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5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 =========================
#7 - 악신이여 나를 인정하라(25)
테켈리 길드장은 거짓말처럼 돌변해버린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달이나 소식이 없어서 죽은 줄로만 여겼던 빌헬름 마이어가 생환하고, 게다가 현인신으로 즉위를 하다니.
저급한 헛소문이라 여겼던 게 모두 진실이라고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를 구금하던 경비대 또한 물밑에서 세력을 움직여가며 테켈리를 지지하던 참이었다. 노회한 정치인 하이칼 경비총장마저도 진즉에 그와 손을 잡은 참이었다.
구구구구궁...
그 선택을 진심으로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켈리 길드장도, 하이칼 경비총장도 전신의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초대형 허리케인이 접근하는 것처럼 대기가 진동하며 온 세상이 무겁게 짓눌렸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은 순식간에 무자비한 진동과 중압으로 이어졌다.
온다.
지금까지와는 격을 달리하는 괴물이 온다.
일개 인간의 몸으로 절대지경을 넘어서 초월지경, 나아가 신위까지 이룬 존재가 몸소 행차한다. 싸워서 이긴다는 생각은 감히 생각으로도 품을 수 없다.
도망쳐야 한다.
헤일이나 지진, 화산폭발과 싸우려고 하는 인간은 없다. 대재앙에 맞서 검을 휘둘러봤자 한 순간에 휩쓸려나가 즉사할 뿐이다. 빌헬름 마이어의 존재감은 마치 재앙과도 같았다.
“빌헬름 마이어를 죽으면 황금 열 관을 내려준다고? 미쳤군! 인세에 다시없을 재앙과 맞서 싸우라고 한다면 황금으로 성 열 개를 가득 채워서 주더라도 거절한다!”
“레드그리드 검문의 정예고수들을 이런 곳에서 허비할 수는 없다. 전부 물러간다.”
“테켈리 길드장의 위세도 오늘까지다. 몰락할 세력에 함께 할 의리는 없지. 위약금이라면 얼마든지 물어주마. 오늘이 지나고도 네놈의 숨이 붙어있을 수 있다면.”
테켈리가 두른 인의 장벽이 무너진다. 강력한 모험가도, 검문의 고수도, 외국의 용병도 망설임 없이 그를 떠난다.
잡을 수는 없다. 도망칠 수도 없다.
소름 끼칠 정도로 섬뜩한 기운이 사방에서 그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제야 테켈리는 떠올릴 수 있었다.
2년간의 압정.
무수한 정적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빌헬름 마이어를.
그런 그가 순순히 권력을 내려놓고 하인즈에게 양도한다?
수상하다고 생각했어야만 했다.
반드시 감춰진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간파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반역이라. 꽤나 간 큰 짓을 저질러주었군.”
이 남자가 두려웠기에. 미궁에 내려가고 몬스터 웨이브가 벌어진 지금만이 유일무이한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두려움이 이성을 날리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빌헬름 마이어가 지닌 [공포의 사도] 특성은 그에게 적대적인 모든 존재들에게 자동적으로 공포심을 품도록 하는 효력이 있으니까. 심지어 위력도 적개심에 비례해 강해진다.
자신이 한없이 미천한 격하(格下)의 존재로 여겨지도록 만드는 존재감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빌헬름 마이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절대고수다.
그런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다.
절대고수이던 시절에도 그토록 두려웠던 존재가 이제는 아예 신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알고 싶지도 않다.
“테켈리 길드장. 인간에게는 향상심이라는 게 있다. 야망을 품고 높은 곳을 추구한다. 그것은 생명체로서 보다 나은 위치에 올라서고 싶다는 건전한 욕구이다.”
“아, 아으,”
“나는 네가 품은 욕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기질에 따라서 욕망을 품지 않고 살 수도 있지만, 한 번 품은 욕망을 외면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아으으, 으아아,”
“그런 어리석음을 징벌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강자가 품는 본능과도 같다. 자신의 자리가 시험받는 순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는 행동은 한없이 어리석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지.”
빌헬름 마이어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테켈리 길드장의 입가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강자가 지닌 힘이 강할수록 빼앗길 권리의 크기 또한 커진다. 네놈이 빼앗고자 했던 권리는 흑산회의 보스, 마이어 왕국의 국왕, 흑산회 진영의 수장 자리였었지.”
“으아아아아!”
“그리고 이제는 천상과 미궁을 통틀어 온 세상을 품고자 하는 신들과 나란히 격을 세운 현인신이다. 대륙을 삼분하는 세 개의 진영 중 하나를 지배하는 수장 따위는 압도적으로 넘어섰지.”
“아아아아악!! 오, 오지마아아아!!”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며 애원해도 소용없다. 네놈이 치러야 할 대가는 이제 신에게 맞선 자의 말로로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이다. 네놈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거다.”
빌헬름 마이어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테켈리 길드장의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졌다.
“네놈에게 허락된 인간다운 삶은 이제 끝났다. 너는 영원히 죽음을 반복할 것이다. 온갖 형태의 죽음을 체험하고, 고통에 적응하지 못하도록 감각은 되살아날 것이다.”
“꺽! 크억!!”
“십년. 백년. 그런 어설픈 단위를 떠올려서는 안 된다. 너는 이 세계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반복되는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무한한 죽음의 시작이다.”
빌헬름 마이어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테켈리 길드장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세 걸음.
불과 단 세 걸음 만에 테켈리 길드장의 머리는 하얗게 새어버리고, 전신의 피부가 쪼그라들었다. 극심한 공포가 모든 생명이 품고 있는 진기를 소진시켰다.
빌헬름 마이어는 테켈리의 심장에 주사기를 박아 넣었다.
헤오라츠 후작을 좀비로 만들었던 브루투스의 특별제조약 047번, 좀비화의 약을 액체 상태로 주사기에 담아 직접 투여한 것이다.
물론 약의 성능은 월등히 개량되었다. 지난 2년 간 브루투스는 흑산회의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무수한 연금술 실험을 진행하고 그에 걸맞은 성과를 얻었다.
연금술 숙련도는 비약적으로 상승했으며 모든 약효가 이전에 비해 급격히 상승하였다.
좀비화의 약을 복용해도 이제는 실제 사람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유지할 수 있고, 인간의 언어도 구사할 수 있다. 부활의 대가로 사멸하는 세포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친위대. 놈을 지하뇌옥에 가둬라.”
“예!”
하이칼 경비총장에게는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극도의 공포를 견디다 못해 검으로 제 목을 쳐버려서 자살했으니까. 그러나 좀비화의 약의 약효는 강력했다.
잘린 목을 몸통에 붙인 뒤에 약을 주입하자, 끊어진 신경다발이 이어지고 뼈가 붙으며 재생하였다. 죽음으로도 빌헬름 마이어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한 하이칼을 내려다보며 빌헬름 마이어는 차갑게 조소하였다.
“그 정도 죽음으로는 내 손을 피할 수 없다. 정녕 내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육체와 영혼이 단 하나의 파편조차도 남지 않은 상태로 모조리 사멸할 정도의 각오를 보여야지.”
“아, 악마다!!”
“이런. 가엾은 하이칼이여.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빌헬름 마이어는 한쪽 입매를 비뚜름히 치켜 올렸다.
“나는 악마보다 더한 존재라는 걸.”
빌헬름 마이어의 적대파벌은 하루아침에 모조리 몰락하였다.
* * *
적대파벌이 몰락한 뒤, 마이어 왕국 내 모든 유력자들은 하인즈 대마법사를 찾아갔다. 그들에게는 신과 맞서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워줄 방패막이 필요했다.
물론 하인즈 대마법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두의 방패막이가 되겠노라 선언했다.
그리하여 내 앞에 다시금 마주서게 되었다.
“보스. 아니, 이제는 신이라고 불러드려야 하오?”
“너의 뜻대로 부르라.”
“좋소, 보스. 지금 이 나라의 모든 유력자들이 보스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여념이 없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오?”
나는 몇 가지 착각을 정정해주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최종목표는 미궁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 사실이 변하는 일은 없다.”
“휴우. 그럼 우리는 선신교단과 뜻을 함께 하는 것이로군. 전국민과 함께 미궁의 주민이 되겠노라 선언이라도 하면 어쩔지 내심 시름이 깊었소. 이걸로 이 노구도 한 시름 덜었구려.”
“두 가지. 착각을 정정해줄 필요가 있겠군.”
딱딱하게 굳은 낯짝을 향해 현실을 들이민다.
“나는 선신의 진영에 속하지 않았다.”
“헉! 그럼 악신 진영이란 말이오!?”
“악신 진영도 아니다. 어떤 진영도 선택하지 않은 자만이 현인신이 될 수 있다.”
양 진영 중 하나를 선택했다면?
천계와 마계.
중간계와는 동떨어진 전혀 다른 차원의 계층에 끌려간다.
한끝차이였다.
내가 부하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여정이 갑작스레 끝나지 않게 된 것은 모든 힘의 유혹과 제안을 뿌리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나는 보다 특수한 상황에 처했다.
“흑산회 진영에 속한 모든 국민은 의무적으로 미궁을 공략해야만 한다. 미궁공략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의무다.”
“!!”
“지상의 왕국, 영토, 진영은 모두 미궁공략을 위한 최상층 거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부터 흑산회 진영은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공략태세에 돌입한다.”
늙은 마법사의 턱이 덜덜 떨렸다.
공포를 느끼는 건가?
“죽을 것이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고 말 것이오.”
“상관없다.”
“정녕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이겠단 말이오?”
이 영감은 아직 쓸모가 있다.
이대로 반감을 사기만 해서는 조력을 하지 않겠지.
미궁공략은 필연적으로 희생자를 만든다.
약한 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 심리적인 저항을 줄일 방법을 제시해야겠다.
“지금 진입하지 않으면 수십 년 뒤에는 세계가 멸망한다.”
“세계멸망!?”
“그렇다. 누군가는 심층지대에 진입해야만 한다.”
영감의 눈에는 아직도 저항감이 엿보인다.
그런가.
무게추의 균형은 아직도 기울지 않았는가.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날 도전이라고 하더라도 물러설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저항의 무게추에 내 목숨을 얹는다.
“설마! 당신 스스로도 도전이 실패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단 말이오!?”
“십중팔구는 실패한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본래라면 일말의 가능성도 없이 멸망했을 세계가 단 1할의 확률로나마 존속할 수 있다면 충분한 가능성이다.”
“도대체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오.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선신들은 용사를 선정하고 그들을 미궁으로 내려 보낼 터인데!”
게이머니까. 그런 속편한 말을 내뱉을 수는 없다.
여기서도 적당히 둘러대어둘까.
“신들은 의무를 등졌다. 왕가의 인간들 또한 계약을 어겼다.”
“신들의 의무? 왕가의 계약?”
“머나먼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인류와 신의 계약. 미궁의 몬스터들의 존재를 말소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어내고자 인간은 신을 믿고, 신은 인간 중에서 용사를 선정했다.”
물론 그딴 과거는 없다.
전부 뻥이다.
하지만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왕가는 중재자였다. 신이 권능을 내려주면 왕가는 모든 자원을 결집하여 용사를 보조하였다. 그러나 지난 백년 간, 신들의 용사선정은 점점 늦추어졌고 왕가는 용사를 돕지 않았다.”
듣는 자가 이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면.
그것이 곧 진실이 되는 법이다.
“멸혼객. 영혼살해자를 기억하는가.”
“어찌 잊을 수 있겠소.”
“그가 용사의 의무를 저버리고 반 영웅이 된 이유를 아는가.”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짐작 가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나보다.
이미 그의 안에서는 어떤 생각이 싹을 트고 있는 게 보였다.
“신들이 미궁공략을 원치 않았다. 그들의 권능은 부족했다.”
“!!”
“왕가의 지원은 미흡했다. 그들이 제공한 물자는 엉터리였다.”
“신도 왕가도 용사를 온전히 지원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심층지대에 진입했다간 개죽음 이외의 무엇도 될 수 없었다. 그걸 알았기에 그는 미궁에 진입할 수 없었다. 브람 시의 암흑가에 자리를 잡고 자신만의 권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지금, 멸혼객이 사라진 자리를 내가 이어받았다.
“신은 영원한 믿음을 받고자 인간들의 절망을 방관한다. 왕가는 영웅의 귀환을 원치 않기에 용사들의 도전을 방해한다. 그렇기에 나는 용사가 되었다. 또한 신이 되었다.”
“당신은, 보스께서는...!”
“그렇다. 나는 모두가 등진 이 시대의 어둠에 막을 고하겠다. 모든 국가를 멸하고 모든 신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미궁의 끝에 도달한다.”
같은 자리, 같은 대화.
그러나 다른 상황 속에서 나는 과거의 허물을 짚어낸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자들이 미궁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지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멈출 수 없다.”
“지상에서라면...! 지난 2년간의 암살은 모두 이날을 위한 안배였다는 것이오?”
“너는 이제 모든 진실에 도달했다. 진실을 등지고 외면한 채 다시금 백 년의 시간을 살아갈 텐가. 아니면 그 질긴 목숨을 인류의 해방을 위해 걸어볼 텐가.”
2년간의 폭정.
무수한 사람들의 암살과 죽음.
그것을 인류해방이라는 숙원과 연결 짓는다.
하인즈 대마법사는 지혜로운 자다.
나의 폭정을, 수많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신, 하인즈. 목숨을 걸고 위대한 여정에 동참하겠나이다.”
이걸로 내정은 안정되었다.
내부정비가 끝난다면 다음 역할은 뻔하다.
모든 견제를 견뎌내며 심층지대 공략을 위한 최종준비에 돌입한다. 기껏해야 파티 하나나 몇 개의 파티로 이루어진 공격대 따위로 도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도전 또한 역대급으로 성대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이 모험이 끝나면 내게 다음은 없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도 없다.
최소 백만 명.
백만대군을 이끌고 심층지대를 공략한다.
============================ 작품 후기 ============================
작가의 백만대군 연상 키워드는 수나라 군대와 당나라 군대, 오합지졸(...)입니다.