시각각 위험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연합기관과 경비대가 연계하여 지상에서는 테켈리 길드장을 구금하고, 미궁으로는 원군을 파견한다!”
하인즈 대마법사의 신속한 지시에 정예파티 파티장들도 안도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복수가 이루어지고 보상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안도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하인즈 대마법사는 미처 그들이 예상치 못한 요구를 했다.
“몬스터웨이브를 뚫고 지상에 올라올 정도의 실력이라면 능히 길 안내를 해낼 수 있다고 믿소. 부디 그대들의 미궁지식으로 구출활동이 온전히 이뤄지도록 도와주시오.”
“싫습니다. 우리는 많은 부하들을 잃었고 휴식이 필요합니다. 약속했던 자금만 건네주십시오.”
“구출이 성공하면 사례비를 세 배 더 지불하겠소. 허나 구출에 협력하지 않는다면 사례비는 단 한 푼도 지불할 수 없소.”
이미 브람 시를 양분하는 두 파벌 중 하나인 테켈리 파벌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적대관계가 된 그들이다. 여기서 다른 하나인 하인즈 파벌에게까지 찍혔다간 뒤가 없다.
파티장들은 거대조직의 힘으로 복수를 갚는다는 꾀에 자신들이 고스란히 넘어가고 말았다.
본전이라도 뽑겠답시고 나선 행동 덕분에 사지나 다름없는 미궁에 제 발로 다시 진입하게 되었다. 그나마 삼백 명에 달하는 병력과 함께 이동한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았다.
하루. 이틀. 일주. 이주.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한 달이 경과했다.
몬스터 웨이브가 끝난 직후이기에 출현하는 몬스터가 적었던 탓에 탐사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급변한 미궁 속 생태계에 적응해 중층부에 진입할 수 있었다.
단순한 진입뿐만이 아니라 무려 B19층까지 쾌속의 진격을 거듭할 수 있었다.
허나 여태까지 무수한 몬스터들의 시신이 발견되고 이를 둘러싼 하급 몬스터들의 쟁탈전이 벌어지는 광경은 목격했어도, 흑산회 파티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죽은 건 아닐까?”
“시체를 봐. 아직도 잔뜩 쌓여있다고.”
“분명 이보다 깊이 들어간 거야.”
이 앞으로 자리한 층은 B20층.
중층부의 마지막 층이다.
동시에 계층보스가 대기 중인 보스 스테이지이기도 하다.
2년에 걸쳐 B10층의 파라오를 넘지 못해 죽은 모험가들의 수를 합치면 수백 명도 가뿐히 넘었다. 미궁 상층부의 계층보스마저 그러했는데 중층부는 어떠할까.
모두가 두려움을 품으며 B20층에 진입하였다. 이번 플로어는 장대하게 펼쳐진 협곡과 거대한 폭포수, 그 아래로 흐르는 광대한 호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심신이 맑아질 것만 같은 시원한 물소리가 들렸지만 구출대는 눈앞의 광경에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단순히 두려움을 느끼는 정도를 넘어서 압도되기까지 했다.
“뭐야, 이게.”
물은 시리도록 하얀 빛도, 맑고 푸른 쪽빛도, 영롱한 에메랄드빛도 아니었다.
피처럼 붉은 적색을 띄고 있었다.
폭포수의 위아래를 막론하고 필드 전역에 피비린내와 시체 썩는 내가 진동을 했다.
“흐에엑! 물속에, 물속에 시체가!”
“허어억! 바, 바닥이 전부 시체로 잠겼어!”
“대체 어떤 괴물이 살기에 이런 마경이 이루어진 거야?”
구출대는 진지하게 퇴각을 고민하였다.
이런 지옥 같은 광경 속에서 흑산회 파티가 살아있을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더 탐사하기 쫄려서 돌아왔습니다. 라고 상부에 보고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일단은 생색내기를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탐사를 진행했다.
탐사는 쓸데없이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흉흉한 분위기와는 별개로 B20층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마치 모두가 버리고 떠난 폐허에 발을 들인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불안한 발걸음을 옮겨 수색을 하는 사이, 정예파티 파티장들이 은밀하게 모여 긴급회의를 했다.
“도적단 놈들이 빌헬름 마이어에게 잡혔었잖아. 만일 녀석들이 우리들에 대해 정보를 실토했으면 어쩌지?”
“빌헬름 마이어를 찾는 날이 우리들의 제삿날이겠군.”
“절대로 이번 탐사에서 도움이 되면 안 되겠어.”
암묵적인 합의를 마치고 일어나는데 수석사냥꾼이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악!! 위!! 위에!!!”
“뭐, 뭐야!?”
“헉!! 미친... 이거 플로어보스 아니야?”
세 사람은 목이 절단되고 몸통에 손바닥 모양으로 구멍이 뚫린 거대한 라미아 석상을 목격했다.
B20층의 계층보스는 살해당했으며, 몬스터들은 몰살당했다.
역시 이런 미친 파괴력을 지닌 흑산회 파티와 마주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명하지 않았다.
“헉! 모두 여길 봐주세요!”
“아차!”
비명소리가 너무 컸던 탓인지 구출대원들이 모여들었다.
주변의 대원들이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급히 쏘아올린 신호탄을 보고 구출대가 모두 모였다.
수석사냥꾼을 책망할 수는 없었다.
놀란 건 그들 모두 마찬가지였으니까.
번개주교는 임기응변으로 입을 털었다.
“이건 계층보스가 아닙니다.”
“예? 이렇게 거대한 녀석이 잡몹이라는 겁니까?”
“다른 층의 플로어보스입니다. 몬스터들의 시체를 보면 중층부 전역의 몬스터들이 이쪽으로 도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으음. 일리 있는 주장이야.”
“여하튼 무시무시한 시체에 무시무시한 격파흔적임은 변함없군. 역시나 당대 최강의 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빌헬름 마이어다워. 일수에 몸통을 파괴하고 다음 수에 목을 베었잖아.”
번개주교의 구슬림은 성공했다. 파티장들은 구출대의 관심이 계층보스 사망이라는 사실에 쏠리며 흑산회 파티의 생사를 낙관하는 사태를 조금이나마 감소시켰다.
거대 라미아 석상에 관심을 유지하는 건 골렘재료로 쓸지 고민하는 거대골렘술사나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려고 모여든 이들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목격할 수 있었다.
철컥
드르르르륵
거대골렘술사가 만지작거리던 몸체가 활짝 열리며 감추어진 비밀문이 개방되는 것을.
‘뭐하는 짓이야!? 왜 수색을 돕는 건데!?’
이건 에드리브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구출대는 발칵 뒤집혔고 다시금 비밀문 앞에 모여들었다.
“미친. 이 사람들은 몬스터 웨이브에 휩쓸린 거야, 아니면 몬스터를 학살하고도 여력이 남아서 더 진출한 거야?”
“아무래도 후자 같은데.”
“젠장. 미궁탐사 초행길에 하층부까지 내려가게 되다니. 이런 건 농담도 못 된다고.”
구출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미궁 하층부에 진입해야만 했다.
“혹시 하층부의 계층보스까지 잡혔으면 어떡하지?”
“에이, 설마.”
“거기가 뚫리면 다음은 심층지대라고.”
하하 호호 웃으며 나누던 대화가 언제부턴가 뚝 끊겼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농담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흑산회 파티는 이 나라 최강의 파티. 그 괴물들이라면 심층지대에 진출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제 정신인 사람들이라면 대뜸 상층부부터 심층지대까지 직행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 파티에는 제정신인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얀데레 + 여래신장 = 몰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